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페인트 뒤집어쓴 소녀의 상, 부끄러운 일본인"

피폭지 나가사키에서 함께한 평화교육

등록 2009.07.28 20:55수정 2009.07.2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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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일본 나가사키의 여름은 무척 뜨겁고 습하다. 하지만 이 뜨거운 도시의 7~8월에도 외국과 전국 곳곳에서 찾아드는 관광객과 수학여행단, 그리고 견학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지난 7월 22일 오전 9시 30분. 나가사키 평화공원에는 약 120명의 견학자 그룹이 모여들었다. 나가사키에서 가까운 시마바라에서부터 온 초등학생과 중학생 그리고 인솔교사들이다. 시마바라는 1991년 화산이 폭발했던 도시로, 10년 전부터 매년 '헤이와노 타비'(평화의 여행)를 나가사키로 오고 있다.

평화의 여행을 오는 사람들, 교육과 증언을 통해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나가사키 증언의 회'의 모리구치 마사히코씨에 따르면, 학기 중인 3~6월, 9~12월 초까지 상당한 수의 수학여행단 혹은 견학자들이 나가사키를 방문하는데, 규슈에서는 초등학생이 많이 찾아오고,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간사이 지방에서는 중학생 여행단이 많이 찾아온다. 가을철에는 도쿄와 도호쿠 지역, 홋카이도의 고등학생들도 외국여행과 마찬가지인 먼 거리의 나가사키를 찾아오곤 한다. 인솔교사를 포함해 주로 150명의 규모가 많지만, 많을 때는 200~300명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나가사키의 노면 전차는 수학여행단들로 붐빌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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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평화의 여행 중인 시마바라의 초,중등생. ⓒ 전은옥


'나가사키 증언의 회'는 40년 전에 창립된, 피폭자의 입장에서 증언활동과 평화교육을 해나가는 자발적인 시민모임이다. 수학여행단, 그리고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오는 다양한 그룹의 견학자들에게 풍부한 역사적 지식과 경험, 평화와 인권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우러나오는 남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회원들은 연간 많게는 30~40회에 걸쳐 피폭의 자취를 더듬어 걷는 여정을 안내하며 현장 평화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이 평화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고 코스 가이드를 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자신과 가족, 이웃의 피폭 체험을 증언하며 증언을 듣는 이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까지도 던지고 있다.

7월 22일 시마바라로부터 온 학생들의 안내를 맡은 회원은 모리구치 미츠기씨(형), 모리구치 마사히코씨(동생), 죠우다이씨, 야마카와씨, 스에나가씨 등이었다. 이중 필자는 가장 연장자이며 그 자신이 피폭체험자(입시피폭자, 피폭 당일은 타 도시에 가족모임을 갔다가 수일내에 아직 방사능이 잔존한 나가사키에 돌아옴)인 모리구치 미츠기씨의 평화순례를 따라 가 보았다.

첫 번째 장소는 평화공원내 우라카미 형무소 터. 이곳은 나가사키 형무소 우라카미 지소가 있던 곳이다.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 직원과 그 가족, 수용자를 포하해 134명이 사망했는데, 33인의 중국인과 숫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조선인이 다수 투옥돼 있었다. 이 조선인·중국인 수용자들은 실제 범법자라기보다는 강제노역 중에 미움을 사거나, 일본측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다가 고문당하고 붙들려온 사람들이었다.

"이전에 일어난 일을 아는 것에서부터 삶에 대한 물음과 고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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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생명이 사라진 폐허와 지옥의 땅이 된 나가사키를 폭심지를 중심으로 해 180도 파노라마 전망 사진. 1945년 10월 중순, 시게오 하야시 촬영. ⓒ 전은옥


미츠기씨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견학자 그룹은 여섯 그룹으로 나뉘어 각기 다른 코스를 견학했지만 한 그룹당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미츠기씨는 초등학생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상냥하고 쉬운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모두의 앞에서 이렇게 인사를 했다. 방금 전에 인솔 책임자가 '나가사키 증언의 회' 회원들을 '가이드'라고 소개했기 때문인지, 그것을 바로 고치는 데서부터 인사는 시작되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가이드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옛날 이야기나 하려고 모인 사람들도 아닙니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역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일어난 일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분이 자신의 머리와 가슴으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활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그것을 배워주셨으면 합니다."

미츠기씨가 안내하는 코스에 따라온 그룹의 학생들은 전부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한 번쯤은 와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아느냐는 질문에는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남 앞에서 소리내어 자기 생각을 말하기를 아직은 부끄러워하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지만, 정말로 그 의미를 모르는 학생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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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평화공원은 원래 우라카미 형무소가 있던 자리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형무소에 수용되어 있던 죄없는 조선인과 중국인 강제연행 노동자 46명도 비명에 죽었다. ⓒ 전은옥


미츠기씨가 미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당시 나가사키의 지도를 보여주며, 원폭이 투하된 지점에 대해 설명을 한다. 평화공원으로부터 걸어서 10분내에 도착할 수 있는 지점이 원폭투하 중심지다. 현재는 '폭심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우라카미 형무소 터를 바라보는 나무 그늘에 학생들이 쭉 둘러앉자 미츠기씨가 묻는다.

