외박하는 숙이를 위해, 막차에 몸을 실었다

[옥탑방 여자와 반지하 남자의 자취방 이야기 ⑧] 그 남자의 친구들

등록 2008.11.19 15:44수정 2008.11.1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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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온 '옥탑방 여자(이유하)'와 '반지하 남자(김귀현)'가 있습니다. 푸른 꿈을 품고 서울에 왔지만, 이들의 자취생활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밥 먹는 것부터 빨래하는 것까지, 자취경력 일천한 이들에겐 모든 일이 힘겹기만 합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생생한 자취 이야기를 기사로 만나보세요. 매주 1~2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반지하에 들여놓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여놨어!"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이 자유를 한껏 만끽하고자 각종 쾌락도구를 들여놨다. 쾌락이 있는 곳엔 언제나 인간의 탐욕이 들끓는 법. 쾌락을 탐하는 자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반지하 원정대'.

탐욕 넘치는 '반지하 원정대'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둔갑해 나의 보금자리에 침투했다. 오래된 음식에 파리가 꼬이고, 습기 찬 반지하에 곰팡이가 피듯, 나만의 자유로운 공간에 시나브로 침투한 원정대.

과연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음습한 반지하의 문을 두드리는 것일까?

[쾌락 도구 ① - 술과 TV] 프라이팬과 돼지기름의 슬픈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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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술 삼총사 원정대원 A가 '키핑'해둔 술들 ⓒ 김귀현


원정대원 A, 나의 안락한 보금자리가 생겼다는 것에 나만큼 기뻐한 사람이다. 스포츠를 좋아하는 A와 나는 종종 선술집에서 적당한 알코올과 함께 스포츠 관람을 즐겼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야구를 보려면, 보통 3~4시간 죽치고 있어야 한다. 그만큼 술값이 많이 든다. 또 잘 되는 술집에선 오래 앉아있기도 미안하다. 그럼 중간에 끊고 나가야 한다. 마치 다른 어떤 것을 중간에 끊고 나온 것처럼 찝찝하다.

축구는 더 힘들다. 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를 즐겨보는데, 이거라도 볼라치면 새벽 2시까지 버텨야 한다. 비싼 술값은 물론, 덩달아 따라오는 택시비도 필수 옵션이다.

이런 우리에게 숨통을 틔워줄 공간이 생긴 것이다. 입주하자마자, A는 미친 듯이 반지하에 원정을 왔다. 소주 각 1병과 입가심용 맥주 페트 하나면 충분했다. 안주로 처음엔 간단하게 통닭을 시켜먹었지만, 나중엔 경비 절감 차원에서 삼겹살을 구워먹기도 했다.

술은 점점 고급화되어 위스키는 물론 데킬라까지 구비하게 됐다. 술집에서 마시면 소주라도 보통 둘이 3만~4만원 든다. 이 돈으로 '오자 주류'에 가면 양주 한 병을 통째로 살 수 있다. 양주를 술집에서 먹으려면 10만원은 족히 깨진다. 이 유혹을 어찌 뿌리치랴!

그러나 행복했던 A의 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일단 내가 거부반응을 보였다. A가 가고 난 뒤 쓸쓸함·허탈감, 이런 건 차치하고, 그가 떠난 자리를 치우는 건 항상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먹고 난 라면·과자 부스러기 등을 처리하는 것은 그나마 할 만했다. 통닭을 먹은 후 뼈처리, 그게 문제였다. '2편 그 남자의 식생활'에서 밝혔지만, 난 음식물 쓰레기라면 진저리를 친다. 변기마저도 처리할 수 없는 딱딱한 닭의 뼈를, 술이 덜 깬 아침에 목도하는 날엔 정말 목 놓아 울고 싶었다.

닭뼈보다 더 날 좌절하게 했던 것, 바로 프라이팬에 눌러붙은 삼겹살 기름이다. 세계적 주방용품 브랜드 'X팔'도 삼겹살 기름엔 제대로 대비를 못했나보다. 어찌나 안 떨어지던지, 닦다 지쳐 미끈한 상태로 그냥 둔 적도 있다(여기에 다시 햄을 구워먹는 만행도…).

이렇게 A의 방문에 회의감이 들 때쯤, A도 고백했다. "나 이제 집에 자주 들어가야겠어, 부모님이 걱정하신다"고 말했지만, 이미 A는 나에게 진심을 들킨 적이 있다. "너네 집에서 자면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프고 피곤하냐, 반지하라 그런가?" 살짝 흘린 말이었지만, 난 이미 이때부터 A와 이별을 예감하고 있었다.

