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돈 준다고 하면 책읽고 글쓰고 하겠어요?

[책과 말과 삶 5 : 49~60] 마음을 확 사로잡은 책을 만나면

등록 2009.04.16 10:08수정 2009.04.16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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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9) 사람 삶과 출판사 삶 :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 그러나 꾸준하게 새로운 사람이 태어나기 때문에, 슬기로운 어르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도 세상은 이어간다. 착한 사람이 죽어도, 깨끗한 사람이 죽어도, 아름다운 사람이 죽어도, 이 땅에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그 착함과 깨끗함과 아름다움과 슬기로움을 물려받아 무럭무럭 자라면서 새힘과 새기운으로 새세상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아이들도 머잖아 늙은이가 되고 주름살이 늘다가는 다시 '앞선 어른'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 땅에도 이름 높고 거룩하게 떠받들리는 출판사가 제법 생겼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힘을 내던 출판사가 있고, 숱한 독재정권이 판을 치던 때부터 곧게 한길을 이어온 출판사가 있다. 나라살림이 어렵다던 때 힘겹게 문을 열고 커진 출판사가 있고. 그런데 이처럼 이름 높고 거룩하게 떠받들리는 출판사 가운데에는 안타깝게도 첫마음을 잃거나 놓으면서 돈에만 기울어진 곳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이 세워 준 이름으로 더 너른 책사랑을 펼치지 못하는 가운데, 돈밭 일구기에만 매달리는 나머지 거짓말과 거짓일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어떤 어린이이든, 착하거나 맑거나 아름답던 마음을 잃으면서 짓궂거나 얄궂거나 뒤틀린 길을 걷기도 한다. 모든 어린이가 착하고 맑고 아름다운 어른으로 자라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우리 삶터는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아름답거나 맑거나 착하도록 놓아 주지 않기도 한다. 이리하여 스스로 모르는 사이 돈맛에 사로잡히고 이름맛에 휘둘리며 힘맛에 콧대가 높아지곤 하는데, '아무개 대통령 물러나라!'고 외치는 목소리마따나, '못된 짓 하는 출판사 문닫으라!'고도 외칠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다. 이 출판사들이 제마음을 차리지 않는다면. 이 출판사들이 제길을 되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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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다루는 손길 낡은 책을 하나하나 매만지고 살피면서 되살려 내는 헌책방 일꾼 손길을 잊으면, 책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잊어버리게 됩니다. (서울 용산 〈뿌리서점〉) ⓒ 최종규


(050) 안 읽은 책과 읽은 책 : 제 스스로 읽지 않은 책을 알 턱이 없다. 제 스스로 읽지 않아 모르고 있는 책이란, 마땅히 어느 누구한테도 읽힐 수 없다. 제 스스로 읽지 않아 모르는 책 이야기란 나오지 않고 쓰이지 않는다. 제 스스로 읽은 책을 이야기할 수 있고, 제 스스로 읽은 책을 선물할 수 있다. 그래서, 팔린 책이 더 팔리고, 읽힌 책이 더 읽힌다. 더 팔린 책이 더욱 팔리고, 더 읽힌 책이 더욱 읽힌다.

더 팔리거나 더 읽힌 책이라면, 아무래도 이 책에 담긴 알맹이가 나쁘거나 얄궂지는 않으리라 본다. 그러면, 덜 팔리거나 덜 읽힌 책에 담긴 알맹이는 어떠할까. 덜 팔리거나 덜 읽힌 책은 그예 묻혀 있기만 해도 괜찮을까.

(051) 자랑과 발자국과 길 : 출판사에서는 '우리는 이제까지 이러저러한 책을 냈어요!' 하며 자랑할 쓸모가 없다. 작가는 '나는 이제까지 이러저러한 책을 썼어요!' 하며 뽐낼 까닭이 없다. 그저 지나온 길일 뿐이니까. 그동안 거쳐 온 발자국이란 조금씩 저 스스로를 닦아 나가거나 세워 나가는 흐름일 뿐이니까.

