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 10여년, 봄날에 나를 돌아보며

등록 2009.05.16 15:53수정 2009.05.1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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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구로역을 지나가는 데, 저 멀리 강둑 옆으로 노란색 개나리가 피어있다. 샛노랗게 주변을 물들이는 개나리의 풍광 곁으로, 색이 빠진 아파트 벽면을 새롭게 페인트 칠 하겠다는 큼지막한 광고 휘장이 흩날리고, 길게 뻗은 철근에 곧추 기댄 회색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하늘로 나아간다. 여린 개나리 빛은 결코 퇴색하는 법이 없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것들은 쉽게 낡삭아버리니, 다시 생명의 힘에 놀란다.
 
10여년 전, 대학을 갓 졸업한 초년병에게 사회는 까닭모를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이었다. 거대한 톱니바퀴의 나사못이 된 것 같은 느낌은 목을 옥죄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롭게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사회 생활에 적합하도록 완전히 재편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밤 근무를 끝내고 눈 덮인 길을 아슴아슴 즈려 밟고 기숙사로 돌아오면, 머릿속은 자갈을 넣고 갈아대는 것처럼 묵직했다. 그 아린 가슴을 시가 위로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쩌면 봤어도, 그것이 노랑제비꽃인지도 몰랐다-노랑제비꽃은 신기하게도 시어로 오랫동안 남아 시린 젊음을 어루만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꽃으로 피는구나/폭설에 나뭇가지는 툭툭 부러지는데/거리마다 침묵의 눈발이 흩날리고/나는 인생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차가운 벽 속에 어머니를 새기며/새벽 하늘 이우는 별빛을 바라보며/나는 사랑하는 인생이 되기로 했다//희망 속에는 언제나 눈물이 있고/겨울이 길면 봄은 더욱 따뜻하리/감옥의 풀잎 위에 앉아 우는 햇살이여/인생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창 밖에는 벼랑에 핀 노랑제비꽃, 살 책이 있어 인터넷 서점에 접속했는데, 얼핏 <풀들의 전략>이란 책이 눈에 띄었다. 반값으로 할인한다는 광고 문구도 그렇고, 내용도 재미있을 것 같아, 망설임 없이 함께 주문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다 읽으면 읽어야지 밀쳐두었다가, 이상하게도 해질녘에 본 그 개나리 탓인지 자꾸만 10여년 전 노랑제비꽃이 생각나, 혹시 제비꽃이 있나 뒤적거렸더니, 첫 장이 제비꽃의 생존 전략이다.

제비꽃의 씨앗에는 엘라이오솜이라는 물질이 붙어있는데, 이것을 개미가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 덕에 제비꽃 씨앗은 개미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도시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틈에서도 피어날 수 있단다. 더 신기한 것은 제비꽃 뒤에는 꿀주머니라는 긴 돌기가 붙어있는데, 벌만이  혀를 길게 늘일 수 있어 그 끝에 놓인 꿀을 먹는다고 한다.  벌이 뾰족한 주둥이를 밀어넣으면, 그 때 암술이 벌어지면서 꽃가루가 벌에 내려앉아 번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를 해도 꿀벌이 지나치면 제비꽃은 그 때부터는 차선의 전략을 구사하는데, 바로 꽃망울만 맺고 꽃을 피우지 않은 채 스스로 수술이 암술에 직접 닿도록 가루받이를 해서라도 번식을 이어나간다고 한다. 당차게 생명을 이어나가는 제비꽃의 숭고한 전략 앞에서 순간 숙연해졌다.

주어진 환경이, 살갗으로 닿는 삶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먼저 손 내밀어 환경을 사랑하고, 생명을 누리는 제비꽃. 태초에 만들어진 그 빛깔 그대로 수억 년을 부활하면서 변함없이 오늘도 피어 바람에 살랑이는 개나리.

물러서지 않는 노랑빛들이 묻는다. 겨우 10여 년이 지난 지금...지금, 너는 무슨 빛깔인가 하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 #보건교육 #보건교과 #학교보건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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