A와 나는 이렇게 이별을 했다. 행복했지만, 우린 서로 거리를 두었을 때가 좋았다.

[쾌락 도구 ② - 게임기와 칫솔(?)] 휴지는 왜 샤워를 시킨 거야!

원정대원 A와 이별한 후, 고향 집에서 비디오게임기인 '노는 역(play station)'을 공수해왔다. 외로움을 달래고자 혼자 키패드를 만지작거리던 중, 원정대원 B가 나에게 다가왔다.

B는 게임을 위해 나에게 접근했다. 초저녁에 들어와 새벽까지 게임만 하다 가는 B. 그가 떠난 후, 난 아무도 없는 허공에 소리쳤다. "B! 나보다 게임이 좋니?"

난 이런 B에게 먼저 마음을 열었다. 함께 게임을 하게 된 것이다. 함께 하는 게임이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다. 축구 게임 '이기는 열한명'부터 삼국지 게임 '삼국쌍없음'까지 B와 함께라면 시간가는 줄 몰랐다(나중엔 나의 게임 실력이 일취월장해, 축구 게임에서 앙골라로 이탈리아를 이기도 했다).

게임 시간이 길어지자, B가 반지하에서 숙박을 하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 B의 습관이 참 고약했다. '신변 정리'의 개념이 없는 것이다.

일례로 이불을 안 갠다. 또한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한 후, 샤워기를 화장실 바닥에 내팽개쳐버리고 나온다. 화장실이 좁아 난 조심조심 샤워하는데 B가 샤워를 하면 항상 화장지와 변기 커버가 흠뻑 젖어있다. 지 몸만 닦으면 되지, 왜 휴지까지 샤워를 시켰는지…. B의 샤워 후, 변기라도 이용할라 치면, 우후~ 정말….

뒷정리 하는 것도 하루이틀이다. 몇 번 하니 정말 성질 뻗치더라. 결국 B는 대박 사고를 치고 만다.

B가 먼저 출근한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이를 닦기 위해 칫솔을 든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난 아직 사용하지 않은 칫솔이 흠뻑 젖어있던 것이다. 아! 그 참담함을 아는가.

변명조차 듣고 싶지 않았다. 난 B의 원정을 막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노는 역'의 메모리 카드를 뽑아서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다. 아는 사람은 안다. 메모리 카드 없는 '노는 역'은 '하드디스크 없는 컴퓨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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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인을 섬긴 비운의 칫솔 싱크대는 최고의 세면대가 된다. ⓒ 김귀현


[쾌락 도구 ③ - ?] 숙이의 한 마디, "우리 친구 아이가~"

A와 B를 그렇게 떠나 버린 어느 날, 나의 또 다른 친구이자 세 번째 원정대, 숙이(가명)가 찾아온다. 이 숙이는 기존의 원정대원들과는 급이 다른 '만행'을 저지르고 만다.

반지하에 원정을 온 숙이는 갑자기 내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러면서 던진 의미심장한 한 마디.

"음, 여기 둘이서도 잘 수 있겠는데?"

이 말이 빈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격무를 마치고 퇴근한 어느 날 저녁, 침대에 쏙 들어가 고개만 내밀고 재밌는 심야 케이블 프로그램을 보던 중, 다급한 전화를 받게 됐다. 숙이였다.

"나 진짜 어려운 부탁인데 좀 들어줄 수 있지?"
"어, 뭔데"
"우리 친구 아이가~ 진짜 들어줄 수 있지?"
"아~ 말하라니깐."
"오늘 너희 집 좀 잠깐 빌릴 수 있을까? 오늘 여자친구랑 화해했는데, 갑자기 분위기가 좋아져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네. 너도 알잖아, 그동안 우리 사이 좀 안 좋았던 거."

그렇다. 우린 '친구 아이가'. 난 열쇠를 숨겨놓은 비밀공간을 알려주고 재빨리 짐을 싸서 반지하를 떠났다. 그리고 고향행 막차에 몸을 실었다(고향이라고 해봐야 수원이다).

이후 난 그 친구를 '숙이'라 부른다. '투숙이'를 줄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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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히 정돈된 침대 숙이가 원했던 도구는 이것? ⓒ 김귀현



온갖 쾌락 도구를 찾아서 반지하에 원정온 친구들이지만, 난 그래도 친구가 있어서 좋다. 찬바람 부는 겨울에도 반지하가 외롭고 쓸쓸하지 않은 건 바로 '미우나고우나'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술이 아직 많이 남았다. 메모리카드도 갖다놨다. 칫솔도 두 개 사놨다. 침대 시트도 새로 깔았다. 내 사랑하는 친구들아! '반지하'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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