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아닌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고팠던 윤상원님

[책읽기가 즐겁다 237] 윤상원 일기, <어떻게 살 것인가>

등록 2009.01.14 15:37수정 2009.01.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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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윤상원 일기, 어떻게 살 것인가
- 글 : 윤상원
- 펴낸곳 : 살레시오 중ㆍ고등학교총동문회, 윤상원열사추모사업추진위원회 (2007.6.3.)
- 책을 사려면 : 살레시오 총동문회로 연락하면 됨 062-527-3186

 (1) 사람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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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윤상원 일기는 시중 책방에서는 살 수 없고, 총동문회로 연락해야 받아볼 수 있습니다. ⓒ 살레시오 총동문회

우리한테 ‘윤상원’이라는 이름은 ‘1980년 5월 광주 시민군 지도자’ 또는 ‘열사 윤상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윤상원이 누구야?’ 하면서 1980년 5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도무지 모르는 분도 제법 많습니다.

벌써 서른 해 가까이 지나간 일이니, 1980년에 스물이었던 분은 쉰이 되었고, 1980년에 서른이었던 분은 예순이 되었습니다. 그무렵 열 살이었던 어린이도 마흔 살 나이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세월 참 빠르다고 느낄 법도 한데, 우리 삶과 삶터가 한결 나은 쪽으로 새로워진다는 느낌이 옅기 때문에 세월이 빠르다고 느껴지지 않으랴 싶습니다. 1980년 앞서나 1980년 뒤로나, 우리 삶과 삶터는 끝없이 싸우고 허물고 부딪히고 깨지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으니, 서른 해가 서른 해 같지 않게끔 느껴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 난데없이 용의검사를 하였다. 나는 다행히도 걸리지는 않았지만 모자에 검은 선이 없으면 내일 아침에 모자를 빼앗는다는 것이다. 걱정이 됐다. I have no money with me. 어떻게 할까? 돈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리 달고 싶지만 돈이 없으면 못 다는 것이니 돈이 사람을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모자를 빼앗는다는 것은 안 될 말이라고 생각한다 ..  (1964.3.11.)

1967년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푸름이 윤상원은, 이무렵 자기 또래 동무들처럼 “막걸리를 마시고 악을 쓰며 소리를 냈다. 이게 노는 거다. 그 중 담배는 여섯 개 빨았다(79쪽)”는 말처럼, 앞이 캄캄한 나날을 생각하면서 “틀림없이 난 지금 현실사회의 비뚤어진 일단을 배워 실천에 옮긴 것이다(82쪽)”는 자기 뉘우침 그대로 뒷골목에서 돈뺏기도 하면서 “난 마지막 고교시절 차라리 원이 없도록 놀기로 맹세했다(87쪽)”는 말과 같이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뒹굴며 노는 가운데에도 “돈과 사랑과 술 …… 충분히 인생을 향락할 수 있을 게 아니냐. 그것보다 선각자들은 고통의 길을 택했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세계가 이룩될 수 있겠는가(80쪽)” 하는 말처럼 끝없이 자기 삶을 돌아보았고, “나의 바른 길로 가자. 곧바르게 달리자. 잠시라도 옆길을 걸으면 영영 구렁에 빠지리라(77쪽)” 하면서 뼈아픈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지만 또다시 “이렇게 마음을 결정한 나는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 위해 수많은 고난이 필요했다. 첫째 경비, 일금 4000원을 만들 방법이 도무지 없을 것 같다. 드디어 어떤 수단으로서든지 집에서 긁어내기로 결정했다(88쪽)”고 하면서 엇나가기도 하고, 또 이렇게 엇나가다가도 “너무나 괴로운 기쁨이었다. 학교 응접실에서 아버지를 뵈었을 때 나의 마음은 온통 뜨거운 감정만이 복받쳐 올랐다. 난 부모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제 보낸 편지를 오늘 받아 보시고 곧 빚을 내어 학교로 오신 것이다. 아버지 손에서 받은 지폐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사랑이었다(83쪽)”고 말하면서, 학교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새 다짐을 합니다.

.. 납부금 미납으로 남게 되었다. 청소가 다 끝난 뒤에 선생님께서 오셔서 납부금 미납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나는 억울하기도 했다. 돈 때문에 사람이 살고 못살고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다. 생각해 볼 때 돈이 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다. 돈이 무엇인가? ..  (1964.10.21.)