"형무소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가는 걸까요?"

금세 대답이 나오지 않으니, 초등학교 교사 출신이라서 학생들의 성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미츠기씨는 특정한 학생들을 한 명 한 명 지목해서 묻는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요."

미츠기씨가 되묻는다.

"어떤 사람이 범죄자가 되나요?"
"나쁜 짓을 한 사람이요."

학생들의 답변은 비슷했다. 그러자 미츠기씨가 이야기한다.

"우라카미 형무소 안에는 어떤 범죄자들이 갇힌 걸까요? 무슨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여러분 말대로라면,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여기에 갇히게 된 걸까요?"

1945년 8월 9일 그날, 형무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범죄자가 아니었다

"잘 들어 보세요. 원자폭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던 날 우라카미 형무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 중에 중국인이 32명(33명이라는 주장도 있음)이었고, 조선인이 13명~16명 정도 되었어요. 이들은 사실 범죄자가 아니었습니다. 범죄는 그들을 형무소에 집어넣은 일본인이 범죄자예요. 100년 전 일본은 한반도를 자기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선인에게 일본인이 되라고 강요했고,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고 이름도 일본인처럼 바꾸라고 강제했어요. 수년 전에 돌아가신 박민규씨도 여러분과 비슷한 나이에 일본에 끌려온 조선인인데, 후쿠야마로 개명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모두에게 '후쿠야마씨'로 불렸습니다. 우라카미 형무소에 갇힌 사람 중에 조선인이 정확히 몇 명인지를 알 수 없어서 제가 13~16명 정도라고 말했습니다만, 이름이 일본식이니까 누가 조선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언뜻 구분해 내기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는 다시 자료를 펼쳐 당시 나가사키로 강제연행되었던 중국인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일본은 전쟁을 하면서 노동자 수가 일본인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조선인에게 징용령을 내려 강제연행을 하거나, 중국인을 납치해서 끌고 왔어요. 나가사키에는 탄광이 아주 많이 있었는데, 그곳에 데려다가 일을 시키면서 때리기도 하고 먹을 것도 조금밖에 주지 않았어요."

그렇게 하루 12시간 이상의 가혹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을 견뎌낼 만큼의 양식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밥을 조금만 더 달라고 요구해도, 몸이 너무 아파서 하루만 쉬겠다고 결근계를 내도,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혀도, 때리고 고문하고 죽이기도 했다. 우라카미 형무소에 갇힌 중국인·조선인 수용자도 이런 신세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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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중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되어 나가사키 사키토 탄광으로 끌려온 교서춘 씨도 우라카미 형무출장소에서 폭사했다. 미츠기 씨가 들고 있는 사진 속에서 오열하고 있는 이가 그의 딸 교애민씨다. ⓒ 전은옥


강제연행 피해 중국인이었던 교서춘 씨의 딸 교애민씨가 수년 전 나가사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행방을 전혀 알지 못했던 교애민씨는 아버지가 죽은 현장에 발을 내딛었을 때 주저 앉아 통곡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당시에는 마음대로 먹고 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죽은 넋이라도 음식을 맘껏 드시라는 의미로 먹을 것을 늘어놓고 "드세요"라고 말하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목격하고는 영문도 모른 채 웃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고 낄낄거렸던 모양이다.

"그 아이들은 왜 웃었을까요? 몰랐으니까요. 할머니가 왜 그토록 울어야 했는지를 아이들은 배우지 못했고 알지 못했으니까요. 공부를 하지 않고, 제대로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지금 웃지 않는 이유는 여기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에 대해 방금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은 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죠. 수학여행을 전부 마치고 여러분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각자가 스스로 열심히 공부해주세요. 자신의 머리와 자신의 마음으로 이것들을 공부해주세요."

일본은 피폭국, 그러나 아시아의 각국이 일본에 의해 당한 고통을 알아야 한다

미츠기씨는 올바른 역사적 지식과 앎, 배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학생들에게 천천히 설명하면서 다시 질문을 던진다.

"12월 8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 8월 15일, 7월 7일이 무슨 날인지 아는 사람?"

학생들은 침묵을 지킨다. 미츠기씨가 지목한 첫 번째 학생은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두 번째 학생이 8월 15일에 대해 "종전기념일이요"라고 답했다. 그러나 다른 날짜에 대해서는 대답한 학생이 없었다.

"여러분, 8월 9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죠? 그런데 8월 9일만 기억하지 마세요. 7월 7일은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시작한 날이고, 12월 8일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한 날이에요. 전쟁 중에 일본인은 3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하지만 같은 시기에 중국인을 1천 만 명 이상 죽였고, 베트남에서 300만 명, 필리핀에서 군사가 아닌 시민만 60만 명, 그밖에도 아시아 각지에서 엄청난 사람들을 죽였어요. 일본인이 300만 명 죽었다고 생각하면 엄청나게 느껴지죠? 그런데 일본은 아시아 다른 나라에서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을 죽였어요. 군인도 아닌 사람들을. 그래서 8월 15일 일본은 전쟁에서 패했지만, 그때 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만세를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원폭투하는 정말 심한 짓이었어요'라고 말한다면, 아시아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아마 '우리는 더 심한 짓을 당했다'고 대답할 거예요."

