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이거, 이거 세 개 다 주세요"
구준표보다 멋졌던 '꽃보다 아저씨'

[체험기] '자리다툼'에 '손님 분석'까지... 졸업식장에서 꽃 팔기

등록 2009.02.14 16:22수정 2009.02.1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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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에 자도 이상하지 않은 내가,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질질 끌어올려 씻고,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었다. 목적지는 경기도 용인에 있는 구성 중학교. 12일,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15종의 아르바이트를 체험한 나는 판매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문구도 팔고, 가방도 팔고, 아이스크림까지 팔았다. 그래서 졸업식에서 꽃을 팔아보라는 주문에 콧방귀를 꼈다. 꽃이라고 파는 게 그리 다르겠어?

'삐뚤빼뚤' 두 시간 동안 만든 꽃다발이 겨우 세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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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만들기는 어려워~ ⓒ 김귀현

용인에 있는 꽃집에 도착한 것은 오전 8시 30분. 주인아주머니께서는 전날(11일) 밤새 만든 꽃다발을 차에 싣고 계셨다. 나 역시 11일, 아주머니를 도와서 꽃다발을 만들었다.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보기엔 쉬워 보였지만, 막상 해보니 삐뚤빼뚤, 뭔가가 어설픈 모양새였다. 꽃 포장의 기본(?)인 예쁘게 포장지를 구겨 잡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몇 개를 만들어 철사로 돌돌 싸매다 보니 손가락 끝이 저릿저릿해졌다.

그렇게 두 시간동안 만들어낸 꽃다발이 고작 세 개였는데, 다음날 몇 개 못 만들었다며 아주머니가 꺼내놓은 꽃다발 수는 이십 여개!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거대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만든 꽃다발을 차에 싣고 목적지인 구성 중학교로 향했다. 졸업생이 300~400명 정도 되는 큰 학교라고 했는데, 어째 아침에는 참 한산하다 싶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아무도 안 나왔군'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코너를 도는데, 이미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경쟁 상대들! 헉, 이를 어쩌나. 준비해 간 걸 다 팔 수는 있는 거야?

'독과점 아주머니'에 젊은 피까지... 꽃을 파는 사람들

더군다나 교문 바로 옆에는 커다란 천막까지 준비해온 '독과점 아주머니'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꽃 파는 걸 돕겠다며 따라온(그러나 별 도움이 안 된) 비밀요원(?)을 투입해서 살펴보니, 이 아주머닌 새벽 4시부터 나왔단다. '오메 기죽어.'

그 옆자리를 살짝 차지하려고 엉덩이를 들이밀었으나, 아주머니의 날카로운 눈매에 '깨갱'거리면서 저 옆쪽으로 밀려갔다. 치사해. 봉이 김선달이지 뭐야.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천막 하나 쳐 놓고는 자기 땅이라니…, 너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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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자들, 광활한 공간을 차지한 독과점 아주머니(왼쪽)와 젊은 피로 무장한 학생들(오른쪽) ⓒ 김귀현


건너편에는 학생들의 모습도 보였다. 자신 없는 표정으로 구부정하게 서있는 걸 보니 장사꾼 행세는 아니었다. 두 번째로 투입된 비밀요원은 학생들이 직접 꽃다발을 만들어서 팔려고 아침 일찍부터 나와 있는 모양이라며, 긴급 속보를 전해주었다. 많이 봐야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어서, 잠시 신기한 생각도 들었지만 곧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

"난 전장에 나온 무사야. 저들은 모두 나의 라이벌이자 적이라고. 약해져선 안 돼!"

떨어진 공을 리바운드 하기 위해 골대 밑에 도사리고 있는 농구 선수들처럼 치열한 눈치작전이 시작되었다. 촉각을 곤두선 채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졸업식이 시작되는 오전 10시. 교문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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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팔 준비 완료! ⓒ 김귀현


"꽃 사세요~ 꽃을 사" 나의 무기는 친절함?

내가 머뭇머뭇 거리고 있는 사이에 그렇게도 얌전하게 서있던 학생들 세 명이 맨 먼저 입을 열었다. 우렁찬 목소리였다. "무조건 1만원. 1만원입니다!" 오메, 내가 파는 꽃다발은 1만5천 원부턴데 이게 뭐야. 그것과 동시에 '독과점 아주머니'의 거대한 천막에서도 판촉전이 시작되었다.

기세부터 우람한 아줌마의 천막은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끌어서 처음부터 손님들로 북적였다. 더군다나 옆에서 진을 치고 서 있던 네 명으로 구성된 아주머니 부대는 꽃다발을 전시하는 대신 직접 들고, '이동식 판매'를 시작했다. 차를 타고 오는 사람부터, 걸어오는 사람까지 전방위로 호객행위를 시작하니, 판매에 자신이 있었던 나도 마음이 조급해졌다.

"1만5천원이에요. 일단 한 번 보세요. 요즘엔 장미가 비싸서요. 다른 집에는 이런 물건 없어요. 여기 밖에 없다니까. 예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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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팔 때 필살기는 '친절한 미소'. ⓒ 김귀현


일단 마수걸이가 중요했다. 일단 팔은 안으로 굽고, 고슴도치도 지 자식은 예쁘다고, 나는 맨 먼저 어제 열심히 만들어낸 '유하표 꽃다발'을 집어 들었다. 사람들이 우리 쪽을 기웃거리자 나는 친근한 미소를 띠며 살 것 같은 손님을 찾아 직접 공격을 시작했다. 나의 무기는 바로 친절함으로 정했다(물론 내 마음대로).

