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를 읽는 세밑, 겨울 밤

[마음으로 읽는 책 2]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록 2008.12.30 20:09수정 2008.12.31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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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은 윤동주 시인이 태어난 날이다. 1917년 12월 30일 태어난 그는 겨울의 시인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추운 지방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지 그의 시에는 유난히 겨울이 많이 등장한다. 아니면 그가 태어난 시절이 춥고 어두운 시절이라서 그랬을 것인가. 

사위가 적막한 겨울밤, 그의 시집을 들추어보았다.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만 되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호주머니' 전문)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는 시이다. ‘갑북갑북’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서글픈 시다. 가난하고 빈곤한 형편때문에 양 주머니가 텅텅 비었으니 얼마나 서글프고 허허로울 것인가. 그러나 겨울철이면 주머니 두 개로 갑북갑북 북적거린다는 그의 유머앞에서는 일상의 남루함은 오히려 환하게 빛난다.

그 옆에 나란히 있는 한 시. 제목은 '눈'이다.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눈'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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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시집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시집은 절판된 상태. ⓒ 문학사상사

한편의 동시같은 이 시를 읽고있으면 눈앞이 환해지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는 정말 이렇게 눈처럼 포근하고 순결한 마음을 가졌을 것만 같다.


눈에 사라져가는 도시에 사는 우리들의 마음이 갈수록 메말라지는 까닭도 이 때문일까. 일상에 찌들어버린 회색빛 고단함이 단 여덟줄의 시로 그만 확 풀린다.  꽁꽁 얼었던 마음이 스르르 녹을 것만 같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에 눈이 아니 온다기에." - '편지' 전문

겨울이라는 단어가 직접 등장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만으로 겨울냄새가 물씬나는 시도 있다.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몽기몽기 웨인 연기 대낮에 솟나, 감자를 굽는 게지 총각애들이 깜박깜박 검은 눈이 모여앉아서 입술에 꺼멓게 숯을 바르고 옛 이야기 한 커리에 감자 하나씩. 산골짜기 오막살이 낮은 굴뚝엔 살랑살랑 솟아나네 감자 굽는 내"- '굴뚝' 전문

추운 지역이었으니 감자가 주식량이었을 것이다. 먹을거리가 넉넉지않던 시절, 주린배를 채우려고 모여앉았는데 먹을거라고는 감자밖에 없으니 감자를 구웠을 것이다. 그런데 맨숭맨숭 감자만 구우면 얼마나 쓸쓸하겠나. 서로의 얼굴에 숯을 바르고 옛이야기도 한보따리 풀어가며 감자를 구웠겠지. 그 살뜰하고 정겨운 풍경이 ‘감자굽는 내(냄새)’ 만큼이나 구수하게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꽁꽁 얼었던 마음까지 녹게 만드는 그의 '겨울 시'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그는 내게 '저항시인'이었다. 학창시절 내또래가 대부분 그렇게 배웠듯이 나 역시 그랬다. 주로 접한 그의 시들은 '서시' '참회록' '쉽게 씌여진 시' '간' '또 다른 고향' 등이었다. 가령, ‘참회록’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시집이 아닌 시험지에서 너무나 많이 봐서 그런지 그 문제까지 함께 연상되는 구절이다.

‘어느 운석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에서 ‘슬픈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나? 바로 나라를 빼앗긴 민족을 의미한다. ‘어느 왕조의 유물’은 국권을 빼앗긴 우리나라를 의미한다고 ‘밑줄쫘악’ 그으며 달달 외우고 시험지에도 그렇게 썼다.

게다가 그가 생체실험에 희생되었으며 후쿠오카의 한 감옥에서 옥사했다는 그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 드라마틱하게 겹쳐지면서 그의 시는 참으로 처절하게 느껴졌다. 피로 덕지덕지 점철되고 고뇌로 새까맣게 타버린 그의 청춘이 참으로 장렬하게 느껴졌다. 학사모를 반듯하게 쓴 담백하고 순결한 그의 초상은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었다.

윤동주에게는 이렇다할만 ‘로맨스’도 없었다. 그에겐 오로지 저항시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을뿐. 하지만 그라고 해서 어찌 사랑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그의 어느 시에서 그러한 그리움과 연심을 읽을 수도 있다.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있거라"- '사랑스런 추억' 일부

그는 ‘저항시인’이 아니었다. 저항시인이라는 꼬리표를 이제 떼어버리련다. 그는 정녕 삶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했던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것이다. 별을 동경하고 동네 꼬마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그리워했던 시인. 그 선한 눈매와 수줍은 미소, 무엇보다 그의 시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내가 단연 좋아하는 그의 시는 '별 헤는 밤'이다. 고등학교때 이 시를 마주할 때면 매번 목울대가 시큰해졌다. 설령 그곳이 회색빛 갱지 시험지였다해도.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별 헤는 밤' 일부

별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있기에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단순히 사춘기 소녀시절의 감수성만으로 치부하기에 이 시는 참으로 많은 울림을 준다. 차갑고 투명하고 깨끗한 시인의 영혼은 아직까지 내 마음에 북극성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많은 그리움을 삭제해버리고 사는 요즘, '별헤는 밤'은 또다른 울림과 아련한 정서를 안겨준다.

이제는 미역국을 먹을 이도 없건만...

이날 아침 나는 미역국을 끓였다. 나의 둘째딸 생일과 그의 생일이 겹쳤다. 이제는 미역국을 끓여줄 이도, 그것을 먹을 이도 없으련만 그래도 훌훌 뜨거운 미역국을 끓이면서 이 겨울에 왔다간 그를 한번쯤 생각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날은 마침 눈까지 펑펑 내렸다.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세밑 오늘밤도, 그의 시를 읽으련다. 그러나 뜨듯한 아랫묵에서 그의 시를 대한다는 것이 왜 이렇게 호사처럼 느껴질까. ‘쉽게 씌여진 시’가 아니라 너무 쉽게 읽히는 시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애초 쉽게 씌여진 시였다면 이 겨울밤 그를 생각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초판본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 윤동주 유고시집, 1955년 10주기 기념 증보판

윤동주 지음,
소와다리, 2016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별 해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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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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