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가 격려하면 뭐하나? 일거리가 있어야지"

설 곳 없는 일용직 노동자, 얼어붙은 새벽 인력시장

등록 2008.12.24 12:05수정 2008.12.24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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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첫차에 몸을 실은 일용직 노동자들 ⓒ 김환

새벽 첫차에 몸을 실은 일용직 노동자들 ⓒ 김환
 

지난 18일 새벽 5시, 일용직 노동자들이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첫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로 몰려든다. 등에는 큰 가방을 메고 초조하게 기다리다 열차가 도착하자 하나둘 올라탄다. 지하철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열차가 정거장에 멈춰 서면 행여나 숨소리가 들릴까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는다.

 

새벽 5시 50분 서울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 가방을 든 몇몇 사람은 지하철에서 내려 무거운 발걸음을 뗀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100여 명이 역 주변 이곳저곳에 흩어져 서성대고 있다.

 

"형님! 나 먼저 가유. 미안해유."

 

40대 초반의 남성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봉고차에 올라탄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괜스레 애꿎은 땅에 발을 끌어본다. 이것이 2008년 겨울 새벽 인력시장의 모습이다.

 

"우리 이러다가 노숙자 되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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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가 타들어가듯 일용직 노동자의 가슴도 타들어간다. ⓒ 김환

담배가 타들어가듯 일용직 노동자의 가슴도 타들어간다. ⓒ 김환

일용직 노동자들도 10년 만에 찾아온 경제 불황을 피해가지는 못 했다. 불황은 중산층의 소비심리마저 얼려버렸고, 이는 일자리 부족으로 이어져 서민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하고 있다. 건설경기침체와 비수기까지 겹치면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일거리 찾기는 매우 어려워졌다.

 

취재 도중, 20년 동안 목수로 살아왔다는 김아무개(52·구로동)씨가 선뜻 먼저 말을 걸어왔다.

 

"총각! 누구한테 말 좀 해줘. 우리 이러다가 노숙자 되게 생겼어! 2주 동안 일을 못해서 새벽 4시부터 나와서 기다리는데 자리가 없어. 오늘도 하루 종일 굶게 생겼어."

 

멀리서 이 말을 듣던 다른 아저씨가 크게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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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용직 노동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 김환

한 일용직 노동자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발걸음을 돌리고 있다. ⓒ 김환

"이런 것 취재해봤자 소용없어. 얼마 전에도 새벽에 한승수 국무총리가 왔다갔는데 열심히 하라고 격려만 하고 갔어. 격려하면 뭐하나? 일거리가 있어야 열심히 하든지 하지!"

 

기다리던 몇몇 사람들이 감정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오전 6시 30분, 그들 중 30% 정도는 '행운의 봉고차'에 올라탔다. 봉고차에 올라타면 일단 성공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기 때문에 모두 그 차에 올라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봉고차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서서히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이제 집에 가야지. 오늘도 놀겠네. 젊은 사람이 추운데 여기서 뭐해! 빨리 집에 가."

 

한 아저씨가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인력사무소 관계자에 따르면 예년에 비해 절반 이상 일자리가 줄어 아침 일찍 나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인력사무소마저 문을 닫는 실정이다. 남구로역 주변의 5개의 인력소 중 4개는 이미 영업을 중지한 상태이다. 일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당의 10%씩 받아 운영하는 인력 사무소도 어려운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나마 규모가 큰 인력사무소만이 영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일은 중국인보다 내가 훨씬 잘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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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에 대한 규정이 있음에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김환

외국인에 대한 규정이 있음에도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김환

"기자님! 여기 보소. 저쪽에 웃으면서 모여 있는 사람 보이죠? 저 사람들 때문에 자리 뺏겨 이러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외국인에게 더 관대한 나라가 어디 있소?"

 

한 아저씨가 다가와 대뜸 한 말이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중국인들이 일거리를 구한 후 봉고차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중국인들이 인력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몇 년 전부터 상대적으로 일당이 높은 한국인들이 밀리고 있다는 것이다. 불황이 계속되면서 이런 현상은 심화되고 있었다.

 

○○인력사무소 게시판에는 "외국인은 절대 현장일을 나갈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이 써 있었다. 그러나 불황 속에서 상대적으로 싼 인력을 찾는 건설현장 분위기와 맞물려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한 달 전에 외국인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뺏겼다는 박아무개(41·구로동)씨는 "그놈의 경제가 문제지. 일은 중국인보다 내가 훨씬 잘하는데 말이야…"라며 억울한 마음에 말을 잇지 못했다.

 

새벽 인력시장에도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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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국밥 아주머니 ⓒ 김환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무료로 식사를 제공하는 국밥 아주머니 ⓒ 김환

오전 7시가 되자 햇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아직도 몇몇 일용직 노동자들이 희망을 가지고 일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 한 아저씨가 자판기 커피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춥지? 여기 오래 있네. 이거 마시면서 해. 힘들어도 웃으며 살아야지. 어쩌겠어… 하하."

 

'다들 가셨는데 지금까지 뭐하세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용접공 이아무개(54·철산동)씨가 말문을 열었다.

 

"내가 4년 전까지 중소기업 과장이었어. 회사가 어려워져서 4년 전부터 남구로역으로 나오는데 올해가 최악이야. 자리가 있어야 일을 하지. 근데 운이 좋으면 자리가 7시 넘어서도 가끔 나오거든. 올겨울 지나면 내년엔 좋아지겠지…."

 

이씨는 말끝을 흐린 후 발걸음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에는 아쉬움과 씁쓸함이 묻어있었다.

 

오전 7시 30분,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모이더니 줄을 서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한참 후, 한 아주머니가 길거리 모퉁이로 작은 수레를 가져와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모인 사람이 50여 명이 되었고 줄을 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얼마 후 그 아주머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국밥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빈속으로 나와 일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식사라서인지 밥을 주걱으로 한가득 담았다.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씁쓸함을 따뜻한 국밥 한 그릇으로 위로하는 듯했다.

 

국밥을 다 나눠줄 때까지 기다린 후 조심스레 다가가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입을 굳게 닫은 채 국밥 먹는 사람들만 쳐다봤다. 한참이 지나서야 아주머니가 짧은 한마디를 꺼냈다.

 

"그냥 하는 거야. 내가 좋아서… 됐지? 이제 가봐. 어이, 박씨 아저씨 한 그릇 더 잡숴봐!"

 

이 짧은 한마디에 더 이상 어떤 말도 물을 수 없었다.

 

2008년 12월의 남구로역 새벽 인력시장. 웃음을 잃어버린 일용직 노동자와 아직은 남아 있는 따뜻한 희망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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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로역 인력시장의 모습 ⓒ 김환

▲ 남구로역 인력시장의 모습 ⓒ 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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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2008.12.24 12:0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제3회 전국 대학생 기자상 공모전 응모기사입니다.
#일용직 #인력시장 #직업소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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