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치노' 등장에 마을이 떠들썩

[자전거 세계일주116] 엘살바도로 이름 모를 어느 작은 마을에서

등록 2009.07.21 11:29수정 2009.07.22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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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후 작별 인사 전 한 자리에...그리운 얼굴들. ⓒ 문종성

아침식사 후 작별 인사 전 한 자리에...그리운 얼굴들. ⓒ 문종성
 

달도 없는 밤, 어둠 사이를 달린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언제 마을이 나타날지, 행여 뜻하지 않는 불상사를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엘살바도르는 열대지역이라 밤에도 춥지는 않다는 것. 그러나 모기가 '허벌나게' 많다는 것.

 

밤이 이슥하도록 인적을 찾지 못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가뜩이나 낮에 국경을 통과하자마자 안장 위에 잠시 올려둔 자전거 장갑을 도난당한 터였다. 잠깐 사이에 귀신같이 훔쳐갔고, 내 앞에 앉아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수 명의 남자들 중 누구도 범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나갈 나그네, 우리 편이 아니라 이거다.

 

국경을 통과하고 30km를 더 오는 동안 숲길이 계속 이어졌다. 몇 채의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은 있었으나 딱히 잠잘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새로운 땅에 발을 들여놓은 긴장감 때문에 함부로 자연을 벗 삼아 텐트 치기도 꺼림칙한 상황이었다. 때를 놓치고 그만 밤을 맞았다. 벌레 소리가 하염없이 우는 길에 움직이는 것은 나 하나뿐이었다. 가끔 차라도 지나치면 전조등이 그렇게 반가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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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함, 상쾌함 자전거 여행자가 좋아하는 길. ⓒ 문종성

▲ 한적함, 상쾌함 자전거 여행자가 좋아하는 길. ⓒ 문종성
 

그러다 뜻밖에 아주 반가운 불빛을 발견했다. 작은 마을을 오롯이 비추는 오렌지 빛 가로등. 교회였다. 예배 중이었다. 무심코 입구 간판을 보았다. 브니엘 공동체(Asambleas Peniel)라니.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으로 놀랍게도 내가 섬기던 교회 대학부 명칭과 동일했다. 심상찮은 느낌이 감돌았다.

 

나는 조용히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가 뒷자리에 앉아 예배에 참석했다. 예배는 경건하게 진행되었고, 몇 명의 신자들이 간증을 하는 것으로 늦은 시각에 끝이 났다. 그런데 마지막에 느닷없이 목사님이 나를 호명하는 것이었다. 튀는 복장에 낯선 얼굴. 깊은 밤, 작은 마을이라면 나란 존재, 참으로 이질적인 게 사실이다. 앞에 앉은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온 줄 전혀 몰랐던 까닭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거기 자전거 타고 온 형제님, 앞으로 나오셔서 간단히 소개 좀 해 주시지 않겠어요?"

 

젠틀하게 웃는 목사님의 권유와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심히 부담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쑥스럽게 앞에 나간 나는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여행의 취지와 교회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짧게 얘기했다. 잠시 웅성거리던 예배당 분위기는 말이 끝나자 뜬금없이 박수세례가 터져 나왔다. 환영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목사님이 물었다. 내심 반가운 질문이었다.

 

"문이라고 했죠? 오늘 밤 우리가 혹시 도와줄만한 뭐 필요한 게 없습니까?"

"없습니다. 다만 전 예배를 드리고자…아차, 하나가 있긴 한데 괜찮다면 교회 마당에 텐트치고 잠을 청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숙소가 없더군요."

"숙소가 없긴 왜 없나요? 여기 숙소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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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없었으면 어쩔 뻔... 초반부터 길이 예상 외로 험해 오토바이 뒤를 잡고 천천히 따라왔다. 아저씨, 감사! ⓒ 문종성

▲ 이거 없었으면 어쩔 뻔... 초반부터 길이 예상 외로 험해 오토바이 뒤를 잡고 천천히 따라왔다. 아저씨, 감사! ⓒ 문종성
 

예배가 끝나고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악수를 청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두 가정이 누추하더라도 자기 집에서 자도 좋다고 말해 주었다. 날이 더운 까닭에 나는 바람을 쐬며 자는 동시에 가능한 한 덜 폐를 끼치는 해먹이 있는 집으로 골랐다. 아무래도 바깥에서 자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이렇게 선한 사마리아인들은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나의 일기에도 기록되는 것이다.

