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볼 때도 '선택과 집중'... 난 한 놈만 패!

[옥탑방 여자와 반지하 남자의 자취방 이야기 18] 그 남자의 장보기

등록 2009.01.31 20:56수정 2009.01.31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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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였다. 온갖 기름진 음식이 날 반겼다. 죄다 튀기고 볶은 음식이라 반짝반짝 빛났다. 미끈한 몸매로 "얼른 날 잡솨바~"하며 유혹했다.


요 며칠 살 뺀다고 운동했다. 내가 생각해도 열심히 했다.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에잇!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뭐…. 젓가락이 아주 '테크토닉'을 췄다.

난 아직 주시는 거 받아만 먹는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가지만, 설이라고 딱히 스트레스 받는 일도 없다. 부모님과 친척들의 보살핌 안에서 잘 먹고 잘 놀았다. 간혹 '언제 결혼?'이란 공격이 가해지기도 했지만, '요즘은 (결혼) 늦게 하는 게 트렌드'라며 적당히 너스레를 떨었다.

장 보는 어머니, '터미네이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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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가격이란 말로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대형 마트. 과연 '최저가격'일까? ⓒ 김귀현


올 설엔 회사 근무도 있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이전까지 '장보기'만은 항상 도왔다. 내 스킬이라 해봐야 '무거운 물건 들기'뿐이고, 내가 먹고 싶은 '백두장사 소시지'나 '바나나우유 4개 패키지' 등을 어머니 몰래 카트 안에 끼워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어머니의 손놀림은 대단했다. 딱히 수첩에 뭘 적은 것도 아닌데, 척척 카트에 살 물건을 담으신다. 신들린 듯했다. 물건을 고르는 눈도 매섭다. 싸고 괜찮은 물건은 한 눈에 알아보신다. 10초 정도 훑어보고 구매 여부를 결정하신다.


그 모습, 어디서 많이 봤다. '터미네이터'다! 터미네이터는 적을 만나면 전투력, 위험도 등의 수치가 눈앞에 펼쳐진다. 어머니도 그와 다를 게 없다. 물건을 보자마자 신선도, 가격의 합리성, 냉장고 남은 음식과의 충돌 가능성 등이 전부 수치화돼서 어머니 눈앞에 스크린된다. 그리고 10초 안에 살지 안 살지를 결정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장보기를 쉽게 끝낼 수 없다.

사실 내가 '반지하의 제왕'이 되기 전까진 이 어머니의 능력이 그리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드라마 <꽃보다남자> 구준표가 전용기 타고 뉴칼레도니아 가듯'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나도 몇 번 주체적으로 장을 보다보면 쉽게 이런 능력이 생길 거라 믿었다.

근데 막상 반지하의 단독 세대주가 되어 내 살림살이 직접 장만하려 하니, 생각만큼 쉽진 않았다. 뭘 사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서 사야할지도 막막했다. 싼 건지 비싼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잊고 있었던 추억의 TV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매일 아침 나의 단잠을 깨우던 SBS <알뜰살림장만 퀴즈>다. 도깨비 방망이로 버저를 누르고, 문제를 맞히면 다양한 살림거리를 마구 퍼주던 지극히 사회복지적인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이 아직 남아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 없이 도깨비 방망이 마구 휘둘러서 살림장만 제대로 하는 건데…, 새삼 <알뜰살림장만 퀴즈>를 폐지한 당시의 SBS 편성 PD가 야속해졌다.

하나 가격에 하나를 더 주다니! 마트는 '파라다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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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도 좋아하는 마트의 카트. 100원밖에 안 한다. ⓒ 김귀현


2007년 6월 반지하에 입주한 후, 살림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첫 단독 장보기'에 도전했다. '홈 더하기'라는 굴지의 대형 마트였다. 없는 거 빼놓고 다 있었다. 시식용 음식도 푸짐했다. '파라다이스'였다.

밥상·행거·바가지 등을 카트에 담으며 리빙 코너를 접수하고, 식품 코너로 향했다. 정말 별천지였다. 그중 육류 코너가 백미였다. 시식용 삼겹살을 한 조각 베어 무니, 아니 입에 털어 넣으니(작아서 베어 물 수 없다) 살살 녹는다. 삼겹살 말고 다른 고기들도 '날 카트에 넣어'하며 유혹했다. 30분여를 고기 코너에서 서성이다 삼겹살 한 팩을 카트에 넣었다. 냉동식품도 매력적이었다. 구워주는 만두·돈가스 등을 먹어보니, 그 맛을 못 잊어 안 살 수 없었다.

세면도구와 세제도 사야 했다. 우리나라의 좋은 풍습인 '원 플러스 원'이 날 반겼다. 하나 가격으로 두 개를 산다 생각하니, 돈을 쓰러 와서 돈을 번다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증정품 달린 세제와 샴푸는 부피가 꽤 컸다. 혼자 쓰긴 좀 많은 양이었다. 그래도 공짜가 어딘가!

마지막으로 채소 사기에 도전했다. 최대 난관이었다. 뭘 얼마나 사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한참을 방황하다 순간 고개를 돌리니 양파와 감자가 다소곳이 봉지에 담겨 있었다. 정말 싸다! 3000원 정도였는데 꽤 많은 양이 들어있었다. 얼른 카트에 담았다.

세 시간을 미아처럼 떠돌아다니며 장보기를 마쳤다. 완벽한 장보기라 생각하고 당당히 계산대에 섰다. 순식간에 합계가 됐고, 금액을 본 순간 입이 '뜨악' 벌어졌다. 모니터엔 '200,000'이란 숫자가 선명했다. 이사 후 첫 장보기인지라 밥상, 냄비, X팔 프라이팬, 행거 등을 사는 데 많은 돈이 들긴 했지만 20만원은 좀 심했다.

