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은 왜 무리수를 뒀을까?

[아는만큼 보이는 '법' ③] 판사 서열, 법에는 없지만 현실에는 있다

등록 2009.03.11 14:05수정 2009.03.11 14:05
0
원고료로 응원
a

법원노조 '촛불재판 진상규명' 기자회견 법원노조가 5일 오후 1시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정문 앞에서 '촛불사건 임의배당에 대한 진실규명 및 신영철 대법관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법원노조


요즘 법원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촛불 재판 배당 몰아주기, 재판 간섭 논란 등으로 사법부의 생명인 공정성이 의심받고 있다. 이번 사건이 잘 매듭지어져 사법 신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작년 서울중앙지법에서는 형사수석부장 판사가 촛불사건을 특정재판부에 몰아주기로 배당을 했고, 이에 단독 판사들이 법원장에게 시정을 요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또한 법원장은 판사들에게 "통상적인 방법으로 현행법에 따라 촛불사건을 처리해달라"고 이메일을 보내기까지 했다.

당시 법원장은 대법관이 되었고, 수석부장 판사는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런 얘기들을 들으면 판사들 사이에서도 서열과 계급이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판사들 사이에도 계급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판사들 간의 계급은 '없다'. 물론, 법대로만 한다면.

그렇다면, 현실에선? 안타깝지만 '있다'고 봐야 한다.

법에는 '대법원장', '대법관', '판사'로만 되어 있지만...

사법부와 판사의 구성을 알 수 있는 법이 헌법과 법원조직법이다. 헌법은 "사법권은 법관으로 구성된 법원에 속한다"(101조 1항)고 규정한다. 또한 법관의 종류를 '대법원장', '대법관', '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 이렇게 3가지만 명시하고 있다.   


더 자세히 나와 있는 법원조직법을 보자. 법에는 대법원에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14인의 대법관을 둔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고등법원, 지방법원 등 각급 법원에 판사(대법원장과 대법관이 아닌 법관)를 두도록 하고 있다. (법원조직법에는 각 법원의 사법행정 사무를 관장하는 법원장이 나오는데, 법원장은 재판업무가 아닌 행정사무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재판을 하는 법관으로 보기는 힘들다.)

정리하자면, 법에서 언급하고 있는 재판하는 법관은 대법원장, 대법관, 판사로 나눌 수 있다.

법관의 보수체계도 2004년 법관단일호봉제가 시행되면서 단순화했다. 단일호봉제란 일반 판사들이 직급이나 보직이 아닌 근무경력에 따라서 보수를 받는 제도를 말한다.

그전에는 대법원장, 대법관은 물론, 고등법원장급과 지방법원장급, 고등법원 부장판사, 일반 판사 등을 나누어 봉급을 정했다. 지금은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제외한 판사들은 호봉수(최대 17호봉)에 따라 봉급을 받게 된다.

일반 판사의 임기는 10년이지만 연임이 가능하기 때문에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판사로 계속 근무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판사들 사이에서는 선후배 관계는 있을지라도 특별한 계급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배석-단독-부장-고등부장 판사... 사실상 승진 개념

a

대법원 전원합의체 장면(사법부 홍보동영상 캡쳐화면) ⓒ 사법부


그런데 실상을 들여다보면 판사들 사회에는 수많은 단계가 있다. 판사로 처음 법원에 발을 내딛는 순간,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방법원 배석판사-단독판사-고등법원 배석판사-지방법원 부장판사(지방 부장)-고등법원 부장판사(고등 부장)-법원장-대법관-대법원장.

여기에 수석부장판사, 지방 부장급인 지원장, 재판연구관, 법원행정처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실장과 심의관 같은 자리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복잡해진다. 물론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국회 동의와 대통령 임명 절차를 거쳐야 하고, 법원장 이상의 자리는 판사라고 해서 누구나 올라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와 같이 사실상 서열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대법원은 이러한 판사들의 자리가 보직개념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즉, 서열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순서가 뒤바뀌는 경우(예를 들어 고등부장이 배석판사로 간다거나 단독판사로 가는 경우)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법원의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판사들은 사법연수원 성적, 근무연수에 더해 대법원장이 최종 결정하는 근무평정을 종합적으로 매겨서 사실상 승진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부장판사와 배석판사는 단순한 선후배 이상의 관계이다. 배석판사보다 경력이 보통 10년 이상 많은 부장판사는 판결의 결론을 주도하고 배석판사의 근무평정을 좌우하는 지위에 있다.

