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길·죽는 길②] 노무현은 죽지 않았다

그는 대붕이 되어 창공을 날고 있다

등록 2009.06.11 10:04수정 2009.06.1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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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1일, 유시민은 언명했다.

비감한 표정이었다.

 

- 노무현 대통령을 조롱하는 게 국민스포츠가 되었다.

 

모든 것은 노무현 때문이다

 

과장이 아니다. 사실이었다. 모든 것은 노무현 때문이라 했다. 심지어는 생리불순도, 타려던 차를 놓쳐도,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져도, 감기에 걸려도, 안경다리가 부러져도, 모두가 노무현 때문이라는 우스개가 돌아다닐 정도였다. 명색 대통령이 국민적 조롱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노무현을 조롱했다. 조롱하지 마라 하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라 했다. 그러나 비판이 아니었다. 명백한 조롱이었다. 너도나도 조롱했다. 사상 초유의 거대한 '이지메(집단 괴롭힘)'. 그 대열에서 빠지면 큰 탈이라도 날 것처럼 사람들은 서둘러 그 대열에 합류했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 무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국민적 합의사항이었다. 여, 야, 좌, 우의 구분도 없었다. 모두가 노무현은 무능하기 때문에 조롱받아 마땅하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거짓말이었다. 괜한 핑계였고, 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조롱은 그의 후보 시절부터였기 때문이다. 명색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인데, 민주당 안의 역학관계는 비노와 반노가 절대다수였고, 친노는 극소수였다.

 

마침내는 후보단일화협의회(후단협)니 하는 본격적인 반노 단체가 만들어졌고, 아예 이회창당이나 정몽준당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 사람들마저 생겼다. 이회창이, 또는 정몽준이 건네주는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활짝 웃는 얼굴로 이회창을, 또는 정몽준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하겠다고들 했다. 그래서 무수한 신종 철새들이 태어났다. 대한민국 정치인의 비속하고 누추한 본색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그 풍경은 노무현을 후보로 모실 수 없다는, 더 나아가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봐줄 수 없다는 명시적 표현이었다. 가관이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자부터 이번에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완강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최고권력자인 대통령 자리에 노무현이 앉아 있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에 대한 조롱은 더 극렬해졌다. 하도 극렬해지다 보니, 자해라도 감행할 판이었고, 그래서 사실 자해를 감행했다. 탄핵. 노무현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쯤이 지난 2004년 3월이었는데, 대한민국 국회가 제시한 탄핵 사유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노무현은 줄곧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여 국법질서를 문란케 하고 있다.

둘째. 자신과 측근들, 그리고 참모들이 국정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적, 법적 정당성을 상실했다.

셋째. 낮은 성장률에 머물러 있는 점에서 드러나듯이 국민경제와 국정을 파탄시켜

        민생을 도탄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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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12일 당시 박관용 국회의장이 탄핵동의안 통과를 선언하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안건을 던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2004년 3월 12일 당시 박관용 국회의장이 탄핵동의안 통과를 선언하자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안건을 던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당시 탄핵을 주도했던 세력들마저 그 사유들이 너무나도 미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다 하는 모사들을 불러 모아, 뭐 더 없어 하고, 머리를 쥐어짜댔다. 그래봤자였다. 괜한 트집거리밖에는 더 갖다 붙일 것이 없었다. 그래서 머릿수를 믿고 그대로 밀어붙이기로 했다는 이 세 가지 탄핵 사유가,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쯤이 지나갔을 때, 새삼스레 다시 인터넷 공간을 떠돌며, 이 정도가 탄핵 사유라면 이명박은 아예 사형감이네 하는 야유가 빗발치게 되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가 이미 법리적으로 해석해 보여준 그대로, 그 사유들은 역시 어쩐지, 괜히, 그냥 기분 나빠 보이기나 하는 노무현을 물어뜯어 내쫒기 위해 꾸며낸 구차한 핑계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무현이 취임하기 전부터 탄핵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여, 실제 탄핵하기까지 1년 동안, 한나라당에 의해 탄핵이 거론된 것만 해도 여든 몇 차례라는 통계 아닌 통계가 있었으니까 말이다.

 

무한 광고효과

 

어쨌거나 결과는 너무나도 엄연했다. 너도나도 노무현을 조롱했다. 누구를 조롱할 것 같지 않은, 적어도 그 사람만은 노무현을 조롱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그런 사람들마저 입을 열어 노무현을 조롱했다. 그것이 대세였다. 그러다 보니, 무슨 돌림병에 휩쓸리듯이, 무작정 따라가는 사람들마저 생겨, 마침내 국민스포츠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현상이었다.

 

광고는 소비자들의 세뇌를 목표로 한다. 잠재의식을 파고드는 광고효과(Subliminal Advertising Effects)는, 광고를 되풀이하여 소비자들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소비자들이 그런 물건을 필요로 하게 되었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자기네 상품을 연상하게 하는 광고기술이다. 그래서 제조사에서는 비싼 비용 지출해가며 광고를 되풀이한다.

