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부엌데기의 들밥 초청

고씨 아저씨가 들밥을 초청한 이유

등록 2009.04.07 20:02수정 2009.04.0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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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 들밥을 먹고 있을까? 막걸리를 마시고 있을까? ⓒ 고기복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네, 그냥 부엌데기 합니다. 허허허."

 

태국 출신 결혼이주민 폰판씨가 아프다 해서 병원에 갔다가 폰판 남편 고씨와 나눈 대화입니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벌써 4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자녀가 없어 단출하게 부부가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폰판 문병을 갔던 날, 병원 밖에서 담배를 피던 고씨를 만났는데, 고씨는 늘 그렇듯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고씨와 인사를 나누고 병실에 갔더니, 저녁 식사 시간이더군요. 메뉴는 고춧가루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물김치를 비롯한 반찬과 함께 나온 하얀 죽이었습니다. 죽을 먹고 있던 폰판은 살포시 웃으며, 배가 아파서 입원하게 됐다고 말을 했습니다.

 

폰판은 지난달 결혼 이후 처음으로 태국에 갔다 온 후로 줄곧 살살 배가 아팠지만 참아 왔다고 했습니다. 그저 태국에서 오랜만에 매운 음식을 맘껏 먹었을 때 아팠던 배가 아픈 것이려니 생각하고 말입니다. 한국 음식이 맵다 하지만, 태국 음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남편 고씨에 의하면 폰판이 태국갔을 때 전화할 때마다 아내가 배가 아프다고 했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오랜만에 매운 음식을 먹어서 그런 거니 걱정 말라고 했다나요.

 

그러던 폰판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은 시어머니가 입원할 때 병원에 모시고 왔다가 같이 병실 신세를 지게 됐다고 하더군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 김에 간단히 검사만 할 생각이었는데, 병원 측의 권유로 입원을 해야 했고, 결국 시어머니와 같은 병실을 쓰게 됐다고 하네요. 여든이 넘으신 시어머니는 백발이었지만, 피부색은 고우셨습니다. 다만 어르신이 기력이 없다보니 말씀은 많지 않으셨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병실에 입원하다 보니, 덕택에 남편 고씨는 병실에서 간병인 노릇을 하게 됐는데, 연로하신 어머니와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아내를 혼자 놔두지 않아도 된다면서 웃는 모습이 영락없이 걱정 없는 사람 같았습니다.

 

대화 도중에 모내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고씨는 하우스에서 모종을 키우기 때문에 다른 곳보다 좀 늦게 해도 괜찮다면서 5월 중순 경에 모를 놓을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잠시 잠깐 병원에서 간병하면서도 농부는 어쩔 수 없는 팔자인가 봅니다. 농사일을 걱정해야 하니 말입니다.

 

둘 다 마흔이 넘은 늦은 나이에 결혼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도회지로 나가서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꿈을 찾아 결혼한 폰판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사람인데, 타국에 와서도 시골 아낙이 된 셈입니다. 시골 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손이 가는 일인데, 늘 일손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터라, 모내기한다는 소리가 낯설지 않았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두 사람의 쾌차를 바라면서 병실을 나서는데, 고씨가 일요일인 5월 17일쯤 해서 들밥도 먹을 겸 놀러 오라 하더군요. 들밥을 먹으러 오라 했지만, 사실 일손이 부족한 걸 하소연하는 것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속내를 숨기지 못하는 순진한 시골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확답은 안 했지만 꿈을 찾아 한국에 온 결혼이주민 폰판씨나, 노모를 모시고 평생 농사일을 걱정하며 살아 온 고씨의 고단한 삶을 보니 농활을 꼭 계획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는 자칭 부엌데기 고씨가 마련해 주는 어설픈 들밥이 아니라,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랐다는 건강을 회복한 폰판씨가 마련해 준 들밥을 먹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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