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하고만 있겠다고? 우린 그렇게 안 해!

[서평] 수렵채집사회에서 여성은 어떻게 살았을까? <니사>

등록 2008.12.16 10:10수정 2008.12.16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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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고전으로 불리는 <니사>가 한국에도 번역되었네요. ⓒ 삼인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늘 궁금한 물음이지요. 인류의 선조들이 진화해온 역사까지 더하면 인류는 3백 만년에 달하는 시간동안 수렵채집생활을 하였어요. 인류사에서 거의 99퍼센트에 가까운 시간이지요. 농업사회는 1만 년쯤, 산업사회는 겨우 200년밖에 안 되었지요. 수렵채집 생활방식은 이제 거의 사라졌지만 인류의 특질은 수렵채집을 하며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기에 수렵채집생활은 여전히 의미 있지요.

그렇기에 인류학자들은 수렵채집부족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과거와 뿌리를 연구하였지요. 그 가운데 칼라하리 사막 도베지역에 사는 !쿵족은 관심을 끌지요. 지구에 몇 남지 않은 수렵채집생활을 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인류의 가장 오래된 조상의 직계 후손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죠. !쿵족은 영화 <부시맨> 때문에 널리 알려진 부족이지요. 그러나 부시맨은 낮잡아 부르는 말로,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지요.


먼저 !쿵족에서 !쿵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짚고 넘어가죠. '!음'은 치조구개음(齒槽口蓋音)으로 사람들이 아이를 어를 때 혀끝으로 입천장을 차면서 '딱딱'하고 내는 소리와 비슷해요. !쿵족은 딱쿵족이라고 발음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슷할 거예요. 

지은이 마저리 쇼스탁은 '딱딱' 소리를 내며 수렵채집생활이 사라지기 전 !쿵족의 삶으로 들어가지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채집 여행에 함께 하지요. 그들과 같은 오두막에서 기거하며 그들이 먹는 황야음식만을 먹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그들이 논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기록해요. 그리고 여러 !쿵족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녹음하지요. 그렇게 자료를 모은 뒤 10년에 걸쳐 번역하고 정리하여 <니사>를 내게 되어요.

1980대 중반에 나와 20만 부 이상 팔리며 화제를 낳았던 <니사>(삼인. 2008)가 한국에서 나왔네요. 주인공 니사는 전통 수렵채집생활을 하는 쉰 살 !쿵족 여성이지요. 책은 니사가 지은이에게 털어놓는 이야기와 니사 이야기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지은이가 !쿵족 생활양식을 설명한 민족지로 이루어져 있어요. 민족지란 연구하려는 사회에 인류학자가 들어가 자료를 수집하여 그 문화의 여러 모습을 쓴 보고서를 말해요.

니사, 성해방을 부르짖은 여성주의자들을 열광시키다

주인공 니사는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에요. 니사가 걸고 푸지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참으로 생생하고 재미있어요. 가족에 대한 기억, 성에 눈뜰 때, 결혼생활, 자식이 죽은 일, 수많은 애인들과 사랑을 나눈 일, 늙음에 대해 두런두런 알려주지요. 마치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조카딸에게 인생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하고 자기 이야기를 맛깔나게 늘어놓는 듯 싶어요.


그 가운데 지은이는 니사를 비롯한 !쿵 여성들이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집중해요. 지은이가 여성주의에 영향를 받고 뚜렷한 문제의식을 품고 있기 때문이죠. 사랑, 결혼, 섹슈얼리티, 일, 정체성 등등 여성성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씨름하는 젊은 여성이라고 스스로 정의하죠.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쿵 여성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어보고 관찰함으로써 여성을 따져보네요.

지은이의 뜻에 완전히 꼭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서구 여성주의자들이 추구한 독립과 평등을 !쿵족에서 찾지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수렵채집을 하는 !쿵족 여성의 삶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그러하다고 설명할 증거가 될 수 있지요. 책을 읽어보면 현대의미에서 양성평등하다고 볼 수 없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여성을 억압하는 제도가 있고 사람들 생각이 덜하니까요.

"지금껏 내 애인들 얘기를 했지만, 다 털어 놓은 게 아니야. 그 수가 내 숟가락 발가락을 합친 것만큼이나 많았거든. 나는 나쁜 년이야. 애인 하나 없는 자네와는 다르지. 여자가 되었으면 말이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있기보다는 애인을 사귀게 마련이거든. 한 남자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한 남자하고만 있겠다고? 우린 그렇게 안 해. 자네가 보기에는 남자 하나로 충분할 것 같아?" - 책에서

자유롭게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한 뒤에도 애인들을 거느리는 니사의 모습은 서구 여성주의자들을 열광시켰지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감정과 성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니사에게 짜릿함을 느끼죠. 성 억압을 당하고 있던 여성들은 당연하게 열렬한 반응을 보였고 책 <니사>는 인류학과 여성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꼭 읽어야 할 책이 되었지요.