난 분명히 싼 것만 골랐고, 내가 필요한 것만 샀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원 플러스 원'으로 분명 돈 쓰러 와서 돈 벌었는데…. 억울해도 소용없다. 분루을 삼키고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장본 후부터가 본게임 시작이었다. 무분별한 장보기가 불러일으킨 시련들이 곧바로 들이닥쳤다.

우선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프라이팬에 구웠더니 기름이 스멀스멀 새어나왔다. 금세 기름이 바다를 이뤘다. 뭔가 이상했다. 노릇해져야할 삼겹살은 점점 암울한 회색빛을 띤다. 입안에 넣어보니 시식했을 때의 그 맛이 아니다. 분명 시식 코너에선 살살 녹았던 고기다. 근데 집에선 녹기는커녕 고무줄처럼 질기기만 했다.

냉동 만두도 구웠다. 겉은 다 타고 속은 얼음이다. 마치 '찰떡 아이스'를 먹는 느낌이다. 돈가스도 그랬다. 튀기는 중 튀김옷이 반 정도 벗겨져 '세미 누드'가 됐다. 고기는 또 어찌나 질기던지…. 시식에 혹해서 산 음식들을 집에서 먹으니 그 맛이 안 났다. 시식용 음식엔 뭔가 입맛을 돋우는 약을 타나? 내 요리 실력, 아니 조리 실력을 원망해야 하나?

양파 한 망과 감자 한 봉지도 혼자서 먹으려니 그 양이 꽤 많았다. 찌개나 카레를 할 때는 두 개 정도만 필요했다. 남은 놈들은 냉장고 '신선칸'에 보관했다. 당연히 신선함이 유지될 줄 알았다. 며칠 후 냉장고를 열었더니, 양파는 분비물 흘리며 처참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감자는 더했다. 이것들이 서로 눈이 맞았는지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묵찌빠"란 구전동요가 참으로 구슬프게 들렸다.

'원 플러스 원'도 애물단지가 됐다. 혼자 살다 보니, 게다가 대용량을 샀더니 샴푸건 세제건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그대로 난 열심히 씻는 편이다). 머리는 매일 감으려 노력하니, 샴푸는 그런 대로 빨리 줄어들어 증정품까지 다 썼는데, 세제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정해년에 산 세제를 기축년까지 쓰고 있다. 벌써 '3년차'다. '플러스 원'으로 받았던 증정품은 포장조차 뜯지 않았다.

'선택과 집중' 필요한 장보기... 난 한 놈만 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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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생들이여, 동네 시장으로 가라! 저렴한 가격에 필요한 양만 살 수 있다. ⓒ 김귀현


이런저런 실패를 겪은 이후 대형 마트엔 잘 가지 않는다. 석 달 전 집 근처에 '임아트'가 생겼지만 근처도 안 갔다. 마트가 '최저가격'으로 파는 건 확실하지만, 그만큼 많이 사게 된다. 혼자 사는 자취생은 그만큼 많이 살 필요가 없다. 요즘엔 마트 대신 가까운 동네 시장을 찾는다. 이곳이야말로 '완전 파라다이스'!. 마트만큼이나 가격이 싸고, 필요한 만큼만 살 수 있다.

돼지 뒷다리살이 한 근에 7000원이면 "3000원 어치만 주세요"하고 먹을 만큼만 산다. 한 팩이나 살 필요 없다. 채소도 한두 개씩 파니 필요한 만큼만 산다. 그날 다 먹어치우니 싹 날 걱정도 없다.

최근엔 '선택과 집중' 기술을 주로 사용한다. 이거다 싶은 찬거리만 산다. 요리할 때 그것만 넣는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고기를 뺀 '감자 카레'나 '양파 카레'를 주로 해먹는다. 김치찌개엔 군더더기 다 덜어내고 오로지 김치와 참치만 넣는다. 재료가 남지 않고 요리하기도 편하다. '한 놈'만 패는 거다. 자취생에게 '1식 3찬'은 그저 사치일 뿐이다.

생활용품 구입할 때는 '다있소'나 동네 할인 화장품 판매점을 이용한다. '다있소'에선 웬만한 물건을 3000원 이하로 구입할 수 있다. 특히 못도 내 맘대로 못 박는 셋방살이의 설움은 '다있소'의 '접착용 고리'가 달래준다. 할인 화장품 판매점에선 적은 양의 샴푸나 바디 클렌저를 아주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마트에서 덩치 큰 놈을 '증정품'까지 받아가며 사지 않아도 된다.

더 싼 곳도 있다. 2호선 신촌역과 4호선 길음역 주변 길거리에선 이런저런 생필품을 아주 싼 가격에 판매한다. 노란 두부 박스에 가지런히 담겨있다. 최근엔 순면 행주를 3개에 1000원, 아주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 '이태리 타월'을 2장에 천원에 구입했다. 가슴이 뛰었다.

물론 어머니만큼 '터미네이터식 장보기'를 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뭘 사려면 그 앞에 서서 몇 분씩 꼭 고민한다. 이쯤 되면 항상 '어머니가 그립다', '난 엄마뿐이고' 등으로 글을 마무리했다.

이번엔 설도 지났고 가족 친지들에게 '쪼일 만큼 쪼였으니' 좀 다르게 마무리 할까 한다. '터미네이터'의 눈을 가진 나의 반쪽을 찾고 싶다. 장보기할 때 물건만 골라주면 된다. 장바구니는 당연히 내가 든다. 못 미더우시겠지만, 요리까지 내가 하리다. 그녀와 함께라면 햇빛 들지 않는 이 개미지옥 같은 반지하도 충분히 아름다울 텐데….

아, 오늘따라 외풍이 더 차다.
#장보기 #마트 #시장 #반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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