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설, 정조에 대한 아쉬움과 염원의 반영"

[인터뷰] 안대회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등록 2009.06.04 16:41수정 2009.06.04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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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18일 진행된 <정조어찰첩> 출간 기자간담회. 가운데가 안대회 교수. ⓒ 성균관대출판부


"(정조가) 독살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혜경궁 홍씨가 세자 손을 잡고 들어가서 정조 죽음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혜경궁 홍씨는 10살 때 궁궐에 들어와서 사도세자 죽음도 보았고 영조 죽음도 보았고 정조가 암살당하려고 했던 것도 봤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한중록>에 보면 심환지나 정순왕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이 암살할 기미가 있었다면 혜경궁 홍씨가 몰랐을까? 독살이 사실이라면 <한중록>에 썼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 2월,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정적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 있던 '정조 독살설'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주류 역사학자들은 공개된 어찰을 두고 "정조는 독살이 아니라 병사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고,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던 이들은 '둘이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독살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이렇듯 '정조 독살설'과 관련된 학계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정조 어찰 번역과 연구에 참여한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최근 계간 <역사비평> 여름호(87호)에 '어찰의 정치학-정조와 심환지'란 논문을 게재하며 다시 한 번 '정조 독살설'을 둘러싼 논란에 불이 붙었다.

5월말 서울 종로구 혜화동 성균관대학교 퇴계인문관 교수 연구실에서 만난 안대회 교수는 공개된 어찰이 "정조가 독살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줄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라고 본다"며 "심환지와 벽파는 가장 중요한 정치 당파 중 하나였고, 정조는 각 당파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면서 그들을 교대로 또는 동시에 활용해서 국정을 꾸려나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국왕과 노론 벽파는 그 당시를 놓고 보자면 협력 관계였다"고 덧붙였다.

"오회연교는 뭉쳐야 한다는 대통합 이야기한 것"

특히 안대회 교수는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오회연교(五晦筵敎- 정조가 5월 그믐날 경연에서 내린 교시)'는 이덕일씨 등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안 교수는 "기존 시각은 오회연교를 남인을 크게 등용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돼 왔다"며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오회연교는) 노론 벽파를 실각시키고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증거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오히려 오회연교가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대통합 이야기를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가장 크게 제기하는 의문은 '정순왕후만 있는 상태에서 곡소리가 났'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안대회 교수는 "정순왕후가 정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지만, 여자 혼자서 그것도 노인네가 문 밖에 대신들이 모두 있는데 죽이려고 목을 누르거나 약을 먹이거나 할 수 있겠느냐"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다음은 안대회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 내용.

- 정조 어찰 공개 후 많은 언론은 '정조 독살설'이 힘을 잃게 되었다고 했다. 정조가 노론 영수인 심환지와 자주 편지를 교환했다고 해서 측근이라거나 독살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처음에 '독살설은 정조와 심환지의 관계가 극도로 나쁘다'라는 전제 하에 만들어진 것이다. 자료가 공개되기 전까지 독살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찰이) 정조가 독살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 줄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라고 본다. 심환지와 벽파는 가장 중요한 정치 당파 중 하나였다. 정조는 각 당파의 정체성을 인정해 주면서 그들을 교대로 또는 동시에 활용해서 국정을 꾸려나갔다. 국왕과 노론 벽파는 그 당시를 놓고 보자면 협력 관계였다."

"독살했다면, 혜경궁 홍씨가 몰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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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책으로 나온 <정조어찰첩> ⓒ 성균관대출판부

- 정순왕후나 노론이 독살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실록에 이 장면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죽기 며칠 전에는 의식까지 잃는다. 신료들은 정조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껴 다 대기하고 있었다. 죽기 얼마 전에 독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더라도 그냥 지켜봤다고 보는 것이 맞다. 어차피 죽을 테니까. 독살이라는 것은 남에게 들키면 그 후에 올 파장이 엄청나다. 자기 혼자 죽는 문제가 아니다. 정순왕후가 정조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지만, 여자 혼자서, 그것도 노인네가, 문 밖에 대신들이 다 있는데 죽이려고 목을 누르거나 약을 먹일 수 있을까? 가장 말이 안 되는 정황이다.

독살로 내세우는 연훈방(수은 연기를 쐬는 치료법)은 정조가 원했던 것이다. 수은 연기를 쐰다고 해서 다 죽은 것은 아니다. 효과를 볼 수도 있다고 한다. 그걸 가지고 독살이라고 할 수 없다.

독살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혜경궁 홍씨가 세자 손을 잡고 들어가서 정조 죽음을 확인한 것이다. 혜경궁 홍씨는 열 살 때 궁궐에 들어와서 사도세자 죽음도 보았고, 영조 죽음도 보았고, 정조를 암살하려고 했던 것도 봤고,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한중록>에 보면 심환지나 정순왕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이 암살할 기미가 있었다면 혜경궁 홍씨가 몰랐을까? 독살이 사실이라면 그 내용을 <한중록>에 썼을 가능성이 높다."

