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1호선, 15년간 4000번 달렸다

설경구 방은진 나윤선 등 스타 산실, 이번 작품 끝으로 휴식

등록 2008.12.30 19:29수정 2008.12.3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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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15년간 상연하며 4000회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 지하철1호선


서울의 지하철 1호선은 계속 길어진다. 동두천과 의정부, 수원, 인천을 오가던 열차는 어느새 천안까지 늘어났다. 서울과 인천, 경기를 오가던 열차가 충남으로 이어지는 동안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역시 4000회 공연이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창작 뮤지컬 공연이 드물었던 1994년, 아니 뮤지컬이라는 공연양식 자체가 소수 장르였을 때 시작된 공연이 무려 4000회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동안 지하철 1호선은 한국의 대표 창작 뮤지컬로 성장했다.


작품에 참여했던 권형준, 나윤선, 방은진, 설경구 같은 출연배우들은 TV와 영화, 대중음악계로 진출했고 지하철 1호선의 원작팀이었던 독일의 그립스 극단과 극단 학전의 작품이 서울과 베를린에서 교차 상연되기도 했다. 특히 한국판 지하철 1호선의 역동성에 감동한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는 2000년 이후 작품의 저작권료를 완전히 면제해주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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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를 찾는 사람들에게 <지하철 1호선>은 신고식 같은 작품이었다. ⓒ 지하철1호선

당연히 지하철 1호선을 상연했던 소극장 학전은 늘 만원이었고 대학로를 찾는 연극팬들에게 지하철 1호선은 대학로의 신고식이자 터줏대감 같은 작품이 되었다. 지하철 1호선은 한번 이상 보는 게 당연한 작품이었고 그 인기는 해외 공연을 거치며 일본과 중국 관광객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이제는 문화시장에서 뮤지컬 시장 규모가 급성장한 지금도 창작 뮤지컬 작품을 찾기는 그다지 쉽지 않다. 뮤지컬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서구 작품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가벼운 연애담과 화려한 볼거리들로 치장한 작품들이 뮤지컬을 그저 단순한 오락거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속에서 사람 냄새, 땀 냄새 나는 현실주의적 작품인 지하철 1호선은 단연 드물고 또한 값지다.

지하철 1호선은 비록 독일 원작이 바탕이지만 철저히 한국 현실에 기반한 작품으로 탈바꿈되어 상연되면서 연주의 실연, 한국어의 리듬감과 발성을 제대로 살린 노래, 안정된 연기라는 기본에 충실했고 언제나 잘 조련된 배우들을 선보임으로써 언제 보아도 믿음직한 작품이 되었다. 비록 1998년 IMF 직후라는 극중 현실은 이제는 10년 전 상황이라 현실적 감흥의 농도가 묽었지만 매해 작품을 수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고육지책으로 이해되기도 했다.

교감과 소통 이뤄지지 않는 지하철 1호선...현대 서울 사람들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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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인물들보다는 가난하고 삶의 풍파에 찌든 인물들이 지하철 1호선 주인공이다. ⓒ 지하철1호선


지난 11월 20일부터 시작된 4000회 공연은 4000회 공연을 축하하고 새롭게 달라지는 지하철 1호선을 준비하기 위한 공연으로 지금껏 지하철 1호선에 몸 담았던 배우들이 번갈아 출연했다. 연인원 100여명의 출연진들은 그 자체로 지하철 1호선이 걸어온 역사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록밴드 무임승차의 연주로 시작된 공연은 변함없이 서울역에 막 도착한 선녀의 노래로 이어졌다. 연변에서 만난 애인 '제비'를 찾아 서울역과 청량리를 오가는 하루 동안 그녀는 지하철 1호선을 매개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곰보할매, 빨강바지, 날탕, 철수, 안경, 강남사모님, 청소부, 회사원 등을 비롯한 수많은 출연진들은 1998년 당시 한국 사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부유한 인물들보다는 가난하고 삶의 풍파에 찌든 인물들이 지하철 1호선을 탄 선녀의 눈을 통해 비춰지는데 극의 주요한 공간은 바로 지하철 1호선이라는 공간과 청량리 588 사창가. 그 어느 지하철보다 오래되고 가난한 이들이 많은 지하철 1호선에서 극중 인물들은 끊임없이 스쳐가고 마주치지만 그저 훔쳐보고 속으로 욕할 뿐 마음을 연 소통은 부재하다.

지하철 1호선에서 흘러가는 사람들은 바로 누구나 아는 현대인들이다. 각자 갈 길에 바빠 지하철을 탔을 뿐 어떠한 교감과 소통도 이뤄지지 않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한 서울의 자화상이다. 그것은 단지 지하철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닫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공 선녀가 멋도 모르고 찾아간 청량리 588은 무시무시한 사창가이지만 사람 사이의 정과 믿음이 남아 있는 곳이다. 삶을 포기한 퇴물 창녀 걸레는 가짜 운동권 수배자 안경을 위해 (혹은 자신의 환상을 위해) 자신의 순정을 바치고, 창녀촌의 삐끼 철수는 걸레와 선녀를 걱정한다.