 

그런데 노무현 치세 시절에 모든 신문에는 노무현에 대한 조롱이 빠지는 날이 없었다 할 만큼 되풀이되었다. 이번 검찰 조사 때, 노무현을 기어코 관제피의자로 만든 언론 보도는 오히려 약과라 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융단 폭격이었다. 사람들은 세뇌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대세였다. 아, 노무현은 무능하고나. 아, 노무현은 조롱거리가 되어 마땅하고나. 그래서 마침내는 노무현 지지자들까지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 시절 풍경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마법에 걸리게 되었고, 노무현은 국민적 왕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중동 프레임의 최대 걸작이었다. 노무현 곁에 남아 있는 것은 극소수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그의 귀향 환영회에서 그 극소수의 환영을 받으며, 정말 기쁜 얼굴로 인사한 다음, 마지막에 외쳤다.

 

- 이야, 기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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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씨와 함께 지난 2008년 2월 25일 오후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 도착해 지역주민, 전 각료, 노사모 회원들이 주최한 귀향 환영행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 이종호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인 권양숙씨와 함께 지난 2008년 2월 25일 오후 고향인 김해 봉하마을에 도착해 지역주민, 전 각료, 노사모 회원들이 주최한 귀향 환영행사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 이종호

10년 넘게 노무현과 함께 했다는 그의 어느 측근은 말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노무현의 표정이 그 시간만큼 힘차게 밝았던 적이 없다고. 버겁기 그지없던 굴레로부터 마침내 벗어났다는 홀가분함.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노무현은 꾸민 게 아니었다. 그는 꾸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밀짚모자 쓰고 자전거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며 진심으로 귀향을 즐겼고, 고향 사람들과 어울려 이장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다섯 살짜리 손녀와 함께 동네 가게에 들려 쭈쭈바를 사 먹기도 했고, 손녀 앞에서 망토를 휘날리는 슈퍼맨 흉내를 내보이기도 했다. KBS <다큐멘타리 3일> PD가 행복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 예, 행복합니다

 

순직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는 PD를 향해 안녕히 가세요, 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한 다음, 어두운 길을 걸어 자기 집 쪽으로 사라져갔다. 2008년 5월, 귀향 뒤 석 달쯤이 지났을 때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7월에 들어서면서, 청와대가 정부기록물 유출혐의로 노무현 측을 검찰에 고발했고, 곧 이어 국세청에서 이례적으로 태광실업에 대규모 세무조사팀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운명적 내리막길 들머리였다. 그 다음 여러 달 동안 노무현은 발기발기 찢어발겨졌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내몰렸다.

 

- 운명이다.

 

그의 유서 마지막 행이었다.

그보다 더 담담하기 어려운 클로징 멘트였다.

그보다 더 담담한 유서가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고, 있기 어려울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그날 새벽, 그 바위 위에 올라가, 몸을 날렸다.

그게 끝이었고, 시작이었다.

 

그랬다.

일찍이 한번도 없었던,

실로 거센 시작이었다.

 

봉하로! 봉하로!

 

역사상 최초로 대규모 팬클럽을 가진 정치인이 되었고, 역사상 최초로 호남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영남 사람이 되었고, 역사상 최초로 비주류 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모든 권력을 포기했고, 역사상 최초로 주류 언론과 전쟁을 벌였고, 역사상 최초로 검사들에게 공개된 장소에서 능멸당했고, 역사상 최초로 탄핵당했고, 역사상 최초로 의회권력을 탈환했고, 역사상 최초로 여성총리와 헌법재판관을 탄생시켰고, 역사상 최초로 퇴임 후 귀향했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역사상 최초로 온가족이 검찰에 소환당해야 했던 노무현이 대통령을 지낸 사람으로서는 역사상 최초로 자결했다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대개의 사람들이 느낀 공통적 증세는 둔기로 뒤통수를 느닷없이 가격당한 듯한 멍청함이었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뭔가 일이 터지기는 터진 듯한데, 실감되는 것은 없었다. 우선은 그랬다. 사람들은 현실감 획득을 위해 방송과 인터넷을 바삐 오갔다.

 

 각 신문 인터넷판의 초기 보도는 '노무현 사망'이었다. 간단한 보도였다. '여운계 별세'와 '노무현 사망'이 병치되어 있었다. 그 단신이 그럴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여배우의 죽음은 '별세'였고, 전직 대통령의 죽음은 '사망'이었다.