1970~80년대는 여성해방운동이 크게 번지면서 굳어져 있던 여성 노릇을 재검토하며 구성된 성(gender) 비판이 한창이었지요. 그 흐름에 맞춰서 !쿵족 여성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밝힌 <니사>는 역사 시대 전 수렵채집생활에서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 드러나는 좋은 자료가 되지요. 여성을 억압하는 현대 문화를 반성하는데, 힘을 싣는 책이네요.

책 <니사>가 갖고 있는 중요한 의미들

수렵채집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밝혔다는 점에서 대단한 책이지만 인류정치학에서도 큰 의미가 있지요. !쿵족은 아프리카 토착민으로 글자체계가 없어서 그들의 생각이 서구사회에 전달되기란 불가능하지요. 그런데 <니사>는 토착민에다 문맹자라는 이중 억압을 넘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전했어요. 거기다 성 억압까지 넘어 여성의 목소리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요.

또한, 지은이에게 인상 깊은 것이 백인 특권층으로서 자기 성찰을 끝없이 한다는 거예요. 고유문화의 보존을 대변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토착민 문화를 오염시키는 백인인류학자의 난처한 상황과 죄의식을 예민하게 적어 놓았어요. 거기에 니사를 비롯한 !쿵 사람들과 삐거덕거리면서 발전한 관계를 솔직하게 옮겼지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낀 갈등과 회의, 저지른 실수까지 고스란히 털어놓네요.

이렇게 연구자와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 넘는 과정을 밝히는 것 자체가 구술생애사 연구에서 중대한 작업이에요. 연구자와 화자는 서로 불평등한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지요. 연구자는 무의식중에 듣고 싶은 말을 꾈 수 있고 화자는 연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려는 유혹이 있지요. 그렇기에 지은이의 감정변화와 성찰은 니사의 이야기를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하게 돕지요. 인류학자와 현지인의 미묘한 권력관계를 이처럼 섬세하게 묘사한 글은 드물지요.

그럼에도 문화진화론 관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인종 편견이 일정 부분 있다고 비판받지요. !쿵족이 과거 서구 제국주의에 입은 피해를 인식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쿵족을 역사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로 이상화하는 모순에 빠졌다는 지적도 있다는 점, 무시할 수 없지요.

무엇보다 <니사>는 성평등을 생각하게 해요. 여성이 하는 일과 살아가는 방식은 각 문화권마다 상당히 다르지만 대다수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낮은 자리에 있고 여성의 활동은 남성의 활동에 비해 그 가치가 낮게 평가되어요. !쿵족도 모계사회가 아니기에 어느 정도 남성이 더 중요한 권위를 차지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서로를 착취하지 않고 놀라울 정도로 성 평등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 일러주는 게 많네요.

21세기 현대도시문명에서 남성이 바라본 니사

뭐든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재평가 받게 되지요. 21세기, 한국에서 살아가는 남성으로서 봤을 때 니사는 재미있는 인물이에요. 수렵채집사회에 있는 성차이와 거기에 따른 행동들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남녀 권력 관계와 도시문명에서 구성된 성차를 톺아보게 해요.  그러나 이미 몸에 밴 성에 대한 인식은 니사를 좋게만 볼 수 없게 하네요. 책을 번역한 유나영씨는 옮긴이의 말에다 이렇게 적었네요.

"솔직히 말해서 니사는 개인적으로 각별히 친하게 지내고픈 사람은 아니다. 그녀는 어이없을 정도로 방종하고 욕심 많고 이기적인 면도 엿보이는 데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나대고 다니는 여자다." - 책에서

지은이 쇼스탁도 이러한 니사의 성격을 좀 더 도덕을 지키고, 도시인들에게 호감 가는 인물로 포장하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꼈다고 고백해요. 니사가 도시문명 사람들의 도덕 기준을 크게 위반하지 않아야 사람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미화되지 않았기에 기존 남녀 성역할을 정직하게 뒤엎을 수 있지요. 니사를 안 좋게 보는 것은 그미의 성격 탓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착한여자' 강박관념이 있다는 반증이니까요.

이것저것 대가를 요구하며, 기억력과 표현력이 뛰어난 니사는 '순진무구한 야만인'이란 신화를 부수지요. 나아가 남편 몰래 많은 애인과 잠자리를 갖는 그의 행동을 보면서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문명을 돌아보게 하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쿵족 남성들도 니사가 하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연애를 하는데 유독 니사가 털어놓는 자유분방한 연애만 불편하게 받아들인 자신의 성윤리를 꼬집을 수 있게 되네요.  

오늘날, 순수한 수렵채집생활을 유지하는 !쿵족은 거의 사라졌지요. 다른 토착민들과 마찬가지로 !쿵 사람들도 과거 수백 년 동안 제국주의에 짓밟히고, 살던 땅을 빼앗기지요. 사냥기술을 지닌 세대는 많이 줄어들고 농사를 지으며 정부의 배급에 의존하는 횟수가 늘어나지요. !쿵족의 수렵채집 생활은 이제 책으로만 만날 수 있지요. <니사>를 읽으며 머나먼 과거, 인류가 수렵채집 하던 때를 상상해봅니다.

니사 -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 이야기

마저리 쇼스탁 지음, 유나영 옮김,
삼인, 2008


#니사 #수렵채집 #여성주의 #인류학 #!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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