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색의 귀환과 빈곤의 강화, 공포의 축제

신종 공포정치의 서막

등록 2009.06.12 11:02수정 2009.06.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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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생긴 이래 권력은 항상 공포를 이용해 대중 다수를 통제해 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고, 초자연적이고 주술적인 공포를 이용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보편적인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 구원과 처벌이라는 허구로 인간을 다스리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공포와의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인간은 자신을 위협하는 그 어떤 무시무시한 것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듯이, 인간을 괴롭히던 그러한 공포들은 죄다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무지와 왜곡된 마음 때문이지, 실제 자연적 공포나 초자연적 공포 혹은 사후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현대가 되면서, 인간은 과학적으로 자연을 보게 되었다. 즉 자연이 살아서 우리에게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식의 인격을 갖춘 존재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객관적이며 수학적으로 파악하였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사물(things)의 질서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은 계산과 예측이 가능한 그냥 사물들의 배열이고 관계일 뿐이다. 물론 자연은 아직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무시무시한 피해를 준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자연에 어떤 죄를 저질러서가 아니라, 어떤 질서의 변화를 아직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 기인할 뿐이다. 자연의 공포는 우리의 죄나 부도덕이나 사악함에 대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단지 재해이고 재난일 뿐이다. 자연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게 되자,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공포를 물리칠 수 있게 된 것이다(이 물(勿)-공포가 우리를 더 파멸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어떤 점에서 과학적 지식의 진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공포를 이용한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연이나 초자연적 혹은 사후세계를 운운해서는 더 이상 공포감을 줄 수 없고, 유식하고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시키는 대로 복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는 새로운 형태의, 더 많은 종류의 공포를 탄생시켰다. 다른 인종에 대한 공포, 다른 국가에 대한 공포, 다른 계급에 대한 공포, 다른 인간에 대한 공포, . . . 이들은 모두가 적에 대한 공포이며, 이는 다름아닌 차이에 대한 공포이다. 차이에 대한 공포는 우리를 자기중심적으로 고립하게 하고, 불화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불편해 하는 우리의 삶은 항상 불안하고 무섭다.

 

현대 산업사회는 인간이 살면서 필요한 물건만 대량 생산한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빈곤에 대한 공포 역시 대량생산하였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가 백화점 쇼윈도의 휘황찬란한 상품들의 퍼레이드 가운데 대기 전체에 퍼져 있다. 이 공포 덕분에 우리는 하루 10시간 이상 기계처럼 일한다. 일이 보장해주는 먹을 것 때문에 공포가 사라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잠시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상하게도 고된 노동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 편하게 쉬는 것이 오히려 불안하고 무섭다.

 

이 뿐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인류는 핵의 공포, 범죄의 공포, 미국 발 테러의 공포(즉 테러의 테러)에 휩싸여 있다.

 

과학이 진보하고 현대적 생산방식이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시킨 지금에도, 여전히 공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금은 초자연적이고 종교적인 공포가 단지 개인적으로만 잔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공포는 대중 다수를 사로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는 공포들 대부분은 여전히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과 특정한 세력의 허구의 산물이다.

 

지난 주 까지만 해도 우리는 보내기 아까운 지도자를 잃어 비통해 했다. 하지만 국화꽃과 향불의 향이 아직 가시지도 않던 와중에,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애도와 슬픔에 찬물을 끼얹듯 서서히 닥쳐온 두 개의 공포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를 단결하게 하는 공포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는 공포이다. 전자는 핵의 공포,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이데올로기 빨갱이 공포라면, 후자는 바이러스의 공포이다. 이들이 점점 강하게 다가온다.

 

전자는 해방 이후 남한의 태생적 빨갱이 혐오증이 만들어낸 공포이자, 그 이후 군사정권이 가장 심도 있게 창조해 왔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법에 의해 이미 합법화된 형식의 공포이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볼 때 뿔 달린 괴물의 이미지로 수십 년 간 분위기를 조성해 온 관계로 아주 잘 먹히는 공포 중 하나이다. 이들에 관련된 색과 단어들에 대해 반응하는 몇 몇 사람들을 보면 거의 파블로프의 개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공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적을 향해 단결하게 한다. 즉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사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는 오래 전부터 인류를 괴롭혀 온 공포이긴 하지만, 현대의 미디어와 결합이 되어 지금은 가장 막강한 신종 공포가 되었다. 이는 어쩌면 다른 모든 공포의 메타포일 수도 있는 공포이며, 그렇기 때문에 SF 영화라든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공포이기도 하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게도, 이것이 과학적 발견의 산물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우리는 주술가가 말하는 귀신이나 성직자가 말하는 사후세계를 믿지 않을 수는 있지만, 바이러스를 믿지 않을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된 현대에, 과학자나 의사들의 선언을 뿌리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이러스는 다른 공포와는 달리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아니 과학적으로 존재하는 인류의 보편적 공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바이러스 역시 정치 권력의 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권력이 바이러스를 만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발생한 바이러스조차 권력은 정치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바이러스는 가장 훌륭한 통제의 수단이 된다. 바이러스는 우리를 흩어지게 한다. 즉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바이러스는 인간들의 불신과 냉소와 경계의 천연 자연적 조건 같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공포를 부추기는 권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였다. 적이 쳐들어 오면 내가 너희를 지켜 줄게! 네가 다치거나 나쁜 일이 생기면 내가 막아 줄게! 굶어 죽지 않도록 내가 보호해 줄게! 배려와 보호의 이름으로 사람을 무섭게 하면서, 배려와 보호의 필요를 역설하는 권력은 그 자체가 공포였다.

 

제대로 된 어느 부모도 아이에게 두려움을 심어가며 자신의 필요를 역설하지는 않는다. 한국에는 두 가지 고질적인 공포가 있었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빈곤의 공포가 하나이고, 체제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심리화된 붉은 색에 대한 공포가 다른 하나이다. 전자는 줄곧 있어 오다가 최근엔 더 강화가 된 반면, 후자는 한 동안은 잠잠했던 공포이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신종 바이러스라고 하는 또 하나의 생물학적 공포와 아울러, 계속 있어왔던 빈곤의 공포의 강화, 그리고 잠시 사라졌었던 붉은 색의 공포의 귀환, 이 모든 유령들이 다시 떼를 지어 출몰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이제 초자연적, 종교적 공포를 지나, 과학적 공포, 사회적 공포, 이데올로기 공포, 경제적 공포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

 

비통함이 분노로 치닫기도 전에, 어쩌면 가장 견고하게 뭉쳐야 할 이 때, 한 편에서는 분노의 대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고 있는 공포가 북쪽에서 불어오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광장 공포증에 버금가는 위력으로 우리 모두를 각자만의 방안으로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서쪽에서 불어오고 있으며, 우리 내면에서는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빈곤에 대한 공포가 우리를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작업장으로 가도록 채근한다. 모일 수도 없고 흩어질 수도 없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이 삼중구속 하에서 공포에 질려 새파란 입술로 얼어붙을 판이다. 이 세 가지의 다중적 공포가 재료가 되어 앞으로 어떤 작품들이 만들어질지 주목해보자.

2009.06.12 11:02 ⓒ 2009 OhmyNews
#공포 #공포정치 #권력 #바이러스 #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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