고등학교를 마친 젊은 윤상원은 대학입시에서 두 번 쓴물을 마시고 1971년에 전남대학교에 붙었고, 이듬해에 하사관으로 군대에 들어가 세 해를 보냅니다. 1978년에 대학교를 마치고 주택은행 직원으로 뽑혀 일하게 되었으나 같은 해 6월 29일에 전남대에서 큰 시위가 일어나자 일터에 사표를 내고 서울을 떠나 광주로 와서는 인문사회과학책방 '녹두서점'에서 일을 거듭니다.

그러고 몇 달 뒤 광천공단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가 되고, 이러는 가운데 야학 교사로도 일합니다. 이해 끝무렵 광주 양동신협으로 옮겨 일을 하다가, 1980년 3월, 독재자가 죽고 잠깐 동안 민주화라는 봄이 열리자 다시금 '녹두서점'에 나가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일하며 ‘민주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하던 때에 또다른 독재자 전두환이 ‘5ㆍ17 계엄’을 내립니다.

이에 뭇사람들은 애써 싹트려는 민주주의 꽃이 시들거나 꺾이지 않기를 바라며 길거리로 뛰쳐나왔으며, 윤상원 님도 이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공수부대가 총칼로 무기를 갖추어 시위대를, 시민군을 짓밟습니다.

..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집에 왔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리운 집에서 오래 있지 않고 광주에만 오는지, 집에서는 공부한다고 말하고 광주에 오지만 그것보다도 우리 집의 모든 사정이 나에게 기쁜 마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공부를 하는지? 왜 공부를 잘해야 하는지? 몇 번이나 생각해 봐도 나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판단을 못 얻었다. 나는 그것보다도 인간생활을 하는 데에 필요한 사회지식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공부를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사회에 봉사할 수 있고, 보람 있는 생애를 마치는 것이 더 훌륭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학교생활을 할 것인가? 나는 나의 길을 어떻게 밟을 것인가? 모든 것이 나의 머리속에 주어진 과제들이다. 오늘도 책상머리에 앉아 생각하느라고 어느덧 시간을 많이 보냈구나 ..  (1965.5.16.)

사회를 둘로 갈라 ‘다스리는 이’와 ‘짓눌리는 이’가 있던 기나긴 봉건사회가 사라질 무렵, 바깥에서 들어온 힘(일제강점기)은 다른 모습으로 사람들 삶과 삶터를 짓눌렀습니다. 이 힘이 겨우 걷힌다 싶었을 때, 또다시 바깥에서 들어온 힘(미국, 소련)이 우리 삶과 삶터를 억누르면서 남과 북으로 쪼개어지며 저마다 다른 독재자가 들어섰습니다(이승만). 이 독재자를 겨우 물리쳐 나라안에서 쫓아내었다며 기뻐하던 때, 우리는 다시금 다른 독재자한테 눌려야 했고(박정희), 이 독재자 서슬퍼런 스무 해를 숨죽이다가 겨우 기지개를 켜려 할 즈음, 새로운 독재자는 총칼로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다루었습니다(전두환).

그런데 이런저런 군부 독재자한테 죄값을 묻고 권좌에서 끌어내린 뒤에도,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선거라는 틀이 민주주의와 걸맞지 않아서인지, 우리 스스로 슬기로운 생각을 일구지 못해서인지, 오래도록 독재와 제도권교육에 길들고 억눌리던 터라 홀가분하며 싱그러운 마음을 펼쳐내지 못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국민소득이라는 숫자가 2만 달러’라고 하면서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은 그치지 않는 우리 사회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자면 얼마나 벌고 얼마나 누려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뽀족한 풀이말이 달리지 않는 우리 세상입니다.

.. 내일이 구정인데 집에는 가야겠고 무엇으로 부모님을 위로해 드릴까 생각해도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도 저녁 9시 30분에 끝나고 해서 그냥 가기로 생각했다. 몇 푼 물건을 사들고 가는 것도 허식적인 일이 될 것 같고 그냥 어머님께 돈을 조금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밤 11시 15분 기차를 타고 집에 가니 자정 12시, 기분이 쓸쓸하였다. 다른 부모들은 객지에 나간 아들들이 설을 맞으러 집에 오는 것을 보고 얼마나 반가워했을까? 조그만 선물이라도 들고 왔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나이 30이 되는 설을 찾아가는 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마저 이 시대의 아픔으로 돌려버리기엔 내 자신 너무 가정에 소홀한 것이 아닌가? 내 개인적인 일마저 사회의 책임으로 사회를 위한 일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면 나는 위선자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에서 어렵지만 어머님께 2만 원을 드렸더니 그렇게 대견해 하신다. 다음 내 생활이 좀 어렵더라도 이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  (1979.1.27.)

