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면허증 사진에 '치아 노출 금지'

[해외리포트] 보안 이유로 '중립표정' 강요하는 미국 버지니아

등록 2009.06.17 13:57수정 2009.06.17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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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V 내부. 창구 앞에 보이는 하얀 스크린 앞에서 입을 꼭 다문 채 운전면허증 사진을 찍었다. ⓒ 한나영


"자, 여길 보세요, 이가 보이지 않게 입 다물고요. 웃지 마세요."

지난 1일, 우리 가족은 운전면허증을 갱신하기 위해 버지니아 주의 해리슨버그 교통국(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s)을 찾았다. DMV는 자동차와 관련된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공공기관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만료를 앞둔 면허증을 제시하고 새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창구 직원은 사진부터 찍고 서류를 검토한다고 했다. 전에는 서류를 먼저 제출하고 직원이 이를 검토한 뒤 마지막 절차가 사진 찍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준비된 흰 스크린 앞에 섰을 때 나는 창구 앞에 놓인 카메라를 보고 잠시 웃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가 보이지 않게 입을 다무세요, 웃지도 말고요"라는 창구 직원의 엄명(?)이 떨어졌다. 그러고 보니 전에 읽었던 신문 기사가 떠올랐다.

"버지니아에서는 운전면허 사진을 찍을 때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 안 된다!"

'흠, 이게 바로 그 범인 같이 보이는 사진을 찍으라는 거군.'

어떻게 사진이 찍혔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즉석에서 면허증을 발급해 주던 이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현장에서 면허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오늘 신청한 면허증은 우편으로 배달됩니다. 1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릴 거예요. 이것은 새 면허증이 올 때까지 사용할 수 있는 임시 면허증이에요. 사진이 안 붙어 있으니 신분증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자동차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DMV(해리슨버그) ⓒ 한나영


'첨단 보안' 강화한 버지니아 주의 운전면허 발급절차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 동부의 버지니아 주가 요즘 시끄럽다. 개정된 새 운전면허증의 사진 때문이다. 면허증 가운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중립 표정'(neutral facial expression). 중립 표정이라는 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면 안 되는 '무표정'을 말한다.

바로 이 '중립 표정'을 버지니아 주 정부가 '강요'하고 있다. 보안을 강화하고 신분 도용 및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첨단 기술을 이용한 새 면허증에는 신분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홀로그램과 손으로 만져지는 입체적 문자가 들어간다.

이번 면허증의 특징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사진이다. 과거에는 컬러였던 면허증 사진이 이번에는 흑백으로 바뀌었다. 흑백사진은 컬러사진과는 달리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딴 데로 분산시키지 않아 면허증 사진과 실물을 비교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한다. 또한 이 흑백 사진에는 위조 방지를 위한 레이저도 내장되었다고.

바뀐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면허증을 손에 쥐게 되는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DMV 현장에서 직접 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우편으로만 면허증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왜 우편으로만 받게 한 것일까.

역시 보안과 위조 방지 목적이 크다. 이번에 새로 바뀌게 된 면허증에는 첨단 보안 장치가 들어 있어 이전처럼 각 지역 DMV에서 간단히 만들 수 없다고 한다. 버지니아 주의 경우, 남부에 있는 댄빌 시의 중앙 제작소에서 모든 버지니아 지역의 면허증을 총괄하여 제작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만들어진 면허증은 엉터리 주소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직접 우송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불법으로 면허증을 취득하거나 위조하려는 시도를 없앨 수 있다고 한다.

면허증 갱신을 위해 온 가족이 DMV를 찾았던 지난 1일, 지역 TV 방송인 'WHSV-TV3' 앵커가 새 면허증에 대한 여론 청취를 위해 인터뷰를 요청해 큰딸이 이에 응했다. ⓒ 한나영


"사진 찍을 때 절대 웃지 마"... 왜 버지니아에서만?

현재 실시되고 있는 운전 면허증 교체 작업의 주목적은 신분 도용 및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DMV에서는 새로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의 얼굴과 다른 사람의 사진을 비교할 수 있는 최첨단 소프트웨어를 설치했다.

이 소프트웨어는 새로 찍게 되는 사진이 기존의 사진과 일치하면 신분을 도용하려는 시도로 간주하여 경보음을 보내게 된다. 바로 이 과정에서 "사진 찍을 때 웃으면 안 돼!"라는 희귀한 주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번에 도입된 사진 비교 소프트웨어는 얼굴 표정이 서로 다르거나, 치아를 드러내고 웃을 때 주름이 드러나면 사진을 비교하는 데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한다.

