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의 '업'... 수많은 혼령들이 돕는 것 같아요"

10년째 한국전쟁 희생자 유해 찾아 헤매는 박선주·박데미 부부

등록 2009.06.29 13:34수정 2009.06.29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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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왕촌 살구쟁이 민간인집단희생사건 유해발굴 작업을 벌이고 있는 박선주-박데미 부부 ⓒ 심규상

 

충남 공주 상왕동 왕촌 살구쟁이 유해 발굴 16일째를 맞은 28일 일요일 오후. 이날은 유해발굴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작업팀에게 휴가가 주어졌다.

 

하지만 박선주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단장(62·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체질인류학)과 그의 부인은 이날도 유해발굴 현장에서 씨름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찜통 더위 속에서도 컨테이너 박스에서 사료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박 단장은 발굴을 시작하자마자 노련한 솜씨로 '왕촌 살구쟁이'에서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를 발굴해 내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 의해 왕촌 살구쟁이 땅 속에 감춰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처참했던 현실로 재현됐다. 

 

공주 왕촌을 비롯해 한국전쟁의 숨겨진 땅 속 역사가 햇빛을 보는 데는 박 교수의 악착같은 집념과 부인의 내조가 숨어 있다. 

 

박선주 단장과 그의 부인 박데미씨.

 

박 단장은 2000년 6·25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처음 시작된 국방부 국군유해발굴사업에 참여해 사실상 유해발굴사업을 이끌었다. 이후 육군유해발굴사업의 책임조사원으로 2007년 8월까지 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야산과 고지를 찾아 헤맸다.

 

"육군본부가 주도해 시작한 일인데 처음엔 계획 자체가 엉성했어요. 계획서를 보니 예산도 쥐꼬리였고, 전문가로 형질 인류학자 1명과 장의사 2명을 세워 놨더라구요. 또 계속 사업이 아니고 일시적인 사업이더군요. 한마디로 준비된 게 거의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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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단장에 의해 드러난 공주 왕촌 집단희생 암매장지 땅 속 진실 ⓒ 심규상

'국군 유해발굴'에서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까지

 

박 단장의 첫 행보는 이 분야 전문가로서 유해발굴단에 다수의 필수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다. 국방부는 결국 박 단장의 거듭된 제안에 해부학 박사, 한국사 및 군사학 전공자, 문헌사학자, 유전자(DNA) 분석학자들을 유해발굴단에 포함시켰다.

 

발굴을 시작했지만 몇 해 동안은 체계와 시스템을 만드는 일에 애를 먹어야 했다. 유해발굴은 물론 발굴 작업에 참여하는 사병들을 일일이 교육시켜야 했다. 국방부와 학계를 쫓아다니며 예산증액과 지속적인 사업 필요성을 알리고 설득하는 일도 자처했다. 고고학을 전공한 장병들을 발굴단에 포함시키는 데도 힘을 쏟았다.

 

국방부는 당초 한시적으로 유해발굴을 하기로 했지만, 매년 수백 구의 유해가 발굴되는 등 성과를 올리자 2003년 육군본부 내 사업전담부서를 두게 됐다. 또 2007년에는 국방부 내에 유해발굴 전문부대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창설했다. 그는 유해발굴 방법과 기법, 유해감식 방법 등을 고스란히 상설독립부대에 전수했다.  

 

하지만 박 단장의 유해발굴사업은 국군유해발굴로 끝나지 않았다.

 

"2007년 초쯤이었을 거예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서 연락이 왔어요. 민간인집단희생사건에 대한 유해감식을 해달라는 것이었죠. 기꺼이 맡겠다고 했죠."

 

이후 그는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단장을 맡아 전국의 민간인집단희생 유해발굴사업을  총지휘해 왔다. 영동 노근리 사건을 비롯해 크고 작은 여러 집단희생사건의 유해발굴작업을 직접 맡기도 했다.

 

"전생의 업... 학교 밖 사회 환원에 큰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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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단장의 부인 박데미씨 ⓒ 심규상

그는 "국군유해발굴사업과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집단희생사건은 서로 다르고 별개인 것 같지만 절대 다르지 않다"고 강조했다.

