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아저씨와 텔레파시 통하였네

[옥탑방 여자와 반지하 남자의 자취방 이야기⑨] 그 여자의 이웃

등록 2008.11.30 10:24수정 2008.11.3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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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리폼을 하지 못한 초라한(?) 나의 신발장. 하지만 택배 아저씨와 나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다. ⓒ 이유하

"택배인데요. 이유하씨 맞으세요?"


늘 택배 아저씨의 전화는 우렁차다. 전화기 밖으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삐져나온다. 다급하게 통화 음량을 낮추면서 생각한다. 근데, 이거 착불 아냐?

"죄송합니다. 지금 밖에 나와서요."
"그럼 택배비는 어떻게 할까요?"
"그게…."

아하. 이걸 어떻게 한담? 한참을 고민하며 뜸을 들이고 있자니 평소에 나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는 듯, 택배 아저씨의 명쾌한 답변이 돌아왔다.

"계좌번호로 입금해 주세요."

그날은 어찌어찌 마무리되었지만 며칠 뒤 또 착불로 택배가 올 일이 생겼다.


며칠 전 일도 있고 해서 그 날은 머리를 좀 썼다. 집 앞에 놓여있는 신발장에 돈을 넣어놓고 전화가 오면 거기서 꺼내가라고 할 속셈이었다.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택배 아저씨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괜히 기분이 상해 집에 돌아오니, 어라? 택배가 와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가 더 놀라운 건 신발장 서랍엔 넣어 둔 5000원 중 택배비를 제하고 남은 1500원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배 아저씨와의 텔레파시? 주인집과는 필담

나는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택배 아저씨와 텔레파시를 서로 주고받을 정도로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좋아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근본적 원인은 조금 쓸쓸한 데 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택배를 대신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오는 택배 어쩌지 못하고 가는 택배 잡지 못하면서, 집 앞 슈퍼에 그 '애물단지'를 맡기기도 한단다. 그러나 나는 단골 슈퍼마저 없다.

내가 사는 옥탑의 바로 아래층엔 주인이 산다. 용기만 조금 낸다면 주인집에 택배를 좀 받아주십사 부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뿐더러 번거롭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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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방문 앞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있었다. 주인집 아줌마는 꽤나 자세하게 공과금 내역을 적어놓았다. 하지만 놀라운 건 수도세를 나누면서 적어놓은 23명의 정체다. 이 집에 23명이 산다고? 도대체 어디? ⓒ 이유하


그래서 나는 결국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주인집 아주머니와는 한 달에 딱 한 번 공과금을 내야할 때가 되어서야 겨우 짧은 대화 몇 마디를 나눈다.

대화는 매우 단순하다. 아줌마는 한 달에 한 번 날짜가 되면 내 방문 앞에 공과금을 적어놓은 쪽지를 붙여놓고, 난 그 쪽지를 보곤 아줌마를 만나면 돈을 건네준다. 그게 끝이다.

"공과금인데요. 계속 못 만나서 빨리 못 드렸어요."
"아, 네. 괜찮아요."
"… 그럼 안녕히 계세요."

어쩔 수 없는 대화 마지막의 어색한 공백. 재빨리 인사를 함으로써 한 달만의 대화는 깔끔하게 정리된다.

가끔은 우리집에서 썩어 문드러져갈 예정인 고구마 몇 점을 건네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괜히 손이 머쓱하여 그만뒀다.

빌라에는 누가 누가 살고 있나

나는 내가 사는 빌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반지하를 제외하고 3층으로 이루어진 빌라의 옥탑에 살고 있는 나. 반 지하와 1층, 2층엔 각각 3가구가 살고 있고, 주인집이 있는 3층엔 2가구가 살고 있다. 거기에 옥탑에 있는 우리집을 합쳐 총 12가구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빌라에 사는 사람들의 이름은 알고 있다. 우편물이 마구잡이로 섞여서 1층 복도에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난 혹시나 있을지 모를 우편물을 찾느라 그 우편물 더미를 날마다 뒤적여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엔 늘 상습 연체범(?)이 있었고, 꼭 우편물을 안 들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게으른 건지, 이미 이사를 가버린 건지 알 도리가 없지만 여하튼 나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 이름과 얼굴을 맞춰볼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심심한 나머지 옆구리가 배배 꼬이는 어느 날 '복도 이웃'들을 관찰해 보았다.

먼저 주인집은 언제나 사람이 많다. 꽤나 화목한 듯 주말만 되면 주인집 할머니를 보러 온 손자·손녀들로 가득하다. 아이들은 주말 아침만 되면 오랜만에 길고 달콤한 늦잠을 자고 있는 나의 귀를 마구 자극하는 복도 소음의 주범이긴 하지만 크게 거슬리는 건 아니다.

3층에 있는 또 다른 방 하나에 사는 남자는 가끔 텔레비전 볼륨을 엄청 크게 틀어 놓는다. 그 소리가 우리집까지 들리는 건 아니지만, 복도를 내려갈 때면, 소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이 남자는 약간 불안한 성격을 가진 것 같다. 나는 이 남자가 주인집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아니면 단지 같은 3층에 살고 있을 뿐인지가 가장 궁금하다.

그 아래로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내 또래 여자들이 두서넛 있다. 그들은 가끔 남자친구를 데려오기도 하는 평범해 보이는 학생 내지 직장인이다.

여기서 놀라운 건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이다. 나는 이들과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들은 아이들과 부모로 이루어진 가족이었다. 내 방과 견주어서 다른 방이 얼마나 큰 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 식구가 살기엔 복작복작한 크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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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를 사이에 두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세 개의 방. 차갑다. 같은 층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할까? ⓒ 이유하


우리는 언제부터 담을 쌓고 방문을 걸어 잠궜을까?

내 친구 중에 한 명은 여자 혼자 서울에서 자취를 함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더군다나 때때론 창문도 닫지 않고 밖에 나간다. 잠시 그 아이의 집에서 같이 산 적이 있었는데, 하도 궁금해서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집(부모님이 사는)은 원래 문 안 잠궈. 동네 사람들이 언제든 놀러오는 거지."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아이의 소박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뒷집 여자가 어떤 괴한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일이 일어나면서, 내 친구도 이젠 어쩔 수 없이 문을 잠그고 다닌단다.

작은 방과 방, 집과 집, 도시와 도시가 서로 거미줄처럼 엮여서 살아가는 우리가 점점 이웃을 잃어가는 이유는 하나씩 가진 것들이 늘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내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공포가 늘어나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도, 내일도, 혹은 일 년 이상 이곳에 살아도 나는 이웃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서로의 방문 너머를 궁금해 하며, 나만의 정보로 그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그게 실제의 그 사람과 얼마나 비슷할지가 궁금해진다.

아! 그렇다면 이웃이 보는 내 모습은 어떤걸까? 혼자 너무 자유롭게 살아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구에게도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 참 답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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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탑방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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