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 폈다고? 에이, 여긴 눈꽃이 활짝 폈어!"

[현장] 대설주의보 내린 강원도 정선은 지금 눈꽃 세상입니다

등록 2009.03.26 19:18수정 2009.03.26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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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오늘 전 눈이 하얗게 멀었습니다 ⓒ 강기희

▲ 눈꽃. 오늘 전 눈이 하얗게 멀었습니다 ⓒ 강기희

 

오늘은 3월 26일입니다. 아직 얼음이 깔려 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골짜기엔 봄 기운이 돌았습니다. 버들강아지가 꽃을 피웠고 노란 동박꽃도 꽃을 피웠습니다. 동박은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에 나오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 김유정 소설 <동백꽃> 중에서

 

점순이와 주인공이 동백꽃 아래에서 사랑을 나누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노란 동백꽃이 있나요? 없지요. 동백은 붉은꽃을 툭툭 떨어뜨리는 붉은 피 같은 꽃이지요. 그런데 김유정은 노란 동백꽃이라고 합니다.

 

봄눈에 가려진 불편한 '리스트'와 그 진실들

 

그 노란 동백꽃은 다름 아닌 생강나무꽃입니다. 나무에서 생강 향기가 난다 하여 생강나무라고 하는 것이지요. 김유정은 생강나무꽃을 동백이라고 했지만, 제가 사는 정선에서는 동박나무라고 합니다. 아주까리와 같이 동박나무 열매로 기름을 짰거든요.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 - 정선아라리 가사 중에서

 

어제까지만 해도 동박꽃이 노랗게 피었던 계곡입니다. 알싸한 그 향기는 비슷하게 생긴 산수유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동박꽃을 보면 김유정의 소설에서처럼 사랑을 나누고 싶어지니 그 향기가 얼마나 아릿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세상은 눈천지로 변했습니다. 눈이 언제부터 오기 시작한지는 저도 모릅니다. 아침 새소리에 눈을 떠 보니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이미 눈은 발목을 덮을 정도로 내렸고, 하늘에선 계속해서 눈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산 중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재미란 그런 것인가요. 고요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아득해진 지난 날을 떠올립니다. 2004년 도시를 떠나면서 한식구가 된 강아지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눈 속에 파묻혀 걷지도 못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 강아지, 이젠 성견이 되었습니다. 5년을 함께 살던 개는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해 집을 잃고 '내년 봄 집을 마련할 때까지만 살아 남자'라고 했지만, 설날을 마지막으로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습니다. 집을 마련하기 얼마 전의 일이라 슬픔은 더 큽니다.

 

개를 찾으려고 불탄 집과 주변 동네를 훑어도 개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만나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지만 고개만 흔드는 시간들. 시간이 더 흐르자 죽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누군가 사냥총으로 쏴서 잡아 먹었다는 소문도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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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가득합니다 혹, 이번 내린 눈이 마지막 눈은 아니겠죠? ⓒ 강기희

▲ 눈이 가득합니다 혹, 이번 내린 눈이 마지막 눈은 아니겠죠?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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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가지가 부려졌습니다. 백성도 살기 힘들면 나무처럼 부러질 날이 옵니다 ⓒ 강기희

▲ 삶의 무게 눈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가지가 부려졌습니다. 백성도 살기 힘들면 나무처럼 부러질 날이 옵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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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눈이 얼마나 왔는지 확인하는 곳입니다 ⓒ 강기희

▲ 뭐지? 눈이 얼마나 왔는지 확인하는 곳입니다 ⓒ 강기희
 

흉흉한 소식들입니다. 누구네 집이 키우는 개인 줄은 다 알고 있을 터인데, 이런 소문이 들려옵니다. 흉흉한 일입니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더 흉흉하고, 그런 소문을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습니다.

 

숱한 리스트, 관객은 안중 없다

 

어디 들려오는 소문만 흉흉하던가요. 용산에선 생존권을 외치다 숨져간 5인의 백성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뉴스 채널인 YTN 노조원들이 새벽에 잡혀가고 MBC  PD가 긴급 체포되는 일도 생겼습니다.

 

누군가 일제 강점기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또 누군가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도 이렇게 잔혹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백성이 못나 당하는 일이니 달리 할 말도 없습니다. <말죽거리 잔혹사>가 영화 제목인 줄만 알았지 백성들의 잔혹사가 생길 줄 누가 알았을까요.

 

따지고 보면 어디 흉흉한 소식은 이런 일뿐이던가요. 연일 터지는 '리스트'가 가요 프로그램 순위처럼 중계됩니다. 다들 권력과 돈 그리고 여자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경찰에게 돈을 상납한 장부를 가지고 있다는 유흥업소 사장들의 리스트가 있고, 박연차 리스트가 그 리스트를 견인하고 장자연 리스트가 또 부각하는 요즘 떨고 있는 것은 가진자들입니다. 하루 벌어 먹고 살기에도 힘든 백성들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번 역시 관객입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리스트 중계를 지켜보는 관객은 이번에도 불편합니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소문과 소문이 사실로 변하는 그 현실이 불편합니다. 관객의 불편한 심기 정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여자는 '인간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 중의 하나'라는 글이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재 묻은 놈이 겨 묻은 놈을 향해 소리치는 것도 여전합니다. 소리가 더 커야 제 치부가 가려지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잠시 그쳤던 눈이 또 내립니다. 구름이 내려왔다 올라가면 눈이 잠시 그치고 구름이 올라가면 또 눈이 내립니다. 눈과 비가 다를 뿐 여름 장마철과 비슷합니다. 그친 눈이 다시 내릴 때면 눈의 모양도 달라집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다가도 어느 순간 폭설이 내리고 싸락눈이 내리는가 싶으면 금세 주먹만한 눈이 떨어집니다.