1950년에 태어나 꼭 서른이 될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윤상원 님입니다. 어느 날엔가 당신 아버지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때, 아버지 윤석동 님은 “돈을 많이 벌어서 (억압받고 착취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되지 않겠냐?” 하고 물었고, 아들 윤상원은 “제가 돈을 벌어 도대체 몇 사람이나 도울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하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돈을 벌어도, 애써 번 돈을 알뜰히 쓸 줄 모르는 한편 이웃을 도울 줄 모르는 우리 나라 사람임을 헤아려 본다면, 돈을 벌어 이웃을 돕겠다고 나서기보다, 자기부터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서 낮은자리에서 어깨동무를 하는 쪽이 한결 걸맞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릴 적부터 이웃사랑이 무엇이고 사람사랑이 무엇이며 자연사랑이 어떠한 일인가를 지식이 아닌 삶으로 부대끼면서 곰삭여 왔다면, 돈 많이 버는 일을 하게 되어도, 얼마든지 넉넉하게 이웃사랑을 펼칠 수 있다고 느낍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가 익숙해지고 길들게 되는 세상과 학교와 마을과 집안이, 온통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니까, ‘내 밥그릇만 채우면 되’니까, 비록 숫자놀음이기는 하여도, 국민소득이 몇 만 달러가 되고, 우리들 살고 있는 아파트값이 얼마이며, 우리들 연봉이 몇 천만 원이나 몇 억 원이 되어도, 참된 이웃사랑이란 못 찾아볼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2) 세상 삶이란

..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전남에서도 한창 분주한 모양이다. 전에는 집이었는데 이제 보면 큰 도로가 멀쩡하게 나 있고, 거대한 공설운동장이 거의 완공에 이르렀고, 예절의 달이니 고운 말 쓰기니 하는 표어들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들과 같이 우리 시야에 부딪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우리 한국 국민들의 심보가 잘 드러나고 있다고 본다 ..  (1965.9.21.)

엊그제 동사무소에 볼일 보러 갔더니, 인천시 정부에서 펴내는 온갖 안내책자와 홍부물이 놓인 자리 1/4쯤을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와 얽힌 자료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홍보물 가운데 절반, 또는 2/3는 ‘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은 반드시 새로 지어야 합니다’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중앙정부에서는 문학경기장 관객석을 늘려서 주경기장으로 삼으라 한다지만, 지역정부에서는 이렇게 관객석을 늘리는 데에 1700억 원을 쓰느니, 4400억 원만 들이면 새 경기장을 지을 수 있는데, 훨씬 낫지 않느냐고 외칩니다. 그리고, 인천은 종합경기장이 하나밖에 없어 다른 광역시와 시도와 견주면 너무 모자라다는 말을 붙입니다.

홍보물을 숫자 단위까지 꼼꼼히 읽다가 혼자 쓰겁게 웃습니다. 인천시 정부는 지난해 봄, 1930년대에 지은 ‘인천 공설운동장’을 허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가을, 비슷한 해에 함께 지은 ‘인천 숭의동야구장(도원야구장)’도 허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자리에 ‘새 축구 전용구장’을 짓겠다고 했습니다. 처음 지은 해부터 치면 일흔 해를 넘긴 오래된 공설운동장이지만, 이 경기장을 쓰는 데에 아무런 말썽이나 어려움이 없었음에도, 지역정부는 종합경기장 하나를 없앴습니다. 스스로 없앴으니 다른 시도와 견주면 ‘종합경기장 숫자가 줄어들’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2014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었다고 하면서, ‘문학동에 월드컵 축구경기장’이 따로 있었는데에도 ‘잘 있던 종합경기장’을 허물고 ‘축구 전용구장’을 새로 수천 억원을 들여 짓겠다고 하면서, 이참에 ‘종합경기장 하나도 수천 억원을 들여 새로 짓겠다’고 하면, 아무리 중앙정부가 인천 지역정부를 곱게 보아준다고 한들, ‘투자를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보다도, 경기장 하나를 꽤 큰돈을 들여 허물고,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새로 지어야 할 만큼 나라살림과 지역살림이 넉넉한지 궁금합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다는 말을 그치지 않는데, 경기장 짓는 일이 우리 살림살이를 얼마나 넉넉하게 해 주는지 궁금합니다. 우리가 돈을 써야 할 곳은 축구장 짓기인지, 또는 경인운하 파기인지, 또는 새 아파트 짓는 재개발사업인지 궁금합니다.