그렇게 '미소가득' 첫 번째 꽃다발을 팔았다. 수중에 들어온 1만5천원. 따끈따끈한 현찰장사였다. 일단 마수걸이를 하고 나자, 꽃은 불티나게 팔려갔다. 가만히 보니 장소보다 중요한 것이 꽃다발의 모양새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러 곳의 꽃집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꽃다발을 골라서 사는 것이었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사는 사람들은 적어보였다.

꽃보다 '아저씨', "이거 세 개 다 주세요"

오전 10시 30분이 되자 꽃 장사는 절정을 향했다. 졸업식은 10시에 시작되지만, 본디 정시에 오는 사람보다 살짝 늦게 오는 사람들이 많은 법! 게다가 졸업식의 진정한 의미는 꽃과 함께하는 '한 장의 사진' 아니던가? 늦더라도 꽃다발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두 번 팔다보니 역시 우수 고객은 '아저씨'였다. 가끔 아줌마 못지않은 꼼꼼함을 가진 분들도 있지만, 대게 우리네 아빠들은 물건을 살 때 깐깐하게 따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제일 좋은 점은, 다른 집에도 가서 좀 더 고르려는 아내를 채찍질해서 "그냥 마 여기서 사자!"라며 바람직한(?) 결정권을 가진 것도 아저씨들이기 때문이다. 꽃을 고르는 것도 일사천리다. '내는 마 잘 모르니까 알아서 골라 주소'라는 느낌으로 "얼마예요?"부터 물어보는 아저씨들, 싱싱하니 어쩌니 하는 태클을 받을 일도, 가격 협상을 제시하는 일도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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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 김귀현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꽃남'의 구준표가 "모든 것을 가지겠어"라고 선포하듯 "이거, 이거, 이거 세 개 다 주세요"라고 말하곤, 지갑을 팔랑 펼쳐드는 한 아저씨를 만났을 때였다. 아저씨, 고맙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점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대다수의 구매자는 역시 이 땅의 어머니들이었다. 꽃의 상태와 가격, 자식의 기호까지 고려해서 꽃을 고르는 날카로운 눈매를 웃음으로 대처하기는 어려운 법이었다.

순간 '꽃 살 때는 인상 찌푸리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들이 깐깐하긴 했지만, 얼굴엔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꽃을 팔다보니, 행복까지 덤으로 파는 것 같아 기분 좋아졌다.

'지각생 학부모' 줄을 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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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온 꽃이 다 동났다. 주인아주머니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 김귀현


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꽃을 팔다보니까 금세 만들어놓은 꽃이 동이 나고, 급기야 꽃다발을 '현장 제작'해주어야 했고, 꽃을 사려는 사람들은 제작하시는 주인아주머니 앞에 줄을 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시각은 11시로 흘러가고 있었고, 졸업식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지각생 학부모'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로 긴장의 시간이 찾아왔다.

마음 급한 구매자들은 자기 차례를 기다리면서, 직접 꽃을 이리저리 조합하며 '그림'을 만들어보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고, 내가 먼저 왔다며 일단 돈부터 주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옆에만 서 있지 말고, 같이 포장 좀 해봐요."

옆에서 바라만 보는 나를 강하게 질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허나 남의 소중한 돈을 벌면서 사기를 칠 수는 없는 법. 나는 묵묵히 호객을 하면서, 돈을 받는 역할에 충실했다. 내가 포장한 꽃다발을 들고 사진 찍는 순간, '완전 분해'되면 어떡할 거야!

'체험, 삶의 현장' 후, 나에게 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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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도 깔끔히. 꽃다발은 하나 빼고 다 팔았다. ⓒ 김귀현


두 시간여 만에 폐허가 되어버린, 교문 앞을 빗자루로 쓸면서 한 손으론 호주머니에서 오늘 번 돈을 만지작거렸다. 비록 내 돈은 아니었지만,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제법 두툼한 돈 뭉치(나중에 슬쩍 여쭤보니 60만원 정도 팔았단다)를 아주머니에게 건네주면서 살짝 손끝에 힘이 들어갔으려나?

이틀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미있었다. 항상 졸업시즌의 꽃다발은 너무 비싸다고만 생각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정성, 아침 일찍부터 나서야 하는 자리싸움. 새로운 포장법에 대한 고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로 꽃집을 운영한 지 5년 정도가 되었다는 주인아주머니 박순애(54)씨는 젊었던 시절부터 안 해본 장사가 없다지만, 지금까지도 근처 대학교에서 새로운 꽃 포장법을 공부하면서, 항상 배우는 자세를 잊지 않는다고 했다.

꽃을 만지는 아주머니의 단단한 손끝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 단단한 손끝을 만들어야지. 일을 할 때도 즐겁게 해야지.

꽃 만드는 것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아주머니는 수고했다며, 돌아서는 내 손에 하얀 봉투를 쥐어주셨다. 거기에 분홍색 꽃이 피어있는 작은 화분도 선물로 주셨다. 신났다.

봉투를 흔들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체험, 삶의 현장'을 찍은 기분이었다. 앞으로 내 삶에 이런 재미있는 일이 '팡팡' 터졌으면 좋겠다. 언제든지 환영인데 말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화분에 물을 듬뿍 주고, 창틀에 올려놓았다. 어머, 근데 이상하다. 화분은 여기 있는데 그때 받은 돈은 다 어디로 사라졌지? 분명히 지갑에 넣어뒀는데, 금세 동이 났단 말이야. 지갑에 구멍이 뚫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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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표 꽃다발', 예쁘죠? 독자 여러분께 선물로 드려요~ ⓒ 김귀현


#졸업식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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