 

'사망'이 '서거'로 가장 빨리 바뀐 것은 조선일보였고 가장 늦은 것은 동아일보였다. 그때쯤부터 각 신문 기사의 크기가 커지기 시작했고, 꼭지수가 늘어갔으며, 각 방송은 마침내 특집 체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거국적 조문 국면의 역동적 전개였다. 상황은 시시각각 증폭되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판이 그토록 커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온나라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한 곳, 봉하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봉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마침 토요일이었다. 주말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월요일이 되면서 봉하를 향해 걷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다. 한꺼번에 100명씩, 절을 하면 시간이 걸리니까 묵념으로 대신하여 시간을 절약하는데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너더댓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기다려 조문하는 시간은 겨우 1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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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4일 낮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조문객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분향소에서 1km 이상 떨어져 있는 마을 삼거리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지난 5월 24일 낮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조문객들이 조문을 하기 위해 분향소에서 1km 이상 떨어져 있는 마을 삼거리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더불어 실로 신묘하기 짝이 없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검찰에 의해 아예 곤죽이 되어버린 노무현은 이제 그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게끔 사라졌다. 모든 사람들, 모든 언론들은 오로지 그의 긍정적인 면모만 이야기했다. 그를 야유하고 비난하고 아예 짓이기려들기나 하던 한나라당이나 청와대 사람들, 그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뒤, 혹시 흙물이 튀기기라도 할세라 몸을 사리던 민주당 사람들, 그리고 그에 대해 최선을 다해 비판적이던 지식인들, 하나같이 그의 유덕을 기리는 쪽이 되었다.

 

노무현을 야멸차게 물어뜯어대던 것은 이른바 조중동만은 아니었다. 조중동을 척결대상으로 삼고 있는 이들(진실을 알리는 시민모임)이 자기들 돈으로 사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도 마찬가지였다. 한겨레신문은 '조선·중앙·동아의 '증오'…죽은 권력 물어뜯기로 지면 도배'(한겨레신문 2009-6-5)나 '상복보다 더 시커먼 조중동K의 속내여'(2009-6-5 한겨레21)라는 기사를 통해 조중동을 한껏 야유하며 두들겨 팼지만, 현재 인터넷 도처에서 읽을 수 있는 '한겨레를 죽여라'라든가 '노무현을 죽인 한겨레' 같은 글들이 구체적 대비 자료를 곁들여 지적하고 있는 꼭 그대로, 한겨레신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른바 진보나 정의를 표나게 표방하는 한겨레신문이었기에 더 지독하게 보였다. 이른바 '조중동 프레임'에 갇혀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참혹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들 신문도 노무현을 야유했던 일부 기사를 재빨리 지우는 재치까지 발휘하면서, 노무현을 칭송하고, 그 유덕을 한껏 기리는 쪽에 섰다.

 

수미일관, 지난날이나 마찬가지로 노무현을 물어뜯는 김동길이나 조갑제나 지만원, 또는 거 뭐야, 변희재라던가 하는, 그런 부류들의 굳건한 지조가 오히려 돋보일 정도였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노무현을 어떻게든 물어뜯고, 노무현과 어떻게든 금 그으려 들던 사람들이 갑자기 노무현을 칭송하고, 그 유덕을 기리는 쪽이 되니까, 민망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노무현이 봉하에 자리를 잡자마자, 정부기록물 유출인가, 반출인가 하는 죄목을 씌운 것부터, 물론 노무현 일족 씨 말리기까지, 조목조목 노무현을 괴롭히기나 하던 정부와 청와대와 한나라당 등, 당대의 권세를 거머쥐고 있는 쪽에서는, 연거푸 쫓겨나면서도 조문이라도 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썼고, 유족 측을 설득하여 어떻게든 국민장을 관철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노무현을 '송장'이라 멸칭했던 사람도 이제 죽어 정말 '송장'이 된 노무현을 찾아가 눈물을 흘렸고, 노무현과는 가는 길이 다르다고 호기 있게 외쳤던 사람도 노무현의 영전에 엎드려 그 유덕을 크게 기렸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세였다. 너도나도 봉하를 향해 걸었고, 봉하에 우선 갈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전국에 300여 곳이나 설치되었다는 분향소를 찾아 조문했다. 국민장이 거행되는 7일 동안 봉하를 찾은 사람들이 100만, 전국적으로 500만이 노무현의 영전에 국화를 바치고 향을 피웠다.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은 순리였다.

노무현은 말한 적이 있다.

 

- 패배를 받아들여야 민주주의가 이뤄진다고 항상 얘기해왔습니다. 산간 지역은 물론 평지에서도 강은 반드시 똑바로 흐르지 않습니다. 굽이치고 좌우 물길을 바꾸어 가면서 흐릅니다. 세상사는 이치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강도 똑바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강도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봉하는 바다였다. 모든 강물 줄기를 받아들여 아우르는 거대한 바다였다. 적어도 그 며칠 동안에는 그랬다. 그리고 아마도 적어도 당분간은, 또는 상당 기간은 봉하는 바다가 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상식과 진실에 추동된 순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리의 계절은 마침내 끝나고 순리의 시대가 도래했으며, 더불어 노무현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노무현은 죽지 않았다.

그의 생애, 그 어느 때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어떤 이에게는 적으로.

어떤 이에게는 동지로.

그는 지금 한창 바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의 이른바 운명이다.

2009.06.11 10:04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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