.. 학교에서 보리베기 동원이 있다고 미리 낫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자취생한테 낫이 있을 리가 없다 … 잘 베지도 못하지만 낫을 빌려서 보리를 베었다. 보리가 쓰러져 있는 곳은 좀처럼 베기가 힘들었다. 우리 시골에서는 매년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더운 날씨에 꾸준히 베야 할 것이다. 이렇게 몇 시간 하기도 싫증이 나는데 하물며 며칠 또 매년을 계속한다면 더 말할 나위도 없을 것 같다. 그 피땀의 대가가 헐한 몇 푼의 돈으로 바뀌어지고 그 돈이 나에게 또 다른 많은 학생들에게 쓰여져야 하고 생활해야 한다. 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현실인가? 다시 한 번 우리 시골에서 나오는 돈이 돈 많은 나리님들의 꽁무니에서 나오는 돈보다 몇 천 배가 고귀한 것인지 인식하게 되었다 ..  (1966.6.15.)

우리 동네에도 인천 여느 골목마을과 마찬가지로 재개발 계획이 있고, 이 재개발 계획은 아파트를 지어 ‘주거환경 개선’을 이루겠다는 데로 모아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개발 계획으로 새로 지어진 아파트에는 예전 골목마을 사람이 들어가 살기 어렵습니다. 비싼 아파트값에다가 관리비를 댈 수 없거든요.

이제까지 참으로 많은 곳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오래도록 그 마을에 뿌리내려 온 사람들이 삶터를 빼앗기며 다른 데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옮겨 간 곳에서도 또 재개발 바람이 불면 또 옮겨야 하고, 다시 옮긴 곳에서 다시 재개발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새로운 곳을 찾아서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마따나,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듯, 당신 삶터를 내주라 하니 그예 내준 뒤 조용히 떠나고 또 떠나 온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라님이 ‘나라를 더 잘살게 한다’는 말을 내세우니, 고속도로를 내고 철길을 내야 하니 논밭을 내놓으시오 하면 논밭을 내놓았고, 집을 내놓으시오 하면 집을 내놓았습니다. 새마을운동을 한답시고 지붕을 갈라 하니 지붕을 갈고, 흙집을 허물라니 흙집을 허물고 시멘트블록집을 지었습니다. 이제 시멘트블록집이 보기 싫어 아파트로 바꾸어야겠다고 하니 아파트로 바꾸도록 떠나 주고, 먼 뒷날 이 아파트도 낡았다고 한다면 또 다른 데로 떠나 주면서 살아갈 테지요.

.. 학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데모를 한다느니 하고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우왕좌왕하다 다시 교실로 들어가고 하여 매우 소란스러웠다. 여기서 난 무엇을 생각했는가? 진정으로 국가를 위해 젊은 정열을 바친다는 것, 그것은 역사에 남을 거룩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다. 결과가 어떻게 되느냐, 이것을 지성인으로서 냉철히 생각할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결과를 위해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압력이 또한 치열한 저지를 받더라도 끝까지 신념을 굽히지 안 해야만 젊음을 말할 수 있고 우리의 행동이 역사에 빛나는 것이다 ..  (1967.6.15.)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도 전기세 고지서에 텔레비전 수신료가 처음부터 들어가 있어서, 따로 한전에 전화를 걸어야 수신료를 내지 않을 수 있는 사회 틀거리입니다. 세금 걷는 분들로서는 이렇게 해야 수월하고 돈이 적게 든다지만, 그만큼 애꿎은 돈을 내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전거길을 낸다고 큰돈을 들이며 일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거의 모두 사람들 거니는 길을 둘로 쪼개어 길바닥 돌만 새로 갈아 놓을 뿐입니다.