- 정조는 의학에 해박해서 스스로 약을 짓기도 하고, 어의가 짓는 약을 거부하기도 했다. 독살 위협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워낙 해박한 분이라 본인이 지속적으로 치료를 했고, 쓸 만한 처방은 경과를 보면서 다 해 봤다. 민간 의사를 데려와서 종기 치료를 하기도 했다. 어의를 신뢰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당시 의료 수준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 그 당시 백성들 사이에 독살설이 널리 퍼졌다고 하는데.
"영남 남인은 정조에 대해서도 각별한 부분이 있었다. 독살 이야기는 영남 남인 쪽에서 나왔지, 서울이나 다른 쪽에서는 안 나왔다. 백성들 사이에 많이 퍼져 있었다는 것은 확대 해석이다. 독살설에는 정조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기도 하다. 만약 정조가 20년만 더 살았다면 19세기 말에 국운이 그런 정도로 급전직락해서 일본 치하에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정조가 병으로 고생하다 죽었다는 것보다는 '정조는 민족의 염원을 저버린 심환지와 정순왕후 같은 나쁜 사람에게 독살당했어'라고 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받은 면이 있다. 나도 차라리 그렇게 됐으면 낫겠다 싶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꿈이지 역사의 사실은 아니다."

"정약용, 정조 사망 관련 정보 파악할 위치 아니었다"

-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이 독살설의 근거라고 제시하는 '오회연교'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고 들었다.
"오회연교는 정조가 사망하기 한 달 전인 5월 그믐, 경연 석상에서 길고 장황하게 자기 소신을 밝힌 내용이다. 기존 시각은 오회연교를, 노론 시파와 벽파 사이의 균형 속에서 노론 벽파 쪽에 치우쳐 있었다가, 앞으로는 남인을 크게 등용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봐도 노론 벽파를 실각시키고 남인을 등용하겠다는 증거로 볼 수가 없다. 모두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대통합 이야기를 한 것이다. 노론 벽파를 물리치려고 한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히려 노론 벽파를 기용하겠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오회연교로 독살 정황이 무르익은 것처럼 해석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독살설의 가장 중요한 전제가 잘못된 것을 보여준다."

- 다산 정약용에 의하면, 정조가 6월 그믐 경연에서 다시 볼 거라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자신이 죽을 것을 예상 못한 것이 아닌가? 다산은 정조가 독살되었다고 했다는데.
"정조가 지병을 오래도록 앓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 이거 가지고 죽을까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13일까지도 시를 써서 심환지와 이서구에게 보내고 답시를 쓰라고 했다. 만약 자기가 곧 죽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면 그렇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약용은 당시 정보가 상대적으로 약했다. 정조 사후 정조 사망과 관련한 중요한 정보를 상세하게 파악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 정조가 정치적으로는 노론, 소론, 남인이 다 필요했지만,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노론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당파다. 언젠가는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노론 청류가 사도세자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정조를 위협하는 세력이었지만, 살해 위협을 이후에도 계속 가했는지는 명확한 증거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노록쪽에 있는 김종수만 하더라도 위협 세력이었지만, 오히려 정조 치세 동안 막중한 역할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정조는 위협 세력도 계속 곁에 두면서 중요한 일을 맡겼다."

"정조, 개혁 시도했지만 기득권에 의지해"

지난 5월18일 진행된 <정조 어찰첩> 발간 기자간담회 모습. ⓒ 성균관대출판부


- 국사 교과서는 정조를 훌륭한 개혁군주라고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독재군주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소외된 세력을 등용하려고 했던 부분, 사회 하층부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점, 화성을 건설해 국가의 기본 틀을 바꾸려고 노력했던 부분, 경제 등 여러 부분을 향상시키려 했던 면 등에서 개혁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분의 기본 노선은 주자학이다. 기득권을 제한하려고 했지만 노론 쪽을 버리지 못하고 크게 의지한 것을 보면, 반드시 개혁 군주라고 볼 수 없는 면도 있다. 학계에 양쪽 주장이 공존하는 것은 정조가 두 측면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 정조는 문체를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되돌리려는 문체반정을 시도했다. 패관소품을 쓰는 노론 자제들에게도 제재를 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서 소품을 강의하는 연구자로서 견해는?
"한문 산문의 기본은 옛날 스타일의 글, 고문(古文)이다. 소품은 요즘말로 가벼운 수필이다. 고문에 비해 자유롭고, 소재의 폭이 넓으며, 자기 개성을 드러낸다. 그게 정조 시대의 문체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문체반정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내고 있다. 문체반정은 문체를 순정하고 올바른 것으로 돌리자는 것이다. 당시에 소품문이 널리 성행했는데, 소품은 정조가 보기에 너무나 기본 형식을 어기고 있고 문장에서 쓰지 말아야 할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정조는 볼 것도 없이 문장 개혁을 막으려고 한 보수주의자이다. 하지만 이것은 목적이 들어가 있었다.

문체반정은 남인인 이가환 때문에 일어났다. 정조가 억눌려 있던 남인을 하나의 정치 집단으로 만들어줬는데, 좋지 못한 문체를 쓴다고 비판을 받아 이가환이 실각할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이가환이 그런 문체를 쓰는 사람은 맞지만, 너희도 그러하니 전부 다 문체 고치라며 전선을 확 넓혀 버린 것이다. 거기에 걸려 들어간 것이 노론뿐만 아니라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등이다. 문체반정의 깊은 속내는 굉장히 정치적인 것이다."

- 정조 어찰 발견 과정과 주요 내용은?
"정조 어찰은 2년 전, 한 소장자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찾아서, 1년 반 동안 탈초와 번역의 과정을 거쳐 얼마 전에 공개한 것이다. 왕이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 편지인데 인사 문제에 관한 교감, 정보 수집, 여론 동향, 관직과 관련된 의사 전달, 상소와 관련한 내용 등이 담겨있다. 어찰 내용은 실록, 일성록 등의 공식 기록과 소재는 같지만, 보는 시각이나 구체적 내용 등 디테일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실록에서는 심환지 본인의 의사로 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정조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임이 어찰을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정조어찰 #정조 독살설 #오회연교 #안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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