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시작해서 만화로 끝난 어린이날

'메이플 스토리'에서 '검정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여행'까지

등록 2009.05.06 08:56수정 2009.05.0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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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국립묘지 전경. ⓒ 이돈삼


"예슬아! 뭘 갖고 싶어?"
"만화책이요. 세 권만 사 주세요. 메이플 스토리랑 또…."
"그래. 알았어."


어린이 날, 둘째 딸아이한테 뭘 갖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대뜸 만화책이라고 합니다. 평소 잘 사주지 않는 것이기에 선뜻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만화책 한 권을 사면 몇 번씩 보는 아이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게으른 점심을 먹고 해가 서편으로 기울기 시작할 즈음 서점엘 갔습니다.

서점은 부모 손을 잡고 온 아이들로 북적거렸습니다. 복잡한 게 싫어서 서둘러 만화책을 사가지고 나왔습니다. 곧장 집으로 되돌아가기엔 왠지 서운합니다.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이다가 5·18국립묘지로 향했습니다. 5·18광주민중항쟁 29주년을 맞아 딸아이가 항쟁의 의미를 다시 한번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안고서.

5·18묘지로 가는 길은 한산했습니다. 그러나 반대편 차선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휴일을 맞아 나들이 나갔던 사람들이 돌아오면서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습니다. 그 행렬에 끼어있지 않다는 게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뒷좌석에 앉은 예슬이는 바깥 사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점에서 산 만화책을 보며 '만화삼매경'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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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을 둘러보고 있는 예슬이. ⓒ 이돈삼


묘지는 여느 때처럼 평온한 분위기였습니다. 도로변과 주차장을 둘러싸고 새하얀 꽃을 피운 이팝나무가 눈길을 끌 뿐이었습니다. 과자 하나를 사기 위해 들른 매점 앞에선 5·18단체 관계자 몇 명이 5월 행사와 철거 위기에 놓인 옛 전남도청 본관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묘지 왼편에 있는 5·18추모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얼마 전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아직 한번도 들러보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습니다. 아직 개관하지 않았나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투명유리로 보이는 반대편 출입문은 잠겨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쪽으로 돌아갔습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막 들어가려는데 관계자가 저지를 합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문을 닫기 30분 전에는 들어가야 둘러보고 나올 수 있다는 이유였습니다. 휴대전화를 꺼내 시간을 확인해 보니 5시40분. 개관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6시까지였습니다.

우리의 뒤를 따라온 다른 가족도 같은 얘기를 듣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저희도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됐더라도 들여보내주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처럼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다시 찾으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멀리서 어려운 발걸음을 한 사람이라면 사정이 다를 것입니다. 그것도 성지순례를 한다고 부러 찾았는데,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이유만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면 못내 서운할 것입니다. 적어도 5월 한 달만이라도 탄력적으로 운영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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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앞에서 분향을 하고 있는 예슬이. ⓒ 이돈삼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느 때처럼 분향을 하고 묘지를 둘러보았습니다. 아이한테 묘비 보는 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묘비 오른쪽에 새겨진 연도는 묘지에 잠들어 있는 분의 태어난 날과 돌아가신 날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슬이는 묘비를 일일이 확인하며 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26살 밖에 못사셨네, 이 분은 18살, 이 분은…."

다른 쪽에서는 순례 차 들른 학생들이 묘비를 돌아보며 안내자의 설명을 귀담아 듣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온 가족단위 참배객도 보였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온 젊은 부부도 있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분도 눈에 띄었습니다.

묘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예슬이가 방명록에 흔적을 남깁니다. 뭐라고 썼는지 물었더니 이름과 학교, 학년을 썼다고 합니다. 이번엔 맞은편 도서비치대에 눈이 꽂히더니 책 한 권을 꺼내 나무의자에 앉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책인가 했더니 역시나 만화책이었습니다. '검정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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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영이와 함께 5·18여행을 하고 있는 예슬이. ⓒ 이돈삼


예슬이는 200여쪽 되는 만화책 한 권을 쉬지 않고 넘겼습니다. 금세 다 읽었냐고 물었더니, 그랬다고 합니다. 이 책은 재단법인 5·18기념재단이 4년 전 어린이들을 위해 펴낸 것으로, 예슬이가 묘지를 찾을 때마다 한번씩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광주에 사는 외할아버지를 찾아간 주인공이 광주의 참상을 겪게 되는 설정에서 출발합니다. 5·18 전후의 사회 분위기와 왜 5·18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진행이 됐는지 등을 검정고무신 특유의 전개방식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아빠! 전두환은 지금 뭐해요? 나쁜 군인들의 총과 칼에 쓰러진 시민들이 불쌍해요. 죽은 분들의 가족은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행방불명자들은 혹시 다른 곳에 살아있지 않을까요?"

예슬이는 만화 속 주인공 기영이를 통해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갖게 된 것 같았습니다. 학교 교과서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이야기들을 만화책을 통해서 익혀가는 것 같았습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예슬이는 또 만화책을 펼쳐든 채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습니다. 만화책으로 시작해서 만화책으로 끝난 어린이 날 오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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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민중항쟁 29주기를 앞둔 5일 오후 5·18국립묘지를 찾은 참배객들. ⓒ 이돈삼

#5·18국립묘지 #5·18광주민중항쟁 #기영이의 5·18여행 #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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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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