 

다음 날 아침, 그 많던 모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정말 한 군데도 물리지 않은 채 상쾌한 기분으로 기상했다. 전날 교회에 소문이 나서인지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자전거 타고 여행하는 '치노(내가 꼬레아노라고 해도 금방 잊어버리고 옆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치노라 말하며 연신 웃었다. 이들은 아시아인을 가리켜 대부분 치노라고 한다)'가 왔다며 떠들썩했다. 그리고 매우 친절했다. 동네 어르신은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 소개시켜 주며 인사하게끔 했다.

 

그들은 질문에 대한 별 거 아닌 대답에도 긍정적으로 동조했다. 누런 치아마저 빠져 쪼그라든 입술의 할머니는 말 대신 손자뻘 되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10대 아이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환상으로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왔다. 특히 영화와 TV로 접한 미국에 대한 그들의 동경은 정말 꿈을 꾸는 소녀 그 자체였다. 미국을 여행했다는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역시 여자들에겐 뉴욕이 진리인가.

 

남자들은 나를 자리에 앉히고 한 잔의 시원한 맥주를 권했다. 콜라를 대신 얘기했더니 멋쩍었는지 자신의 입으로 도로 갖다가 털어 넣는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질문을 차단하고는 본인들이 원하는 질문들을 해대기 시작했다. 질문이란 것이 내게는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진부한 것이었지만 처음 얘기 듣는 입장을 고려해 감정을 최대한 살려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엔 당신들을 만난 것이 참 감사한 일이고, 이것이 바로 여행의 맛이라고 말해 주었더니 너털웃음을 짓는다.

 

이야기꽃이 피고 지는 시간은 길었다.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아침 식사 자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당신 때문에 오늘은 마을 사람들이 늦게까지 남아 있군요."

"여기 가끔 자전거 타는 여행자들 지나갔을 텐데 못 보셨나요?"

"일 년에 몇 번 지나가긴 하지만 우리 마을에서 잠을 잔 사람은 당신 하나뿐이라우."

"게다가 자전거 타는 '치노'는 당신이 처음이라지."

"아이들이 당신을 보며 엄청 신기해 해요.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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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도 해 줄까?"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엘살바도르 여학생들이 머리 손질을 하고 있다. ⓒ 문종성

▲ "문, 너도 해 줄까?" 외모에 관심이 많은 엘살바도르 여학생들이 머리 손질을 하고 있다. ⓒ 문종성
 

다들 고운 마음, 고운 시선으로 바라봐주니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아시아인이 뭐 특별하다고 이들은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하긴 우리나라 시골 마을에 낯선 나라 자전거 여행자가 등장하면 이런 반응 나오겠다 싶다. 늦은 출발인 만큼 서둘러야 했다. 짐을 챙기고, 자전거를 끌고 나오자 사람들의 시선도 나를 따라 나왔다.

 

만남은 항상 헤어짐을 낳고, 숱한 안녕을 말한 오랜 장기 여행자지만 떠날 때 마음이 무거운 건 늘 겪는 마음의 고초다. 하룻밤 머문 '치노' 나그네를 미소로 보내주는 것이 고맙기 그지없다. 우연히 내가 방문한 게 이들에게 소박한 기쁨이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떠나고 숲길에 형성된 작은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잠잠해질 것이다. 다만 스쳐가는 인연이 아니라 한 번씩 기억에서 꺼내볼 때 마음이 넉넉해지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래본다.

 

"나는 꼬레아노예요. 안녕~ 모두들."

 

나는, 지금, 다시, 행복한 웃음의, 그들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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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식사 준비 중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꿀꺽. ⓒ 문종성

▲ 아침식사 준비 중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꿀꺽. ⓒ 문종성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엘살바도르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중남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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