판사들에 대한 평정은 소속 법원장이 매긴다. 그런데 합의부 소속 배석판사에 대해서는 소속 재판장으로부터 의견서를 제출받아 평정에 참고하도록 되어 있다. 말은 참고이지만 부장판사의 의견이 판사의 앞길을 좌우할 수도 있다. 게다가 법원장을 보좌하는 수석부장판사가 인사에 끼치는 영향력은 적지 않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울산지법에 근무하는 송승용 판사는 2일 촛불재판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법원 내부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제가 보기에 위와 같은 사태(촛불 재판 배당 몰아주기와 양형 압력 논란)의 원인은 바로 법관의 계층적인 서열구조와 승진제도, 그리고 이로 인하여 비롯된 법관의 관료화 때문입니다.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동등한 동료법관에 불과하다면 단지 선배 법관의 조언에 불과한 것이지만, 형사수석부장판사가 법관에 대한 평정권자 또는 평정권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위와 같은 취지의 말은 간섭이 되고 압력이 되는 것입니다."

고등부장 판사 발탁되면 명예, 탈락하면 사직 '관행'

a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국 판사의 숫자는 약 2500명이다. 대법원이 발간한 <2008 사법연감>에 따르면 지방 부장급이 283명, 지원장이 41명, 고등부장판사가 92명, 법원장급이 26명(고등법원장 6명 포함)이 된다. 통계로 보자면 지방부장 이상의 숫자가 400-500명 정도 된다.

그중 특히 주목해야 할 자리는 고등 부장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판사들은 지방 부장까지는 갈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법원에 남아서 재판을 하기 위해서는 고등부장으로 가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법원에선 고등부장이 되는 것을 군대에서 별(장성)을 다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촛불재판에서 문제가 됐던 형사 수석부장이나 법원장 모두 고등부장급 판사이다.

고등부장으로 '발탁'이 된 판사는 명예를 누리며 법원에 남고, 탈락한 사람은 옷을 벗고 나가게 된다. 아무리 유능한 판사라도 고등부장이 되지 못하면, 더 이상 법원에 남아 있기가 힘들다. 법조계에서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겠다"는 관행은 법원에선 아직까지 일종의 원칙과도 같다.

이렇게 사실상 서열이 존재하는 것이 꼭 단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 관료와 달리 판사는 개개인이 하나의 재판부이자 법원을 구성하여 판결문을 쓰는 데 윗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지시를 받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제도는 판사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대법원장, 평정을 매기는 법원장과 평정에 영향을 끼치는 수석부장판사, 부장판사 등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대법관 '승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촛불 이메일' 보냈을까  

이러한 법관 인사제도에 대해서 비판을 제기하는 판사들도 상당수 있다. 특히 2003년 대법관 선출을 둘러싸고 일선 판사들은 법관인사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고 대법원도 이를 수용할 뜻을 보였다. 그 후 6년이 지났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신영철 대법관은 판사들에게 촛불 재판 관련 이메일을 보낸 것이 사법행정의 영역이라고 강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시민단체에서는 당시 법원장이었던 신 대법관이 대법관 임명제청을 앞두고 무리수를 둔 것이라고 비판한다. 만일 신 대법관이 대법관 '승진'을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이다.

판사들이 법원장의 눈치를 보고, 법원장이 대법원장의 눈치를 본다면 법관의 독립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현재의 법관 인사제도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조항을 빛바래게 한다.
#판사 #서열 #승진 #촛불재판 #대법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법원공무원(각종 강의, 출간, 기고) 책<생활법률상식사전> <판결 vs 판결> 등/ 강의(인권위, 도서관, 구청, 도청, 대학에서 생활법률 정보인권 강의) / 방송 (KBS 라디오 경제로통일로 고정출연 등) /2009년, 2011년 올해의 뉴스게릴라. jundorapa@gmail.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