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서 가장 큰 그릇, 찻사발이 들려주는 이야기

[서평] <다기·작은 공간의 미학>을 읽고

등록 2008.12.04 11:14수정 2008.12.0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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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살고 있는 고장에는 약 1000년 전에 융성했던 도기의 영광을 기념하는 '영암 도기문화센터'가 있다. 무문토기 - 빗살무늬 토기 - 도기 - 시유도기 - 녹청자 - 청자 - 분청사기 - 백자로 이어지는 도자의 역사를 한 눈에 조망해 볼 수 있고 세계 여러 나라의 도자기 연대를 비교해 볼 수 있는 역사관, 도기를 직접 제작하는 가마와 도기 체험장, 다기나 컵 등을 판매하는 도기 판매장 등이 자리 잡고 있어서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볼 만한 매력적인 장소이다.

 

이 영암도기는 우리나라 도자 역사상 최초로 유약을 입힌 ‘시유도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로 구림마을과 그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었으므로 일명 구림도기라고도 불린다.

 

영암 도기문화센터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마한시대의 옹관 ⓒ 김창오

그런데 이 도기문화센터에는 시유도기보다 500년 앞선 시대에 만들어진 옹관이 전시되어 있다. 이 옹관은 영암과 나주 일대의 영산강 유역에만 분포하는 독특한 형태의 관이다. 역사책에서 옹관묘라는 말을 들어서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실물을 직접 대면한 것은 도기문화센터 전시실에서였다.

 

처음 옹관을 보았을 때 받은 묘한 느낌과 충격은 그 후로도 자꾸 도기문화센터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1500년 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토록 거대한 옹관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물잔 하나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나로서는 그저 신기하고 신비스럽게만 보였다. 누군가의 무덤(아마도 부족장이나 세력가의 무덤)이었던 커다란 옹관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서 있곤 했었다.

 

요즘 나에게 이와 비슷한 일이 생겼다. 차이가 있다면 단순히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읽고 또 읽는 것이고, 넓은 공간에서 그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서재의 툇마루에서 그것을 손에 들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 대상은 바로 김동현 선생이 지은 <茶器·작은 공간의 미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차 문화를 다루고 있는 기존의 책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기존의 차 관련 책들은 차의 역사나 문화, 그리고 도자기의 역사를 단순히 학술적으로 다루고 있거나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일부의 책들은 차 문화 유적지의 답사 기행문을 담고 있거나 개인적인 차 생활을 내용으로 한 수필집들이다. 전자의 책들은 관찰자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객관적이긴 하지만 지극히 설명적이어서 다소 지루할 뿐만 아니라 현장감이 떨어진다. 후자의 책들은 개인의 주관적인 감상이 많이 서술되므로 흥미가 있고 현장감이 있긴 하지만, 자칫 객관성이 결여되기 쉽고 차 문화 전반에 걸친 전체적인 윤곽을 머리에 그려보기가 쉽지 않다.

 

<茶器·작은 공간의 미학>이라는 이 책은 주관과 객관, 설명과 묘사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어서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준다. 이 책의 저자는 수 십 년 동안 꾸준히 차를 마시며 심신을 수양해온 다인일 뿐만 아니라 직접 차 도구를 만들어 쓰는 사기장인 동시에 전국의 요장을 찾아다니면서 수많은 사기장들을 만나 그들의 작품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해온 취재기자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이력과 취향이 이 책을 엮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들이 중요하긴 하지만 이 책을 읽을 만한, 다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책으로 만드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저자의 섬세한 감성과 세심한 관찰력, 그리고 유려한 필치이다. 글 한 줄 한 줄마다 깊은 사색과 잔잔한 감동이 배어 있다.

 

게다가 이 책 곳곳에 들어있는 컬러 사진은 저자의 자세한 설명과 묘사와 더불어 차 문화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사진 한 컷 한 컷 또한 사진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찍은 흔적이 그대로 나타난다.

 

다기·작은 공간의 미학 ⓒ 김창오

이 책은 주제별로 동양의 고전음료로서의 차, 도자기 이야기, 다기의 미학, 조선의 찻사발, 다도구, 다실 등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주제별로 다양한 소주제들이 있고 저자의 생활철학과 미학관이 섬세한 필치로 펼쳐 있다.

 

그의 묘사는 때로 자그마한 다실에서 피어오르는 향불 연기처럼 부드럽고, 때로는 1300도로 타오르는 장작 가마 속의 불꽃처럼 정열적이다. 저자가 운전하는 타임캡슐을 타고 고대의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茶 여행을 하면서 독자들은 신비스러움과 안타까움과 민족적 자존감을 동시에 맛보게 된다.