어느 출판사이든 새로 펴내는 책이 그 출판사한테는 가장 뛰어나거나 가장 좋은 책이어야 한다. 어느 작가이든 새로 써내는 글이 그 사람한테는 가장 훌륭하거나 가장 거룩한 글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책을 내고 저러한 글을 쓴 다음에는, 지난 책과 예전 글을 넘어설 만한 책과 글을 베풀어 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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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다루는 연장 다친 책을 매만지거나 손질하는 연장은, 어느 헌책방 셈대에나 반듯하게 놓여 있습니다.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최종규


(052) 이런 책 나 아니면 누가 사 가는데? : 헌책방 나들이를 하다 보면, 제법 무르익은 나쎄가 되는 어르신께서 "이런 책 나 아니면 누가 사 가는데?", "나니까 이런 책을 사 가지, 다른 사람은 사 가지도 않잖아?", "나 말고 사 가는 사람도 없는데 싸게 주지?" 하고 읊으시는 이야기를 귓결로 곧잘 듣는다. 제법 무르익은 나쎄 되는 그 어르신이 책값을 셈하고 돌아가시고 난 다음, 헌책방 일꾼한테 "저분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하고 살며시 여쭙는다.  "○○대학 교수님이셔요." "○○출판사 사장님이셔요." "○○○라는 작가예요."

(053) 웃음과 눈물 : 텔레비전 코미디에는 웃음만 있다. 텔레비전 연속극에는 눈물만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웃기만 할 일, 눈물만 나는 일은 없을 텐데, 텔레비전 풀그림에는 '웃음이 나는 이야기는 웃음만 나오게' 다루고, '눈물이 나는 이야기는 눈물만 나게' 다루기만 한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웃고 울며 우리 마음과 느낌과 생각을 살찌우거나 키우는 데에까지 손길을 뻗치지 못한다. 아니, 처음부터 이렇게 할 뜻이 없었을 테지. 때로는 웃고 때로는 울 수 있는데. 그런데, 일부러 한 가지 느낌만 받게 하려고 하니, 자꾸만 억지스런 웃음과 지나친 눈물을 짜내려고 애쓰게 되거나 꾸미게 되지 않을까?

텔레비전 소리 넘실거리던 나들이 간 집을 떠나 우리 살림집으로 돌아오는 전철길에 책을 펼쳐 읽다가 문득문득, '그러면 책은 어떤가? 책은 좀 나은가?' 하는 생각이 곰실곰실. 글쎄. 싱싱한 웃음, 깨끔한 눈물을 쏟아지게 하는 제대로 된 책이 있을는지? 이러한 책을 기꺼이 펴내고 있는 책마을인지? 이와 같은 책이 나올 때 우리들은 스스럼없이 장만하여 웃음과 눈물을 흠뻑 쏟아내고 있는지?

한숨 한 번 길게 내쉬다가 책을 덮는다. 손잡이를 잡고 선 채로 눈을 감는다.

(054) 읽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 읽어 주는 사람이 있어서 고맙다. 언젠가는 읽어 주는 사람이 있으리라 믿고 기다릴 수 있어서 이 또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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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뭉치와 공책 헌책방 나들이를 하다가 아주 드물게 ‘아무개 작가 원고뭉치’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출판사가 문을 닫으며 그곳에 있던 원고가 통째로 고물상에 들어온 모습을 헌책방 일꾼이 알아내어 거두어들이는 물건인데, 헌책방 책손이 이 원고를 다시 거두어 주지 않으면, 소담스런 ‘손글씨 원고’는 가뭇없이 폐휴지로 사라지고 맙니다. ⓒ 최종규


(055) 책을 사는 일과 : 책을 사는 일 못지않게 책을 읽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일 못지않게 자기 속으로 곰삭이고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겠지. 읽은 책을 곰삭인 다음 세상에 온몸으로 펼쳐내는 일 또한 중요할 테고. 다만, '책을 사자'와 '책을 읽자'를 외치는 사람은 많아도 '책을 새기자'와 '책으로 얻은 깜냥을 펼치자'라든지 '책처럼 살자'라 외치는 목소리는 좀처럼 찾아보지 못한다.

(056) 내가 보는 책들은 : 내가 장만하여 읽거나 보는 책 모두 내가 살아 있으니 내 곁에 모여 있을 뿐이다. 내가 앞으로 숨을 거두어 눈을 감으면 어디로든 다 흩어질는지 한 자리에 고이 모여 오래도록 사랑을 받게 될는지는 그야말로 어느 누구도 모를 테지. 내가 바라듯 내 개인 도서관을 열어 아주 남다른 도서관 장서로 남을 수 있겠지만, 그렇게 못 되고 헌책방을 돌고 돌다가 어느 결에 아주 조용히 사라질는지 모른다. 여태까지 읽고 모은 책으로 어렵사리 동네도서관을 열어 놓기는 했다만, 이 도서관 살림을 버텨내지 못하고 문을 닫게 되면서 부질없이 뿔뿔이 흩어져 버릴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내 책이 내 손을 떠나 흩어지게 된다고 해서 조금도 슬퍼할 까닭이란 없다. 생각해 보라. 헌책방을 돌고 돌 만한 값어치라도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노릇인가. 헌책방에서 돌고 돌면서 누군가 새 임자를 꾸준히 만나서 읽힐 수 있다면 얼마만큼 반갑고 기쁜 일인가.