 

길 나서는 이 하나 없는 골짜기에 눈이 내립니다. 눈을 받은 나무들이 오늘은 겸손하게 가지를 내립니다.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눈 무게를 견디지 못한 소나무는 아예 땅에 가지를 내려놓고 있습니다.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납니다. 고요하던 골짜기가 소란해집니다. 눈을 떨구는 나무들의 몸부림도 대단합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이라 더 무거울 겁니다. 봄눈이 더 무거운 것은 나무들도 알고 있는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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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눈을 맞은 장독대가 한폭의 그림입니다 ⓒ 강기희

▲ 장독대. 눈을 맞은 장독대가 한폭의 그림입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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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꽃. 화무는 십일홍. 하지만 눈꽃은 하루도 가지 못합니다. ⓒ 강기희

▲ 눈꽃. 화무는 십일홍. 하지만 눈꽃은 하루도 가지 못합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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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 눈을 뒤집은 쓴 돌이 끝내 입을 닫았습니다 ⓒ 강기희

▲ 고요. 눈을 뒤집은 쓴 돌이 끝내 입을 닫았습니다 ⓒ 강기희
 

눈이 함박눈으로 변했습니다. 하늘도 화가 났나 봅니다. 누추하고 추잡한 세상이 꼴보기 싫었던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내린 눈은 25센티 정도입니다. 오늘 하늘은 25센티만큼의 죄를 덮었습니다.

 

오늘 내린 눈이 우리의 죄를 다 덮을 수 있을까요?

 

이 눈이 녹아 내리는 날 세상의 죄는 다 사라질까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야 있겠는지요. 녹은 눈 사이로 나타나는 세상이 눈세상처럼 깨끗해지기야 한다면 하늘은 매일이라도 눈을 내리겠지요. '부끄러움도 잠시'라는 생각으로 얼굴 뻔뻔하게 들고 다니는 이들이 한둘이던가요.

 

그런 인간들로 인해 하늘도 지쳤나 봅니다. 갑자기 눈이 그치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데 밖에서 클랙슨 소리가 골짜기를 울립니다. 눈 길을 뚫고 다리를 건너니 우체국 트럭입니다. 우체국 트럭은 우편물 하나 달랑 전하자고 눈길을 올라왔습니다.

 

"길 괜찮던가요?"

"어휴, 괜찮기는요. 체인을 치고도 억지로 올라왔어요."

"그럴 겁니다. 이번 겨울 들어 눈이 가장 많이 오지 않았던가요."

 

평소에도 차량 출입이 뜸하던 길입니다. 오늘은 우체국 택배 트럭이 처음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느 날 같으면 오토바이가 오를 텐데 오늘은 오토바이로 나설 길이 못됩니다. 우편물을 실은 트럭이 조심스럽게 멀리 떨어져 있는 골짜기 집으로 올라갑니다.

 

우편물을 뜯어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흉흉한 소식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기쁜 소식도 아닙니다. 적어도 우편배달부는 흉흉한 세상 소식을 전해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나 나이가 든 지금까지 우편배달부가 기다려지는가 봅니다.

 

눈이 다시 내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하늘은 화가 계속 나는 모양입니다. 하늘까지 화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일까요. 산촌에 사는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런 일은 알 길이 없습니다. 배달부에게 받은 우편물 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종아리까지 빠지는 눈은 푹신합니다.

 

이 눈이 떡이라면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다 나눠주고 싶습니다. 눈을 떡으로 만드는 기술은 아직까지 개발되지 않았던가요. 눈을 떡으로 만들겠다는 선거 공약을 한 대통령은 아직 없던가요.

 

강원도 정선군 단임골에 함박눈이 펑펑 내립니다. 지금 시간 오후 5시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눈이 녹기 전에 정선으로 눈구경 오십시오. 저는 대신 마음이나마 봄꽃 구경 가렵니다. 그래야 공평한 거 아닌가요.

 

공평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은 세상이라 눈 맞으며 넋두리 좀 했습니다. 눈 때문에 정신나가는 사람도 가끔 있다고 하지 않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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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은 아직 겨울 얼음 깔린 계곡에 눈이 또 내렸습니다 ⓒ 강기희

▲ 계곡은 아직 겨울 얼음 깔린 계곡에 눈이 또 내렸습니다 ⓒ 강기희

  

2009.03.26 19:18 ⓒ 2009 OhmyNews
#봄눈 #정선아라리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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