 

"국군유해발굴사업은 국가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국가가 유한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당연합니다. 민간인집단희생사건은 이념적 대립 과정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해 국가가 나서 이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군이든 민간인이든 국가가 국민에 대한 책임을 사후에라도 해야 하는 것이죠.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잖아요."

 

박 단장은 지난해에는 과로로 쓰러져 심장수술을 받기도 했다. 본업인 대학 강의에다 '한중유해발굴단장'을 맡아 안중근 선생 유해발굴을 위해 중국을 오가고, 배를 타고 40여 분을 가야 하는 진도 갈매기섬 집단희생지 유해발굴사업과 순천 매곡동 여순사건 관련자 유해발굴사업까지 떠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렇게 유해발굴 작업에 몰두하는 것일까?

 

"전생의 '업'(業)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이 더 진하게 와 닿았다.

 

"저는 좌익도 우익도 아닌 학자입니다. 학자로서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죠. 유해발굴사업을 하면서 학문이 학교 안에서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에 환원된다는 데 큰 보람을 느껴요."

 

부인은 무보수 자원활동가 "수많은 혼령이 돕고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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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발굴을 벌이고 있는 충북대 대학원생들이 유해 훼손을 우려해 신발을 벗고 양말만 신은 채 작업을 하고 있다. ⓒ 심규상

그가 가장 고마움을 느끼는 대상은 그의 부인이고 유해발굴 분야 최고 '내조의 여왕' 또한 부인이다.

 

부인 박데미씨는 미국에서 생활하다 순전히 유해발굴사업에 매달리고 있는 남편이 걱정돼 귀국했다. 지난 2002년부터 박씨는 남편의 유해발굴사업 현장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고 있다.

 

"2000년 초 무렵 와서 남편의 하루 일과를 보니 아침나절에 강원도 화천으로 유해 발굴하러 갔다가 점심 무렵 학교로 출발해 오후 6시까지 수업을 하더라구요. 이 생활을 매년 하는 거예요. 남편 건강이 걱정돼 따라다니다 보니 발목이 잡혔다고나 할까요(웃음)."

 

부인 박씨가 하는 일은 많다. 매일매일 유해발굴 현장 사진을 찍고 정리, 분류하는 일부터 동영상 촬영에, 운전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유해발굴분야 무보수 자원활동가다.

 

남편이 하는 일에 불만은 없을까?

 

"힘들고 걱정되지만 '업'(業)이라고 생각하고 하는데 어쩌겠어요. 도울 수밖에요. 다행스러운 것은 남편이 유해발굴사업을 벌이는 동안 집안 일이 잘 풀리고 전국을 누비고 다니는데도 그동안 조그마한 사고 한번 난 적이 없어요. 좋은 일 하니까 수많은 혼령들이 돕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참고로 그의 큰 딸은 부시정부 집권 당시 미 백악관 인사담당관을 역임했고, 둘째는 현재 중앙아시아 북부에 위치한 키르기즈스탄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 중이다.

 

박 단장은 이달 초 왕촌 유해발굴 개토제 인사말을 통해 진실화해위의 민간인집단희생자에 대한 유해발굴 사업이 올해를 끝으로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과 관련, '매우 유감'이라며 이례적으로 쓴 소리를 한 바 있다.

 

"유해발굴, 군과 민간 공동으로 하자... 자치단체도 역할분담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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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단장 ⓒ 심규상

이와 관련, 박 단장은 지속적인 유해발굴사업을 위한 몇 가지 해법을 내놓기도 했다.

 

"민간인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을 국방부가 함께 했으면 좋겠습니다. 예를 들면 육군에서 국군유해발굴하는 병력을 민간인유해발굴사업에 보내서 민간에서 지역조사사업을 맡고 국방부는 유해발굴을 맡자는 겁니다. 같은 방식으로 국군유해발굴사업에도 민간인이 참여해 조사사업을 돕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유해감식기관은 독립시켜서 민과 군이 같이 이용하면 됩니다. 군과 민이 공동발굴을 사업의 효율성도 높이고 일을 하면서 서로 화해의 분위기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지방자치단체의 역할분담 필요성도 제안했다.

 

"앞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정하게 유해발굴사업을 분담해 줬으면 합니다. 국가가 나서 역사의 한 단면을 인정하고 열어 놓았으니 이제 지방자치단체가 이 사업을 이어받아 긍극적으로 화합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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