카네기멜론 대학의 로봇공학 교수인 다케오 카나데 교수는 "같은 사람의 사진이라도 얼굴 표정이 서로 다르면 얼굴 인식 소프트웨어가 식별을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지난 3월부터 '미소 금지' 정책을 펴온 버지니아 DMV의 카렌 채펠 부국장 역시 "무표정한 얼굴이 사진 비교를 더 정확하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새로운 면허증을 사용하고 있는 곳은 미국 50개 주 가운데 버지니아, 인디애나, 아칸소, 네바다 4개 주에 불과하다. 하지만 조만간 전국으로 확대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미 시행 중인 인디애나, 아칸소, 네바다 주에서는 약간의 미소는 허용한다고 하는데 유독 버지니아만 입을 꼭 다문 '중립 표정'을 강요하고 있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5월 28일자 인터넷판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관련 기사다.

버지니아 주 매나 사스에 사는 마리아 퀴스페는 새 면허증을 발급받기 위해 DMV를 찾았다. 마리아는 앞으로 8년은 더 갖고 다닐 자신의 면허증 사진이 행복하게 보이길 원했다. 옆에 있던 딸도 "치즈!"라고 말하면서 엄마에게 웃으라고 했다. 하지만 창구 직원은 "오늘은 치즈라고 말하면 안 돼요"라고 하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잠시 뒤 컴퓨터 모니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직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실망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치아가 보여요. 입을 꼭 다물지 않았거든요."

다시 사진을 찍게 된 마리아. 이번에는 충분히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진이 끔찍하게 나왔을 거예요. 이건 뭐 마치 군대에 있는 것 같아요."

<워싱턴포스트>가 실시한 네티즌들의 여론조사 결과. 총 1969 명이 응답한 가운데 절대 다수인 87%가 버지니아 주의 '미소 금지' 사진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 워싱턴포스트


<워싱턴포스트>가 실시한 누리꾼 여론조사에서도 질문에 응한 1969명 가운데 12%만이 보안상의 이유라는 DMV측 주장에 고개를 끄덕였고 절대 다수인 87%는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이들은 조지 오웰이 쓴 소설 <1984년>에 나오는 빅 브라더를 빗대 이번 조처를 '오웰리언'이라는 단어로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댓글도 무려 274개나 달려 면허증 사진 '미소 금지'에 대한 누리꾼들의 부정적인 분위기를 대변했다.

"미친 짓 아냐? 우리를 완전 범죄자로 보이게 하려고 머그샷(mug shot, 범인의 얼굴 사진)을 강요하다니."
"아칸소, 인디애나, 네바다에서는 좀 웃어도 된다는데 왜 버지니아만 까다롭게 굴고 그래?"
"조만간 이 사안은 법정으로 가게 될 거야. 멍청한 짓이라고. 그건 마치 인터넷 공간이 사기 협잡이 난무하니까 정부가 승인한 사이트만 클릭하든지, 아니면 아예 인터넷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야?"
"버지니아를 떠나게 되어 정말 기쁘다. 하지만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옛날 면허증을 가능한 한 오래 가지려고 한다."

새 면허증 보니 정 떨어지네

컬러사진이 붙은 이전 면허증(왼쪽)과 이번에 새로 발급 받은 작은딸의 최첨단 면허증. "입 다물어!" ⓒ 한나영

면허증 갱신 조처를 취한 뒤 정확하게 1주일 만에 새 면허증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범인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사진. 나도 정이 떨어졌다. 한창 피어나는 10대인 두 딸들의 사진은 그런대로 봐줄 만했지만 예전의 활짝 웃는 사진에 비한다면 이 역시 끔찍했다.

빅 브라더의 출현을 보는 것 같았다. 실제로 인터넷에서는 이런 조처를 취한 버지니아 주지사인 민주당의 팀 케인을 비난하며 그를 빅 브라더로 칭하기도 했다.

보안상의 이유로, 또한 신분 도용 및 위조를 방지한다는 이유로 아예 웃음 자체를 금지했던 주 정부. 하지만 이런 조처가 과하다는 여론이 일자 며칠 전 살짝 한걸음 뒤로 빼는 조처를 취했다. 어떻게?

"운전 면허증 사진? 웃어도 된다."
"오, 정말? 얼마큼?"
"쥐꼬리만큼. 모나리자 미소를 기억하는가. 바로 그만큼!"
(치아를 보이면 절대 안 되고 모나리자처럼 입 꼬리만 살짝 올라간 웃음만 허용함)
#미국 버지니아 #운전면허증 #중립표정 #미소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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