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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이 웃기는 쇼? 이 영화 보면 생각 바뀐다"

[인터뷰] 성민수 해설위원에게 듣는 <더 레슬러>와 프로레슬링 이야기

09.03.06 14:38최종업데이트09.03.06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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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러의 인생을 담은 영화 <더 레슬러>의 한 장면. ⓒ 유레카 픽쳐스


"프로레슬링? 사람들이 우습게 본다."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전문가라 하면 단연 성민수(35) 해설위원을 꼽는다. 성 위원은 2000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10년 간 미 프로레슬링 WWE(World Wrestling Entertainment)의 해설을 하고 있다. 그것도 매주 하는 방송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개근'을 하고 있다.

10년이나 중계를 한 전문가가, 한국 사람들이 아직 프로레슬링을 우습게 본다고 말했다. 조금은 서글프게 느껴진다. 

프로레슬링, 세 번의 부흥과 세 번의 몰락

1960~70년대 프로레슬링은 인기 스포츠였다. 김일의 박치기에 남녀노소가 모두 열광했다. 그러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 현역선수가 '프로레슬링은 쇼'라고 밝힌 후 프로레슬링은 빠르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80~90년대 AFKN에서 미 프로레슬링(당시 WWF)이 방영되면서 프로레슬링은 국내에서 다시 인기를 끌었다. 헐크 호건과 워리어는 어린이들의 우상이었다. '밀리언 달러맨'은 세계 최고의 부자인줄 알았고, 잠들 때마다 꿈에서 '언더테이커'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 헐크 호건. ⓒ WWE 홈페이지


쉬는 시간이면 교실 뒤편에선 항상 프로레슬링 경기가 벌어졌을 정도다. 그러나 그 학생들도 어느새 프로레슬링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산타할아버지가 부모님이었단 사실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자연히 인기는 사그라졌다.

2000년대가 됐다. 미 프로레슬링 WWE가 케이블 TV를 통해 방송됐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프로레슬링이 다시 인기를 끌게 됐다. 이제 짜고 하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AFKN 시절과 달리 한국어 중계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해박한 레슬링 지식에서 비롯된 명쾌한 해설 덕에 짜고 하는 프로레슬링에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재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여기엔 성민수 위원의 입담도 한몫했다.

그러던 중 '천하장사' 최홍만이 K-1에 데뷔했다. 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 미르코 크로캅의 라이벌 구도도 시작됐다. 격투기는 '이것은 실전이다'라는 마케팅으로 프로레슬링 팬의 발길을 돌리게 했다. 또 한 번 프로레슬링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것이다.

마침 프로레슬링 관련 영화 <더 레슬러>가 개봉한다. 사실 한국 개봉은 불투명했는데, 주연 배우 미키 루크가 66회 골든 글로브에서 남우주연상을 타면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상황이 바꿨다.

<더 레슬러>의 개봉(5일)을 앞둔 지난 2일 잠실의 한 카페에서 성민수 해설위원을 만났다. 영화 얘기도 듣고 싶었고, 프로레슬링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한국에서 성 위원을 빼놓곤 프로레슬링을 이야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로레슬링도 연속극 보듯 보면 재밌다

2일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난 성민수 프로레슬링 해설위원. ⓒ 김귀현


"프로레슬링은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해체하고 다시 조합한…."

처음부터 '문자' 쓰셨다. 프로레슬링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이런 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바로 해설이 이어졌다.

"스포츠란 개념과 공연이란 개념을 각각 해체해서 조합한 게 프로레슬링이다. 기존의 연극, 스포츠와는 전혀 새로운 장르다. 여기에 프로레슬링의 매력이 있다. 근데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짜고 하는 스포츠'라며 우습게 본다."

역시 해설자다운 명쾌한 설명이었다. 이어 성 위원은 프로레슬링의 가장 큰 장점을 '단순함'이라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단순하게 연속극 보듯이 챙겨보면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링 위에서 스포츠는 물론 각종 드라마가 펼쳐진다. 단순히 보고 즐기면 된다."

