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앉아서 계산해도 되겠습니까?"

[현장] 대형마트 계산대 의자 설치 확산... "계산만 정확하면 됐지" 호응

등록 2009.03.18 11:29수정 2009.03.1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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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플러스가 최근 전국의 점포 계산대에 의자를 배치해 기존에 줄곧 서서 일해왔던 계산원들이 의자에 앉아 계산하거나 잠시 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남소연


"계산만 정확하면 됐지, 뭐가 문제야? 나는 대환영이야!"

16일 오후 6시경 홈플러스 서울 문래점 식품매장 앞, 이제 막 3번 계산대를 빠져나온 한광전(70)씨가 계산원이 앉아 있던 의자를 돌아보며 한 말이다. 오히려 "직원이 앉아서 계산을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이 귀찮다는 표정이다.

옆에 있던 부인 김아무개씨도 "그동안 얼마나 다리가 아팠겠느냐"며 "진작 저렇게 했어야 했다"고 거들었다. 일부러 중장년층을 겨냥해 질문을 던졌지만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었다.

대형마트 계산대 의자의 비밀은?

다만, 김영자(74)씨는 "그래도 앉아서 돈을 받는 것은 좀 그런 것 같다"며 "그런데 가만 보면 앉을 새도 없지 않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 저녁 '피크 타임'(오후 5~8시)이어서인지, 계산원 대부분이 서서 일을 하고 있다. "앉아서 일한다고 해서 지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서 일하는 게 더 편하다는 직원도 있다"는 게 홈플러스 관계자의 말이다.

계산원들이 앉아 있는 의자는 등받이가 없는 대신 높낮이 조절이 가능해서, 기대거나 앉아서 일을 할 수 있다. 직원의 건강보호 및 근무환경 개선을 위해 설치하는 의자인 만큼 한국여성 표준신체치수, 근무에 적합한 좌판 경사 등 한국산업안전보건위원회(KOSHA)의 심사기준에 합격한 인체공학적 제품이라고 한다.

문래점 계산대 등에 의자가 비치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홈플러스는 이달 말까지 전국 모든 점포의 계산대에 의자를 설치한다고 밝혔다. 전국 111개 점포에 설치되는 의자는 문래점 48개를 비롯해 부천 상동점 40개, 월드컵점 34개 등 모두 2220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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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마트도 최근 전국매장 계산대에 의자를 배치해 계산원들이 의자에 앉아 잠시 쉬거나 업무를 볼 수 있게 했다. ⓒ 남소연


롯데마트 서울 영등포점 식품매장 계산대에 의자가 설치된 지는 10여일밖에 되지 않았다. 허리 높이 정도의 등받이가 있는 대신 의자 자체가 계산대보다 낮기 때문에 앉은 자세로 일하기는 불가능하다. 잠시 앉아 있다가도 고객이 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한다. 계산원들은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반응이다.

근무 경력 1년인 김영숙(47)씨는 "하루 종일 서서 일하다 보면 다리와 허리가 아팠다"며 "잠깐이라도 앉아 있을 수 있으니까, 의자가 없을 때보다 훨씬 낫다"고 말했다. 윤지영(48)씨도 "계속 오래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프고 쥐가 나기도 했다"며 "앉아 있다가 손님이 오면 일어서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손님이 많을 때는 앉을 틈이 없다"며 "앉아서도 계산을 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라고 아쉬워했다.

롯데마트는 이날 대덕점·당진점 등 2개 점포의 주 계산대에 의자 비치를 끝내면서 전국 63개 점포의 모든 계산대에 1230여 개의 의자 비치를 완료했다.

신세계 이마트는 현재 안성점, 보라점, 성수점 등 3개 매장에만 의자를 설치했고, 연내에 모든 매장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단순히 기존 계산대에 의자만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라 앉아서도 불편없이 일할 수 있도록 공간 활용도를 높인 V자 형태의 유럽형 좌식계산대를 새롭게 도입했다. 다른 대형할인업체에 비해 늦게 시작한 반면 리모델링 매장이나 신설 매장을 중심으로 구조적인 내실을 기하겠다는 것이다.

