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박물관은 살아 있다

전시물에 눈도장 찍던 박물관에서 발굴체험 등 친근한 박물관으로

등록 2009.07.13 10:41수정 2009.07.13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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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날 국립 광주박물관. 석탑과 어우러진 산책로가 예쁘다. ⓒ 이돈삼

비 내리는 날 국립 광주박물관. 석탑과 어우러진 산책로가 예쁘다. ⓒ 이돈삼

 

국립박물관은 재미없는 곳이었다. 학창시절부터 그렇게 각인됐다. 마지못해 박물관에 갔을 때도 서둘러 한 바퀴 돌아보고 사진 한 장 찍으면 그만이었다. 나중에 생각하면 박물관에 무엇이 있었는지 통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사진만이 그 박물관에 갔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뿐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찾은 국립박물관은 사진촬영장이었다. 결혼을 앞둔 사람들의 야외화보 촬영 장소로 박물관은 인기였다. 웅장하면서도 고풍스런 멋을 지닌 건물에다 대숲, 솔숲, 장독대, 산책로 등이 야외사진의 멋진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뿐 전시물은 아예 관심 밖이었다.

 

결혼 이후 코흘리개 아이들을 데리고 갔을 때도 큰 변화는 없었다. 전시관에 들어간 아이들은 내가 학교 다닐 때 그랬던 것처럼, 얼른 한 바퀴 돌아보고 밖으로 나가는 게 다반사였다. 아이들에게 전시물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다만 아이들은 박물관 앞마당을 놀이터 삼아 뛰놀았다. 자동차 같은 위험시설물이 없는 것만으로도 박물관 야외는 훌륭한 놀이공간이었다.

 

국립박물관은 그렇게 언제나 재미없는 곳이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끔 박물관 앞을 지나면서 바라본 주차장도 언제나 텅 비어 있기 일쑤였다. 하여 박물관은 고요했다. 조금 과장하면 산사처럼 적막감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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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 무덤.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재현해 놓았다. ⓒ 이돈삼

고인돌 무덤. 어린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재현해 놓았다. ⓒ 이돈삼

 

온종일 장맛비가 내린다. 그것도 쉴 새 없이. 일요일인데 그냥 집안에만 있기 갑갑하다. 어디론가 나갔다 와야 할 것 같다.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가 떠올린 게 국립박물관이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박물관 뜰은 한적한 오후를 느끼기에 제격일 것 같았다. 차도 없고, 사람도 없고... 우산 하나 받치고 넓은 뜰을 거니는 것만으로도 여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째 딸아이 예슬이랑 집을 나간다. 목적지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는 국립 광주박물관(광주광역시 북구 매곡동 소재)이다. 비 내리는 날 나들이 코스로 박물관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가는 도중 내리다 그치다를 반복하던 비도 잠시 그친다. 박물관에 도착해서보니 주차장에 자동차가 많다. 빼곡하다. '웬 일이지?', '무슨 행사가 있나?'하는 생각이 든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매표소로 갔더니 무료입장이란다. 몇 백 원 안되는 입장료지만 왠지 이익을 본 것만 같다.

 

전시실로 통하는 중앙 계단을 외면하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솟대 아래로 고인돌 무덤이 눈길을 끈다. 겉으로 드러난 고인돌은 많이 봤지만 고인돌 속은 아이들에게 늘 궁금한 게 사실. 고인돌 아래가 어떻게 이뤄졌는지 아이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고인돌전시관에 가서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의문을 단박에 풀어버린 듯 예슬이의 얼굴이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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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슬이가 잔디 위에 전시된 석탑과 석등, 석불을 돌아보고 있다. ⓒ 이돈삼

예슬이가 잔디 위에 전시된 석탑과 석등, 석불을 돌아보고 있다. ⓒ 이돈삼

 

정문에서 왼쪽으로 발길을 돌리니 석탑이 보인다. 비를 촉촉이 맞아 생기를 띠고 있는 잔디 위에 석탑과 석탑의 지붕돌과 사잇돌이 펼쳐져 있다. 옛 전남도청 앞에 있다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건설공사를 피해 옮겨온 석등도 보인다. 목이 떨어져 나간 석불도 눈에 띈다.

 

건너편에는 잔디밭 사이로 놓인 산책로가 멋스럽다. 왠지 돌계단을 따라 걷고 싶어진다. 산책로 입구에는 제법 몸집이 큰 모과나무가 서 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모과를 많이 달고 있다. 초록색 열매의 생김새가 아직은 예쁘다. 열매가 더 커서 누렇게 익어가면서 생김새가 변하는 모양이다. 모과 특유의 향도...