정작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두 다리로 걷는 사람들을 헤아리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잘못된 낱말과 알맞지 못한 낱말이 그득합니다. 교과서 엮는 이들 스스로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익히거나 배우지 못한 탓일 테지만, 국어교사만 우리 말을 잘해야 하지 않고, 사회교사며 미술교사며 영어교사며 수학교사며, 모두들 우리 말과 글을 잘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교사 되는 공부를 하는 이들 가운데 말과 글을 알뜰살뜰 익히고자 스스로 마음을 쏟는 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도 다르지 않습니다.

2006년부터 새로 쓰는 손전화기가 약이 금방 닳아서 새 손전화기를 사야 할 판입니다. 2006년에 새 기계로 바꾸었을 때에도 새로 쓴 지 세 해쯤 될 무렵부터 전화기약이 한나절을 겨우 버티어서 견디다 못해 바꾸고 말았는데, 아무리 번들거리고 온갖 기능이 많다고 하는 손전화기라 해도 거의 두세 해에 한 번 꼴로 바꾸도록 만들어졌다면 어찌하지요. 새 전화기약 사는 돈하고 새 기계 바꾸는 값하고 비슷하다면, 쓰고 버리고 또 쓰고 버리는 버릇이 자꾸자꾸 들면서, 우리 삶터에는 쓰레기만 넘쳐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 저녁 약속이 있는 데도 일은 끝나지 않는다. 매일 저녁 9시가 넘어야 퇴근하니 어떻게 하란 말인가? 거의 열두 시간을 일하는 셈이니 과도한 노동은 이곳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너무나 민감하다. 장사 자체가 그런 거니까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긴 하나 자기 이익을 생각하기 전에 남의 이익도 좀 생각해야 되지 않겠는가? 남이야 죽든 말든 내 이해타산만 맞추면 된다는 식의 생각으로 머리속이 채워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저녁 9시 10분에야 퇴근해서 집에 가니 몇 아가씨들이 재인과 얘기하고 있었다. 어디에나 문제가 많은 세상이지만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결국 노동자 자신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무엇부터 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일부터 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  (1979.1.11.)

아기한테 입힐 옷을 둘레에서 많이 보내 주어 다 입히지 못할 만큼 쌓입니다. 새 옷과 다름없는 온갖 아기 옷을 차곡차곡 개어 쌓아 놓으면서, 우리 아이가 크면 우리 둘레 이웃집한테 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둘째가 태어날 때까지 잘 간수했다가 입힐 수 있고, 둘째를 보더라도 아이가 크면 이웃집에 주었다가 둘째가 태어날 때 또 돌려입기를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기저귀천은 우리 아기한테까지만 쓸 수 있고, 더는 물려입히기 어렵습니다. 여러 해 여러 아기를 거쳤던 기저귀천이라 이번에 우리까지 쓰고 은퇴를 시켜, 행주나 수건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몇 장은 잘 빨고 삶아 놓은 다음, 아기가 커서 혼인할 즈음 ‘네가 아기였을 때 쓰던 기저귀천이야. 이 기저귀천 하나는 네 외삼촌이 쓰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네 이웃집 양조장 할머니가 손자 키울 때 쓰던 것이야.’ 하고 건네줄 생각입니다.

(3) 내 삶이란

어제 낮, 인천집에서 일산집으로 옮겨 왔습니다. 우리 세 식구 사는 인천집은 몹시 추워(옥탑집이기는 하다지만, 영 도 밑으로 여러 계단 내려가 있기에), 어른 두 사람이야 그럭저럭 괜찮지만 아기한테 안 좋을 듯해서, 저는 인천과 일산을 오가기로 하고, 옆지기는 일산에서 식구들하고 지내기로 합니다.

일산집은 아파트이고 불을 따로 때지 않으나, 집온도가 22도입니다. 모든 아파트가 따뜻하지는 않을 테지만, 옆지기 식구 사는 일산에 올 때면 늘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인천집에서 위아래 긴옷 두툼하게 껴입고 겉옷까지 따로 입어도 방에서 입김이 나오고 손이 시린데, 일산집에서는 반소매 반바지 차림이면서도 춥지 않습니다. 일산집 다른 식구들은 긴소매 긴바지입니다. 아기도 일산집에서는 위아래로 홑옷 한 벌씩만 입습니다.