"나는 프로레슬링계의 '미네르바'"

성민수 프로레슬링 해설위원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 김귀현

성 위원의 말처럼 프로레슬링은 단순하다. 그러나 그 세계에 몸을 담고 있는 이들의 삶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 1980년대 최고의 레슬링 스타에서 퇴물로 전락한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 '더 램' 로빈슨(미키 루크)이 그렇고, 프로레슬링 전문가 성민수도 그렇다. 그도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처음 레슬링에 관심을 가졌던 건 고등학교 때다. 남들 용산에서 도색잡지 사 볼 때 난 레슬링 잡지 사봤다. 거기서 얻은 지식으로 PC 통신 나우누리에 프로레슬링에 대한 글을 올렸다. 대학까지 이어졌다. 엄청나게 올렸다. '프로레슬링계의 미네르바' 정도라 보면 된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 회사에 취직했다. 2000년, 내 글을 본 SBS 측에서 연락이 왔다. 해설 해볼 생각 없냐고. 후보는 세 명이었는데 운 좋게 됐다. 그때 '투 잡'이 시작됐다."

과연 회사에서 '투 잡'이 허용될까. 그것도 매주 TV에 나오는데 말이다. 성 위원은 즐거운 추억담을 얘기하듯 아슬아슬한 '이중 생활'을 들려주었다.

"회사에는 말 안 하고 시작했다. 1년이 지나서야 인사과장이 날 조용히 불렀다. 다행히 과장은 잘해보라고 했다. 당시 '걸렸다'는 생각보단 '그렇게 프로레슬링을 안 보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해설 뿐 아니라 번역까지 했다. 바쁘기도 했고 회사에서 오래 일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2002년 11월 회사를 관뒀다."

잘 다니던 회사를 관뒀다. 살짝 귀띔하자면 성 위원이 다니던 회사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대기업이었다. 혹시 프로레슬링 때문인지 조심스레 물었다. 성 위원은 손사래를 쳤다. 

"여러 방향을 생각했고 그중 하나를 택했을 뿐"이라며 "2003년 수능을 봐서 다시 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성 위원은 현재 자신의 주업은 '해설자'가 아닌 '경원대 한의대 04학번'이라고 말하고 다닌다. 이렇게 독특한 이력을 갖게 된 이유가 뭘까.

"흔히 프로레슬링 좋아한다고 하면 음지에서 '오타쿠'처럼 활동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프로레슬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더 레슬러>, 프로레슬링이 '우스운 쇼' 아니란 걸 보여준다

영화 <더 레슬러>는 프로레슬러의 삶을 진솔하게 담은 수작이다. ⓒ 유레카 픽처스


영화 이야기로 넘어갔다. 성 위원은 <더 레슬러>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전의 프로레슬링 영화들은 비현실적이었다. 한국 영화 <반칙왕>은 프로레슬링을 '실전'처럼 표현했고, 미국에서 만든 <레디 투 럼블>은 레슬링 팬을 항상 들떠있고 현실 인식 못 하는 사람들로 묘사했다. <더 레슬러>는 선수와 팬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렸다. 특히 레슬러를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하는 사기꾼'이 아닌 '팬들을 위해 헌신하는 프로'로 묘사했다. 그 헌신하는 한 명의 레슬러를 통해 인생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성 위원 말대로 영화에선 랜디 '더 램' 로빈슨을 통해 인생의 굴곡을 보여준다. 최고의 인기레슬러였지만, 딸에게 버림 받고 스트립바에서 외로움을 달랜다. 왠지 랜디와 비슷한 실제 레슬러가 있을 것 같다.

"비슷한 레슬러가 있다. 1980년대 중후반 WWE에서 활약했던 렉스 루거다. 당시 헐크 호건의 뒤를 잇는 스타로 주목받았지만, 브렛 하트라는 대형 신인이 등장하며 밀리게 됐고, 이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중풍이 왔다. 은퇴 후에는 방탕한 생활로 파산했고, 폭력 혐의로 감옥에도 다녀왔다. 물론 영화 속 '더 램'이나 렉스 루거는 무척 예외적인 경우다. 왕년의 스타 레슬러 중에는 현역 시절 열심히 활동하고 은퇴 이후 사업 등을 하며 착실하게 사는 선수들이 더 많다."

사실 성 위원은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할 줄 몰랐단다. 노출 장면이 많고, 잔인한 하드 코어 경기 장면이 담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에서 프로레슬링이란 소재는 대중의 관심을 얻기 힘들다. 그래도 어쨌든 개봉은 한다. 성 위원은 이 영화로 인해 프로레슬링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달라지길 바라고 있다.

"한국에선 프로레슬링 팬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창피하다. 그만큼 인식이 안 좋다. 이 영화는 그런 편견을 조금이나마 깨줄 것이다. 프로레슬링이 단지 '우스운 쇼'가 아니란 걸 보여준다. 프로레슬링이란 틀로 인생을 볼 수 있는 영화다."

성민수 프로레슬링 더 레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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