(057) 마음을 확 사로잡은 책을 만나면 : 내 마음을 확 사로잡은 책 한 권을 만났을 때에는 책값을 따지지 않는다.

(058) 처음과 나중 : ① 처음에는 사람이 책을 산다. 그러다가 책이 책을 산다. 나중에는 책이 사람을 산다. ② 처음에는 사람이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책이 책을 읽는다. 나중에는 책이 사람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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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먼지와 책때 오래도록 묵은 책에는 먼지와 때가 앉습니다. 이 먼지와 때를 싫어할 분이 있는 가운데, 이 먼지와 때 때문에 더욱 책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분이 있습니다. ⓒ 최종규


(059) 책값 쓰기 : 나는 돈을 참 못 번다. 그렇지만 쓸 때에는 참 당차게 쓰곤 한다. 그렇다고 아무 물건이나 막 사지 않는다. 돈을 못 버니 쓸 때에는 꼼꼼히 살펴서 쓸 자리에만 쓴다고 할까. 쓸 물건이면 에누리를 않고 가게 임자가 부르는 값대로 내어주고 산다. 아니, 나는 그 물건을 사기 앞서 그 물건이 그만한 값인 줄 알아본 다음에 그만한 돈을 마련해 왔으니 두말 않고 돈을 치르고 물건을 가져간다.

읽을 책을 살 때에는 줄거리와 꾸밈새와 엮음새 들을 두루 살피면서 마지막으로 책값을 들여다본다. 꼭 알맞춤하게 붙었구나 싶은 책이 있고, 꽤 값싸게 붙였다고 느껴지는 책이 있으나, 지나치게 비싸게 매긴 책이 있다. 아무래도 '얼마 안 팔릴 듯 여기'면서 값비싸게 매겼구나 싶은데, 비록 출판사 주머니가 홀쪽해서 이렇게 했다고는 하지만, 이 책을 써낸 사람과 엮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조금 비싸더라도 기꺼이 장만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대로 된 책이요, 훌륭하게 엮은 책이요, 우리 삶과 삶터를 아름답게 가꾸어 주는 책이라 한다면, 비싸더라도 기쁘게. 뭐, 그만큼 내가 더 뼈빠지게 일해서 책값을 벌면 되니까.

(060) 누가 돈 준다고 하면 책읽고 글쓰고 하겠어요? : 엊그제 헌책방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나한테 들려주는 말, "자기(최종규 씨)가 하는 일을 그렇게 (낮춰서) 말하지 마세요. 누가 돈 준다고 하면 그렇게 하겠어요?"

"네." 하고 대꾸를 하고 나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며칠이 지나도록 이 말이 머리속에서 맴돈다. 나이 지긋한 아저씨 말대로 나는 누가 나한테 돈을 억수로 안겨 준다고 해서 아무 일이나 덥석 붙잡지 못한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마음이 들도록 북돋운 책이 아니라면 그 책이야기를 쓰지 않는다. 나 스스로 좋아하게 이끌지 않은 헌책방은 찾아가지도 않지만 그곳 이야기를 쓰지도 않고 사진도 안 찍는다. 내 모든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한식구처럼 지내게 된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 나한테 "이 책을 읽어서 소개글을 써 주면 돈 얼마를 드리겠습니다" 하고 다가온다고 해서 그 책을 읽거나 소개글을 써 주겠나? 참말로 내 마음에 들고 내 마음을 울리거나 움직일 수 있어야 그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책은 동네책방에 전화를 걸어 주문한 다음 찾아가서 내 돈을 기꺼이 치러 장만하여 읽을 테고.

책을 읽은 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 책을 읽고서 좋았던 이야기와 느낌이 있으니 어떤 대목이 좋았고 내 마음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를 낱낱이 밝히면서 기꺼이 쓸 뿐이다. 누가 돈을 준다고, 이름값을 높여 준다고, 힘(문화 권력)을 안겨 준다고 해서 그런 글을 쓰겠나?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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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말 #책삶 #책읽기 #책 #책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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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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