언제나 추운 데에서 지내니 조금만 따뜻한 곳에 와도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불기운이 더없이 고맙습니다. 인천집에서는 물을 뎁혀 빨래를 하고, 일산집에서는 찬물로 빨래를 합니다. 추운 집에 있으니 걸레를 빨아 방바닥 훔치는 일에도 망설이지만, 따뜻한 집에 있으면 이 일 저 일 거침없이 해낼 수 있을 듯한 느낌입니다.

어쩜 이리 다를 수 있을까 싶으면서, 골목마을 우리 집도 이만큼까지는 아니지만, 한겨울에 십 도쯤으로만 지켜질 수 있어도 아쉽지 않겠다고 생각합니다. 낮은 보증금과 적은 달삯으로도 추위를 덜 탈 수 있는 집살림을 꾸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남들 보기에 번듯한 집매무새보다, 나라밖 사람한테 관광자원이 되는 마을 모습보다, 더 많은 돈을 벌거나 더 많은 경제가치가 있는 지역살림보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면서 따순 마음을 오순도순 나눌 수 있는 마을 삶터를 가꿀 수 있으면 그지없이 좋을 텐데 하고 꿈을 꿉니다.

.. 아침 일찍 일어났다. 밥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이라 그런지 밥솥을 들고 샘에서 쌀을 씻는 것이 좀 부끄러웠다. 솥을 탄불 위에 얹어 놓고 책을 보고 있노라면 우선 밥솥에 정신이 간다. 밥이 끓어 밥 냄새가 코를 찌른다. 구수하다고 할까? 싫지 않은 냄새다. 이러한 냄새는 밥을 직접 지어 보지 못한 사람이면 맛보지 못할 밥의 냄새인 것이다 ..  (1965.8.23.)

누런쌀, 보리, 수수, 약콩, 검은팥, 빨간팥, 옥수수, 메주콩, 서리콩, 이렇게 아홉 가지 곡식을 섞어 밥을 지어 먹습니다. 한꺼번에 모든 곡식을 다 장만하지는 못하고, 조금씩 한 가지씩 장만해서 섞어 먹는 곡식 가짓수를 늘립니다. 이처럼 밥을 하니 쌀은 아주 조그만 넣어도 되고, 쌀만 먹을 때하고 견주어 아주 조금만으로도 오래도록 먹을 수 있습니다. 몸에도 훨씬 좋다고 느낍니다. 다만, 밥한다며 곡식을 자루에서 조금씩 더는 수고가 듭니다. 앞으로 몇 가지 곡식을 생협 매장에서 더 장만하면 열 가지 넘는 곡식으로 밥을 지어 먹게 될 테고, 우리 아기도 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먹는 밥을 으깬 밥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며칠 앞서부터 이런 밥물을 작은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먹이는데 곧잘 받아먹습니다.

.. 햇빛이 다정스럽게 마루 앞을 비추었다. 어린 동생들이 서로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으며 따뜻한 햇볕을 즐기고 있었다. 너무나 천진스런 낯빛으로 이야기를 하는 폼이 귀엽게 보여 한참이나 시선을 두어 봤다. 과연 인간은 예쁜 것이다. 이런 천진스런 모습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지구 위에 영원한 평화가 올 것이다. 왜 모든 인간은 이 천진스러움을 잃고 있는가? 너무나 혼란한 사회를 견주어 볼 때 나는 큰 격분을 느꼈다. 모든 인간은 천진스러울 수 있다. 좀더 잘살려고 몸부림치는 기성인들, 오늘부터라도 어린이의 참 제자가 되어라 ..  (1967.2.19.)

일산집으로 오면서 아기 옷과 기저귀로만 여행가방 하나가 꽉 찼습니다. 제 옷은 긴바지 한 벌뿐이었고, 옆지기도 자기 옷은 아주 조금만 챙깁니다. 이 가방 저 가방 메고 안고 들고 아기까지 안으면서 다니는 우리 두 사람과 같은 젊은 부부를 전철길에서 보는 일이란 거의 없습니다. 아마, 우리와 나이가 비슷한 젊은 부부라면 자가용을 몰고 나들이를 다니지 않으랴 싶습니다.

