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몇 병과 라면, 기분이 참 묘했다

인생의 진통제가 되어준 '낮술'의 추억

등록 2009.02.14 15:40수정 2009.02.14 15:4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영화 <낮술>의 한 장면 ⓒ 스톤워크


영화 <낮술>이 잔잔한 흥행의 파도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꽤 많은 별점을 부여하고 있고, 영화를 봤다는 친구들도 꼭 봐야할 영화라고 추천해 줍니다. 영화는 실연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친구들이 모여 '낮술'을 마시는 걸로 시작한다는데,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실연의 아픔을 '낮술'로 이겨보려한 이가 한둘은 아니겠지요. 비록 영화 <낮술>처럼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게도 19살 끝자락에 시작해 20대를 함께했던 '낮술'의 추억이 있어 몇 자 적어봅니다.

수능 성적표 받던 날, 처음 낮술을 마시다

a

1990년 영화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영화 한 장면 중. ⓒ 물결 프로덕션

1996년 12월 초. 충남 당진의 작은 자취방에 친구들 서넛이 모여들었습니다. 친구들 손에는 소주 몇 병과 라면이 들려져 있었고 모두 별다른 말없이 술잔을 돌렸습니다. 그리고 정막을 깨는 친구의 한마디.

"이제 우리 인생 반은 결정된 거겠지? 기분 참 묘하다."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 시험 발표가 있던 날, 그렇게 처음으로 '낮술'을 마셨습니다. 그 해 유난히도 어렵게 느껴졌던 시험 덕에 이날 몇몇은 재수를 결정했고, 몇몇은 망연자실 처음 먹는 '낮술'에 취해버렸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그때는 수능 성적이 곧 남은 인생을 결정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보다 도서관에 있어야할 시간에 술을 마신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한두 잔 술잔을 기울였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1997년 3월 모대학 지방배움터에 입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우고 싶었던 신문방송학을 전공한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대학 새내기의 마음을 다시금 사로잡은 건 대학신문사였습니다.

공강 시간에도 쉴 수 없이 바쁜 학보사 수습기자 생활이 그때는 왜 그리 재미있었는지, 정말 시간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대학신문에 제 이름이 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 바람은 곧 냉정한 현실 앞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1996년 '연대항쟁'(저는 여전히 그렇게 부르고 싶습니다)을 겪은 한 학번 선배들은 학보사 생활에 심취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저는 그런 선배들과 사사건건 부딪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즈음 찾아온 92학번 선배가 '낮술' 한 잔 하자고 하더군요. 두 번째 낮술이었습니다. 이날 고학번 선배의 자상한 상담(?) 덕에 저는 학보사 기자생활을 계속하겠다는 용기를 얻었고, 삶의 큰 이정표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철부지 새내기에게 진통제가 되어준 낮술

그리고 얼마 후인 3월 20일 조선대 재학생이던 故 류재을 열사가 경찰의 직격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날 인생의 세 번째 '낮술'을 마셨습니다. 80년대에나 일어났을 법한, 아니 시대를 망론하고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다시금 일어났다는데 저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당장 광주로 달려가기 보다는 낮술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먼저 선배 몇몇을 붙잡고 펑펑 울어가며 낮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최루탄 냄새 그득한 조선대 앞 사거리에 서 있더군요.

이날 저 자신과 약속했습니다. 절대 비겁하게 살지 않겠노라고,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겠노라고. 전날의 낮술은 철부지가 세상을 알아가는 진통제가 돼 주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 학번인 저는 그렇게 학보사 생활과 현실이라는 제게는 좀 버거운 과제를 짊어지고 낮술에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현실과는 담을 쌓아버린 동기 녀석들과 이야기를 풀어가는 도구로, 때로는 객지 자취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명분은 만들면 됐고 그게 대학생활의 낭만이라는 착각 아래 무수히 많은 낮술에 빠져 살았던 거 같습니다. 

공부보다는 한쪽 날개를 퍼덕이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저는 결국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고 냉정한 사회는 그런 저를 쉽사리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이즈음에 다시 낮술에 입을 댔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낮술이 도피의 도구가 되어 버리더군요. 다행히 낮술의 매력에 한창 빠져 있을 때 제게도 일할 기회가 찾아왔고 몇 번의 이직을 거치며 지금의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낮술 참 많이 마셨네요.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속에서 '낮술'은 어떤 매력으로 다가올까요? 제가 생각하는 낮술은 방향을 찾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가만히 내려둘 수 있는 용기를 주는 친구였는데.

이제 낮술 마실 시간도 없는 바쁘고 매인 몸이 되어버렸지만 이달 안에는 수능시험 발표 날 술잔을 기울이며 "우리 인생의 반은 이미 결정 났다"고 말하던 친구와 낮술 한 잔 기울이며 '과연 우리 삶의 반이 그날 이후로 결정된 것인지' 물어봐야겠습니다. 이번에 낮술은 지난 12년에 대한 평가의 자리가 되겠군요.
#낮술 #신문사 #새내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