 

꽃망울을 머금은 배롱나무도 보인다. 바닥에는 벌써 꽃잎이 몇 장 떨어져 있다. 하긴 날마다 피고지고를 반복하는 꽃이니 그럴 수밖에... 나무에 붙어 있는 이름표에서 배롱나무임을 확인한 예슬이가 나무를 건드려본다. 뭐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는 것이다. 배롱나무를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예슬이의 기대대로 배롱나무는 잎을 떨지 않는다. "뭐야 이거, 간지럼 안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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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박물관 입구. 다양한 체험이 살아있는 곳이다. ⓒ 이돈삼

어린이박물관 입구. 다양한 체험이 살아있는 곳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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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박물관을 찾은 부모와 어린이가 함께 문화재 발굴체험을 해보고 있다. ⓒ 이돈삼

어린이박물관을 찾은 부모와 어린이가 함께 문화재 발굴체험을 해보고 있다. ⓒ 이돈삼

 

그 길을 따라 쭈-욱 가니 나무의자에 적혀 있는 '어린이박물관' 푯말이 눈길을 끈다. 처음 보는 곳이다. 예쁘게 색칠된 의자만큼이나 글씨도 귀엽다. 입구에 사람들도 많다. 아이들도 왔다갔다 부산하다. 박물관에서 부모 손을 잡고 나오는 어린이들도 보인다. "예슬아! 너 여기 와 봤어?", "아니요.", "아빠는 처음인데...", "저도 처음이에요.", "학교에서 안 와봤어?", "예."

 

그렇게 들어가 본 어린이박물관. 북새통이 따로 없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섞여 분주한 모습이다. 아이들이 큰 붓으로 뭔가를 열심히 털어낸다. 손으로 한 움큼 쥐어 옮기기도 한다. 뭔가 했더니 문화재 발굴작업 체험이다.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체험장에서 아이들이 정신없이 놀고 있다. 도자기 빚기 체험장도 만원이다. 열심히 흙을 주물럭거리는 손끝에서 신중함이 묻어난다.

 

진지한 표정은 박물관에서 나눠 준 팸플릿의 문화재에 색칠을 하는 아이들한테서도 배어난다. 행여 색연필이 점선을 벗어날까봐 조심조심 색칠을 해나가는 아이들이 귀엽다. 범종과 가야금의 소리를 들어보는 체험도 아이들이 좋아한다. 문화재 모양의 자석퍼즐 맞추기와 기둥퍼즐 맞추기도 재밌어 한다.

 

"예슬아! 너도 한번 해봐?" 가만히 쳐다만 보는 아이한테 직접 해볼 것을 권했지만 반응이 시큰둥하다. "저건 애들이나 하는 거잖아", "너도 애잖아. 초등학생 어린이.", "난 청소년이야. 매표소에서 무료입장권을 줄 때 청소년표를 줬단 말이야. 자 봐!" 정말이다. 어른1, 청소년1이었다. 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 하고는 싶은데 체험하면서 노는 아이들이 많이 어려 보여 어색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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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슬이가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보고 있다. 어린이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을 보인 곳이다. ⓒ 이돈삼

예슬이가 나무의 나이테를 세어보고 있다. 어린이박물관에서 가장 관심을 보인 곳이다. ⓒ 이돈삼

 

눈요기만 하던 예슬이가 관심을 보인 것은 나무의 나이테를 헤아려보는 곳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다며 나이테를 세어본다. "28살이야." 다시 한번 세어보더니 "어, 26살이네." 하지만 예슬이가 나이테를 읽는데 정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거기엔 다른 아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치 보지 않고 얼른 나이테 세어보는 체험을 해본 것이다.

 

진즉 데려오지 못한 게 안타까웠다. 눈치 보지 않고 놀 수 있을만할 때 데려올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나가자"는 예슬이의 손을 잡고 나오면서 박물관 학예연구사한테 물었더니 3년 전에 생겼단다. 최근 3년 동안 이 박물관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는 계산이 나왔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 좋은 체험시설을 두고서 한번도 와보지 않았다니... 등잔 밑이 정말 어두웠다.

 

밖에 나와서 확인해 보니 박물관엔 이런저런 체험프로그램이 정말 많았다. 특정 생물을 주제로 한 이론과 체험교실, 어린이를 위한 뮤지컬과 마술쇼, 문화유적 답사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함께하는 토요음악회까지... 국립박물관에서 운영하는 체험프로그램은 생각보다 알차고 풍성했다. 다만 홍보가 부족했는지, 나의 관심이 부족했는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 내리는 날 찾은 박물관에서 국립박물관의 변신을 봤다. 지난해 찾은 공주박물관에서 변신의 일면을 발견했었는데, 광주박물관은 몇 걸음 앞서 있었다. 잠깐 동안 돌아보면서 '박물관이 지역주민들과 부대끼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관 개선공사로 인해 본 전시관을 돌아보지 못했지만, 오랜 선입견을 깬 것만으로도 흡족한 박물관 나들이였다. 내년 8월 국립광주박물관의 새로운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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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박물관을 찾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도자기 빚기 체험을 하고 있다. ⓒ 이돈삼

어린이박물관을 찾은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도자기 빚기 체험을 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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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슬이가 배롱나무 가지에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광주박물관 앞마당에 서있는 모과나무다. ⓒ 이돈삼

예슬이가 배롱나무 가지에 간지럼을 태우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광주박물관 앞마당에 서있는 모과나무다. ⓒ 이돈삼
2009.07.13 10:41 ⓒ 2009 OhmyNews
#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예슬 #어린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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