동인천역에서 전철을 타고 용산역까지 가는 길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 한 분을 보았는데, 이 집 아니는 전철에서 쉼없이 이리 달리고 저리 달립디다. 애 어머님은 잠깐도 애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면서 붙어 다닙니다. 자칫, 아이가 전철문 사이에 빠질 수 있고, 객차와 객차 사이 구멍에 발을 헛디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로3가에서 전철을 갈아타려고 움직이는데, 어린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는 어머님 한 분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제법 크기는 했지만 방방 뛰는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시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아주 드물게, 아기를 안거나 아이 손을 잡고 함께 움직이는 아버님을 보곤 합니다. 그렇지만 아주 드뭅니다.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이 키우는 몫은 한결같이 어머니한테만 맡겨져 있습니다. 아이 키우는 고달픔도, 또 고달픔과 함께 따라오는 아이 키우는 즐거움도, 모조리 어머니한테만 느끼는 일이요 아버지한테는 느껴지기 어렵습니다.

.. 학생들의 문집 2호가 나왔다. 낙평이와 다른 강학들이 고생을 하더니 이제 어엿한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잡지, 신문도 많고 책들도 많지만 우리 학생들처럼 못 배우고 억눌리고 소외받는 자들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이나 있는가? 또 이들이 쓴 글을 조건 없이 실어 주는 잡지는 얼마나 있는가?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들은 언제나 있는 자들의 것이었다. 잘 배우고 여유 있는 자들이 즐기는 것은 도처에 넘치고 있지 않는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당에 나와 공부하면서 기름 묻은 손으로 틈틈이 써 놓은, 차라리 이 세상의 아픔을 그려 놓은 글들을 모아 밤새워 줄판을 긁어 만들어 놓은 문집임에야. 우리에겐 소중한 기쁨이었다. 학생들이 자기가 쓴 글이 실린 문집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일을 위해서 몇 날의 밤을 샌 낙평이, 강학들, 동철이는 더욱 기뻤으리라. 이 글을 읽는 다른 모든 사람도 초라하기 짝이 없는 문집이지만, 내팽개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바랄 뿐이다. 저 낮은 곳에서 서투른 몸짓으로 진실을 배워 가는 우리 학생들에게 진심으로 격려를 보내고 싶다 ..  (1979.2.18.)

옆지기한테 <윤상원 일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읽어 보라고 건네어 줍니다. 옆지기는 이제 열네 살 중학교 1학년 학생이 되는 동생을 불러 <윤상원 일기>를 소리내어 읽어 줍니다.

<윤상원 일기>는 윤상원 님이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64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인 1969년까지 부지런히 쓰여지다가 오래도록 뚝 끊긴 뒤 1979년에 이르러 다시 쓰인 뒤 끝납니다.

일기에는 날짜가 적혀 있고, 날짜를 헤아리면 윤상원 님 어느 나이 때 일임을 헤아릴 수 있는데, 열네 살에 쓴 일기와 스물아홉 살에 쓴 일기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날그날 겪거나 부대낀 일이 다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눈썰미며 눈길이며 눈높이이며 올곧습니다. 꼿꼿하게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자기 매무새를 추스르며 자기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때때로 샛길로 빠져 구렁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허우적거림이 윤상원 님 스스로 더 다부지게 자기 참된 길을 찾도록 이끄는 밑거름이 되었구나 싶습니다.

기쁨도 힘이 되고 슬픔도 힘이 된다고 할까요. 기쁨은 기쁨대로 좋은 밥으로 받아들이고, 슬픔은 슬픔대로 좋은 물과 바람으로 받아마신다고 할까요.

퍽 많은 이들 가슴에 아로새겨진 ‘윤상원 열사’인 한편, 꽤 많은 이들 머리에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은 ‘윤상원이 누구야?’인데, 이 <윤상원 일기>는, ‘열사’라는 꼬리표를 살짝 떼어놓고, ‘한 사람 윤상원’을 느끼라고 살며시 이야기를 걸어오는구나 싶습니다. 고단하고 어려운 이를 돕는 손길은 ‘돈 많이 벌고 나서 베푸는 나눔’이 아니라, ‘똑같이 고단하고 어려운 가운데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삶’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구나 싶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돈도 이름도 힘도 아닌 ‘사랑’으로 자기 몸과 마음을 북돋우며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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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책읽기 #일기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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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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