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카파' 번역도 없고, 찾는 손과 눈도 없고

[헌책방 책시렁에 숨은 책 42] '로버트 카파' 사진책 번역과 〈문화당서점〉

등록 2009.07.12 10:26수정 2009.07.12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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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해뜸'이라는 출판사에서 1987년에 처음 나왔고, 조선일보사 사진국장 민영식 님이 우리 말로 옮겼습니다. '해뜸'이라는 출판사를 잊거나 모르는 사람이 꽤 많은데, '해뜸'은 이 나라에서 사진책을 뜻있게 펴내고자 태어난 곳입니다. 사진하는 사람 많고 값비싼 사진기 장만하는 사람 많으나, 정작 사진길을 열거나 이끄는 사진책을 내는 출판사는 아주 드물 뿐더러, 애써 빛고운 책을 내놓아도 제대로 팔리지 못하고 옳게 읽히지도 못하는 줄 느끼고 있던 윤주심 님이 《뿌리깊은 나무》 일을 그만두게 된 뒤(1980년에 전두환이 잡지를 못 찍게 막아) 사진문화 밑거름이 다져지기를 꿈꾸며 땀과 눈물과 돈을 바친, 나라안에 몇 안 되는 사진책 전문 출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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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파 사진책들 ⓒ 최종규

로버트 카파 사진책들 ⓒ 최종규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는 1997년에 마지막으로 더 찍은 뒤로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다 2006년에 '필맥'이라는 출판사에서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옵니다. 이제부터는 판이 끊어지는 일이 없을까 궁금하지만, 먼 뒷날 또다시 판이 끊어지더라도 틀림없이 되살려낼 손길이 있으리라 믿으며, 다문 한 사람이라도 이 책에 담긴 열매를 제 삶으로 삭일 수 있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버트 카파가 손수 글을 쓴 책 하나는 나라안에 옮겨져 있으나, 로버트 카파가 손수 사진을 찍고 동생 '코넬 카파'가 엮은 책은 어느 하나도 나라안에 옮겨져 있지 않습니다. 영어판, 또는 일어판이 있을 뿐입니다. 영어판이나 일어판 또한 새책방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서울 혜화동에 자리한 인문예술책방 〈이음아트〉에는 한 권쯤 갖추어 놓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나라안에 옮겨지지 않는 '로버트 카파' 사진책을 찾으러 헌책방을 찾아갑니다. 저한테 돈이 넘치고 쌓였다면 유럽으로든 미국으로든 비행기 타고 날아가 로버트 카파 사진책과 코넬 카파 사진책을 한 가득 사서 돌아오겠지만, 저로서는 비행기삯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헌책방마실을 합니다.

 

 생각해 보면, 로버트 카파 사진책은 뜻과 생각만 있다 하여 옮겨낼 수 없는 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넉넉히 있어야 할 테니까요. 왜냐하면 판권을 따내는 데에 돈을 치르고 책을 엮고 찍는 데에도 돈을 써야 하지만, 이런 책이 애써 옮겨졌다 하여도 즐거이 사 읽을 사람은 그리 안 많을 테니, 책 팔아 돈벌기가 어렵잖아요. 책 만드는 이들이 먹고살자면 '한국에서 로버트 카파 사진책을 옮겨내면서 밥굶을 다짐'이 되어야 하니까, 먹고살 돈을 어느 만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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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2003년 어느 날, 서울 명지대 옆에 있던(이제는 문닫고 사라진) 헌책방 〈문우당〉에서 《ロバ-ト キャパ寫眞集 フォトグラフス》(文藝春秋,1988)를 찾았습니다. 복사판으로 실린 사진이 아닌 종이에 알뜰히 새겨진 사진으로 보는 맛은 남달랐고, 헌책방 골마루 구석에 쭈그려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태 뒤인 2005년,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고서점〉에서는 《Image of war》(ダウィッド社,1974)를 만났습니다. 반가운 책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이야, 이런 사진책도 있었구나! 일본은 로버트 카파 사진책을 이렇게 여러 가지로 펴내고 있구나! 어쩌면 로버트 카파 다른 사진책도 일본말로 옮겨 놓았겠지? 나한테 누군가 비행기삯을 대어 준다면 일본으로 가 보고 싶구나! 헌책방동네인 간다(新田)를 누비고 싶구나! 일본사람들은 로버트 카파 사진을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궁금하구나!' 다시 이태 뒤인 2007년, 서울 연신내에 자리한 헌책방 〈문화당서점〉에서 《Cornell Capa Photographs》(Bulfinch,1992)와 《Robert Capa-Children of war, children of peace》(Bulfinch,1991)라는 사진책 두 가지를 만납니다. 이번에는 일본 옮김판이 아닌 캐나다에서 영어로 찍은 판입니다. 일본판을 만났을 때에도 사진만 보았지만 영어판을 만난 때에도 사진만 봅니다. 글을 함께 읽으면 더 좋겠지만, 제 짧은 머리로는 읽어내지 못하고, 이렇게 사진만 넘기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헌책방에서라 할지라도 사진책은 값이 제법 나가지만, 비행기삯을 헤아리면 거저로 사는 셈이라고 느끼면서 다시금 온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카파 형제 사진책 두 권을 만난 2007년 어느 날 〈문화당서점〉에서는 좀처럼 책값을 못 치르며 갈팡질팡합니다. 마침 이날 정문기 님이 쓴 《한국어도보》 1977년 첫판을 비롯해 값있고 뜻있는 책을 잔뜩 만났거든요. 이 책들을 사들이느라 주머니가 다 털렸습니다. 그래, 카파 형제 사진책을 매만지면서 한참 망설입니다. 가뜩이나 책값으로 이십만 원이 넘게 들어 살림은 어떻게 꾸리나 걱정하고 있는데, 옆에서 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화당서점〉 아저씨는 굵직한 목소리로 한 마디 건넵니다. "최 기자, 책이 좋으면 가져가세요. 모자란 책값은 카드로 긁어도 되고, 외상으로 달아 놓고 나중에 돈 생기면 와서 줘도 돼요. 돈이야 언제라도 벌 수 있지 않습니까. 좋은 책은 눈앞에서 사지 않으면 다음에는 없어요." "네, 그렇군요. 그렇지요. 돈이야 어떻게든 되겠지요. 살림돈이 없으면 뭐 몇 끼니 굶지요. 우리 나라에서 카파 사진책 펴내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고, 저도 사진책 사러 나라밖으로 나갈 깜냥이 안 되는데, 망설이지 말고 사야지요. 고맙습니다. 이 책들을 저한테 팔아 주셔서."

 

― 서울 연신내 〈문화당서점〉 : 02) 384-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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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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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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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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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카파 사진책 보기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7.12 10:26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로버트 카파, 사진가

플로랑 실로레 지음, 임희근 옮김,
포토넷, 2017


#사진책 #헌책방 #로버트 카파 #문화당서점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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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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