서서 일할 경우 하지정맥류 발병률 8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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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정맥류는 5단계로 나누는데, 사진은 4단계 모습. 하지정맥류는 미용상의 문제로 심리적 위축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질병이 진행될 경우 통증을 초래하고, 혈관 합병증의 원인이 되는 심각한 질환이다. ⓒ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최근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등에서 근무하는 판매원, 계산원들의 건강 보호를 위해 계산대에 의자를 비치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고객 서비스라는 이름 아래 앉아서 일하는 것이 금기시 돼 왔다. 그러나 장시간 서서 일하고 있는 서비스업계 여성노동자들은 다리 근육이 수축되고 혈액순환이 안 되면서 하지정맥류로 고통을 겪고 있다. 앉아서 일하는 경우보다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은 8배나 높은 하지정맥류 발병률을 보인다고 한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여성 비정규직 차별 및 노동권 실태조사보고서(2007년)'에 따르면 유통 서비스 여성노동자의 업무상 질병은 매우 심각한 상태다. 1434명을 대상으로 벌인 이 조사에서 무려 74.6%가 근육질환을 호소했고, 65.9%가 무릎 및 관절질환이 있었다. 우울증 등 정신스트레스도 65%나 됐다.

이뿐 아니라 요통 및 디스크질환이 58.4%, 산부인과질환이 52.7%, 방광염 등 비뇨기질환이 49.6%, 하지정맥류 등 혈관계질환이 47.4%, 발가락 변형 등 발질환이 39.3%로 나타났다. 모두 장시간 서서 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질병들이다.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의자는 건강권과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셈이다.

게다가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도 의자 비치는 사업주의 의무사항으로 돼 있다. 그간 대형마트와 백화점들은 대놓고 불법을 자행하고 있었고, 이를 감시 감독해야 하는 노동부는 자신들의 의무를 방기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서 일하는 서비스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의자는 시작에 불과"

'서서 일하는 여성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 포스터 ⓒ 국민캠페인단

지난해 7월 노조·시민단체 등이 모여 '서서 일하는 서비스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국민캠페인단을 발족, 전국에 조직을 구성해 의자캠페인을 벌여온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이들의 피켓에는 "고객님, 앉아도 되겠습니까?"라고 적혀 있다.

또한 '의자는 존중입니다'라는 제목의 포스터는 "의사나 변호사가 앉은 상태로 그들의 고객을 맞이하지만, 아무도 그 모습을 보고 불친절하거나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는 사회적인 문제이고 따라서 사회 구성원 모두 사고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의자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라는 제목의 캠페인 활동 보고서가 발간됐다.

그러나 아직 '모든 의자'에 꽃을 피우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의자도 의자 나름'이라는 것이다. 사업주가 노조·시민단체의 압박을 피하고 법적인 조건 충족에만 급급해 '아무 의자나 사주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윤근 노동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팔과 어깨에 무리가 가기 때문에 앉아서만 일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며 "오히려 서서 일하다가 피곤할 때 앉거나 기댈 수 있도록 선택할 수 있는 의자가 가장 좋다"고 말했다. 이 연구원은 특히 "캠페인을 해서 의자를 가져왔는데, 활용도가 낮고 허접하다면 좁은 공간에서 천덕꾸러기가 될 수 있다"며 "이는 오히려 노동자들에게 패배감이나 실망감만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민정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여성부장은 "백화점 내 매장(브랜드) 협력업체 직원이나 외주 용역자들은 여전히 의자에 앉지 못하게 하는 것이 큰 문제"라며 "백화점 안에서 이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고 지적했다.

정 부장은 이어 "의자는 시작에 불과하다"며 "제조업이나 건설현장뿐 아니라 서비스 노동자가 일하는 어떤 공간에서도 산업안전보건법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도록 하는 게 진짜 의자가 가지는 성과"라고 강조했다.
#서서일하는노동자에게의자를 #의자캠페인 #이마트.롯데마트.홈플러스 #산업안전보건법 #하지정맥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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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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