 

그는 롤러코스터처럼 급경사로 독자들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샛강이 흐르는 대평원과 산기슭에 접한 구불구불한 신작로로 인도한다. 그러나 모든 구간의 산과 강이 낮고 얕은 것만은 아니다. 중간 중간 높은 산과 깊은 강을 만나게 된다. 저자는 높은 산을 넘을 때는 높은 기상과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깊은 강을 건널 때는 깊은 사색과 통찰력을 발휘한다. 독자들은 그를 따라가는 동안 높은 산을 만나면 함께 높아지고, 깊은 강을 만나면 함께 깊어진다.

 

이 책의 저자는 30년이 넘게 가마에 불을 지펴왔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가마를 만들고 불을 지펴온 것은 아니리라. 어쩌면 저자 자신도 이렇게 오랫동안 가마에 불을 지펴온 것인 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아니, 대부분의 차인들은) 말한다, 조선의 사발이 그토록 찬미를 받아온 이유는 “무작위의 미” 때문이라고. 조선의 사기장들은 찻사발을 만들 때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무심의 경지에서 그저 생활에 필요한 사발을 만들었을 뿐이다. 수십 년 동안 사발을 만들면서 다져진 기술과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저런 무애의 미를 발산하는 찻사발을 만들어 낸 것이다.

 

<茶器·작은 공간의 미학>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경험해온 지난 30년 동안의 차 생활과 차 관련 활동이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서 숙성되고 발효되어 어느 순간 밖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이 책일 것이라는 느낌. 그렇다면 이 책의 저자 역시 의도하지 않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찻사발(책)을 한 점 탄생시킨 것이리라.

 

저자가 이 책의 제목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이, 찻사발은 매우 작은 공간을 갖고 있는 기물이다. 하지만 그는 단지 작은 공간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조그마한 찻사발의 차고임자리에서 시작된 그의 의식은 오름선을 타고 입전을 넘어 저 무한한 우주로 확대된다. “유약 바른 항아리”를 타고 떠난 그의 의식은 광활한 우주을 여행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다시 찻사발 내부의 한 점 공간인 차고임자리로 되돌아온다. 저자와 함께 여행하는 독자들 또한 확장과 수렴을 반복하면서 우주의 율려를 체험한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과 수렴의 체험은 이 땅에서 나름대로 주관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매우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일상생활의 무료함과 피곤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그래서 일상탈출을 시도하지만, 대부분 다시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일상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도 실종신고를 당하게 되거나 과대망상증 환자로 대우받기 십상이다. 또한 일상생활에만 갇혀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정상은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폐증 환자로 분류되기 쉽다. 세상을 제대로 산다는 일은 어쩌면 집 밖으로 들고 나는 일과 의식 밖으로 들고 나는 일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따뜻한 가루차가 담긴 찻사발을 두 손으로 받아 든 채로 차인들은 이 조그마한 찻사발이 말해주는 존재와 소멸, 질서와 무질서,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미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든 단기출가를 떠나든 사람들은 집이라고 하는 작은 공간을 중심으로 문 밖으로 들고 난다.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술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잔을 매개로 하겠지만, 우리 차인들은 찻잔을 매개로 마음을 의지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 작은 찻사발의 공간은 확장하면 무한공간을 담아내고 축소하면 다시 본연의 몇 치 안되는 작은 공간으로 돌아온다. 찻사발은 작은 그릇에 불과하지만 무한한 하늘의 숨결과 찻잎 속에 숨겨진 땅의 정기와 정성을 다하는 사람의 마음을 담아낸다. 차의 정신에 비추어 세계를 보려고 하는 다인들에게 있어서 찻사발은 지상의 모든 그릇 중에 가장 큰 그릇이 된다. 가장 큰 그릇,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에 귀를 기울여보자.”

 

사람의 말이든 사물의 말이든 그것에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이는 복이 있는 사람이다. 분주함 속에서 스스로 여유로움을 찾고 차 한 잔을 음미할 줄 아는 이 역시 복 있는 사람일 것이다. 게다가 조그마한 찻잔 속에 들어있는 작은 공간의 미학을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리라. 그리고 찻사발이 들려주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저자 김동현이 말하려는 것에 대해서도 귀 기울여보자. 이 독특한 차 이야기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끝까지 듣다보면 우리 차문화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고 이미 예전과는 다른 차인이 되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 훌륭한 차문화 길잡이 신서가 출판되었다는 것은 우리 차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를 사랑하고 알고 싶어 하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축복이다. 차茶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나 차를 오랫동안 접해온 사람들이나 이 책은 꼭 손 가까이에 두고 읽어봐야 할 차문화 필독서라는 생각을 감히 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잡지 "차와 사람들"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12.04 11:14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월간 잡지 "차와 사람들"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기 작은 공간의 미학

김동현 지음,
차와사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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