삶의 원초적 욕망인 성욕이 자본과 결합되어 성매매로 왜곡된 588에서 사람들은 속고 속이며 망가지지만 마음 속의 순정 하나만은 결코 버리지 않는다. 선녀는 날건달임에 분명한 ‘제비’ 찾기를 멈추지 않고, 걸레는 자신의 꼬깃꼬깃한 화대를 안경에게 수줍게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극중에서 가장 민중적인 낙관을 보여주는 포장마차 곰보할매의 모습은 얼마나 튼실한가.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부유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청량리 588, 서울역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만들어내는 서울의 다층적인 면모는 현실을 냉정하게 들여다보면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김민기의 발언 같다. 주인공 선녀가 그 고귀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를 빼면 가장 천대받는 연변 조선족 여성으로 설정되고 지하철 1호선을 타며, 창녀와 노숙자들의 공간에서 헤매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것이다. 가장 낮은 이의 낯선 눈을 통해 우리의 당연한 일상은 그 잔인함과 비정함,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했다.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본 독일과 한국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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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1호선 속 사람들의 꿈은 결국 이뤄지지 않는다. 걸레와 인경의 사랑도 결국 무너진다. ⓒ 지하철1호선


지하철 1호선 안에서 어떤 희망도 찾을 수 없었듯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작은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는다. 극중에서 드물게 로맨스를 보여줄 뻔 했던 걸레와 안경의 사랑도 결국 헛된 기대가 무너지면서 끝나고 만다. 안경은 수배중인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고 절름발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선녀가 애타게 찾는 제비 역시 그냥 제비였을 뿐이다.

결국 걸레는 달려오는 지하철 1호선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선녀는 아이를 가진 채 연변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밑바닥 사람들은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지속되는 삶을 살아간다. 독일의 원작이 지하철 1호선에서 만난 사람들 사이에 피어난 풋풋한 연대의식으로 마무리되는데 반해, 우리의 지하철 1호선은 밑바닥 인생들의 끈끈한 삶을 보여주는 차이가 분명하다.

이것은 아직 우리 사회가 지하철 혹은 일상에서 만나는 타인들과 어떤 연대와 소통을 일궈갈 만큼의 여유와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일까? 불우이웃돕기 모금에 작은 정성들이 크게 모이는 사례나 지난 봄 무수히 밝혀졌던 촛불집회 속에서 확인된 배려와 이해에 비해 지하철 1호선의 희망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지하철 1호선이 기대는 것은 삶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에서 비롯된 낙관이며 또한 밑바닥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끼리만의 연대와 소통이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인정과 믿음이라는 희망은 인간에 대한 낙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현대인들의 절대 다수를 이루는 지하철 승객들 사이의 냉담함과 대비되면서 다소 상투적인 결론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또한 극소수 계층사이의 희망이라는 점에서 좀 더 보편적이고 광범위한 희망으로 받아 안기에는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가장 민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곰보할매의 낙관과 선녀의 순정한 마음, 그리고 가짜운동권 안경이 '노래'로 표현하는 현실 비판이 슬럼가 같은 588이나 서울역을 벗어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더 많은 보통 사람들 속에서 확산될 때 우리는 21세기 우리 사회의 전망을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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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민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곰보할매의 낙관. ⓒ 지하철1호선


김민기가 이제 4000회를 끝으로 이 작품을 잠시 쉬면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겠다고 했을 때 그가 보충해야 할 것은 다만 새로운 직업과 캐릭터,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정신 그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빈부격차가 극심해지고 환경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으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열망은 여전히 살아있는 시대,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니는 서민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

지하철 1호선 안에서 확인되는 냉정한 현실과 슬럼가에서 벌어지는 밑바닥 인생들의 사랑과 좌절이 1990년대적 현실인식에 기반한 것이라면 이제 2000년대를 마무리하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은 이미 다르지 않은가. 

비록 지하철 1호선의 4000회 팀 공연은 여러 배우들이 급조된 팀답게 예전에 보았던 정규 공연팀에 비해 합창의 힘과 호흡이 잘 맞지 않아 매우 아쉬웠지만 그간 지하철 1호선을 통해 들려졌던 노래와 대사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곰보할매를 맡은 김효숙과 안경을 맡은 김학준의 연기는 여전히 훌륭했다.

현실의 비정함과 따뜻함에 기대어 풍자와 휴머니즘이라는 양쪽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달려온 소극장 뮤지컬의 전범 지하철 1호선이 곧 정차하게 될 지금, 4000회라는 대기록을 넘어 어떤 전망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지난 4000회 공연 내내 한결같았던 빼어난 음악과 맛깔난 대사의 힘이 여전할 수 있을까? 이제는 독일의 원작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작품으로 태어나야 할 상황에서 스스로 노래와 목발을 버리고, 선녀의 손을 잡고 달려간 안경이 어떤 노래로 돌아올지 못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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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정민갑 기자는 대중음악의견가입니다. 지하철1호선 상영은 11.20-12.31. 극단 학전(http://www.line1.co.kr) 참조.


덧붙이는 글 서정민갑 기자는 대중음악의견가입니다. 지하철1호선 상영은 11.20-12.31. 극단 학전(http://www.line1.co.kr)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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