이 순간 아이들의 표정을 살펴 보았다. 숨죽인 아이들은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대해 매우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미츠기씨가 "여러분이 있는 이곳은 평화공원입니다"라고 다시 운을 떼었다.

"여기 평화공원에는 세계 각 나라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보내온 기념비가 많이 있는데요. 다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를 생각하고 귀기울여 들어봐야 해요."

"물을 마시고 싶어요. 물을 주세요."

우라카미 형무소 터로부터 몇 걸음을 옮기니, 1985년 중일우호협회를 통해 중국에서 기증한 '소녀의 상'이라는 평화기념비가 있었다. 미츠기씨가 사진을 꺼내 보여준다. 사진 속의 기념비에는 빨간 페인트가 덧뿌려져 있었다. 1988년의 사건으로, 일본은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다며 우익 청년이 중국의 기념비에 페인트를 투척한 것이다. 미츠기씨는 "아직도 이렇게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라며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의 '부끄러움과 수치'에 대해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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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기증한 소녀의 상 앞에 빨간 페인트를 투척한 '부끄러운 일본인'에 대해 설명 중인 미츠기씨.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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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기증한 평화기념상인 '소녀의 상'. 이곳에 세워진 지 4년만에 일본 우익청년에 의해 빨간 페인트를 뒤집어 쓰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사건 이후, 소녀의 상을 지키는 시민의 모임이 결성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전은옥


바로 옆에는 뉴질랜드에서 기증한 기념비가 있었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였다. 뉴질랜드에서 보내온 조각에는 영어, 일본어, 마우리족의 언어로 '마우리 족의 옛말'이 새겨져 있었다. "Remember winter, springs welcome consolation." 冬を胸に、春は希望に滿る。(겨울을 가슴에 품고 기억하면, 봄은 희망으로 가득찬다) 라는 말을 미츠기씨는 "전쟁이 끝나면 봄이 온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중국어, 러시아어, 한국어로 차례 차례 평화라는 단어의 발음을 가르쳐 준다. 아이들이 미구치 씨의 발음을 따라 두 번씩, 전부 입을 모아 각국의 평화라는 말을 외쳐 본다.

"헤이와, 후페이, 미~르, 평화."

조금 더 걸으니, 평화공원 입구의 분수 '평화의 샘'이 눈에 들어왔다. 분수대의 계단에 다시 나란히 앉은 학생들 앞에서 미츠기씨가 한 가정의 가족사진을 꺼내들고, 그 가족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사진 속의 인물들은 마츠오 아츠유키씨의 가족이었다. 마츠오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이쿠로도 남겨 유명한데, 피폭 당시 아이가 물을 달라고 졸랐지만 물이 없었기 때문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남편(마츠오 씨)과 아내, 아이 셋 중 살아남은 건 마츠오씨와 아이 한 명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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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평화공원 입구에 세워진 '평화의 샘' 분수. 원자폭탄에 몸이 불타고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물을 간절히 찾아 헤매던 피폭자들의 넋이라도 달랠 수 있을까. ⓒ 전은옥


평화의 샘 속에는 여행객들이 던져 넣었을 동전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이런 설명이 적혀 있었다. 당시 피폭을 당한 시민들이 목이 타서 간절히 찾았던 그 물을, 평화공원을 찾은 견학자들이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다고. 그리고 분수의 정면 비에는 9살 소녀의 수기가 일부 새겨져 있었다.

"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물에는 기름 같은 것이 전면에 퍼져 있습니다. 참을 수 없을 만큼 물이 마시고 싶어서 마침내는 기름이 떠 있는 채로 마셨습니다."

"피해국의 포장된 평화를 관광상품으로 파는 일본"

내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일행은 다시 이동을 시작해 근처의 중국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 섰다. 추모비 앞에 서자마자, 사이렌 비슷한 음이 흘러나온다. 손목시계를 들여다 보니 11시 2분이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시키시에 원폭이 떨어진 그 시각. 날마다 이 시간이 되면, 나가사키 평화공원과 원폭기념자료관에서는 11시 2분을 알리는 음악을 방송한다.  내가 첫 번째로 들은 11시 2분의 음악은 원폭기념자료관에서였다. 미츠기씨의 안내에 따라 학생들도 함께 1분 동안 묵념을 했다. 그리고 이어 원폭으로 수많은 아이들이 죽은 야마자토 소학교로 걸어서 이동했다.

소학교로 이동하는 와중에, 이제는 나가사키시와 평화공원의 상징이 되어버린 높이 9.7m의 거대한 남자 청동상 '평화기념상'을 멀리 바라보며 미츠기씨가 몇 마디 덧붙인다.

"저 동상은 시마바라 출신의 기타무라 세이보라는 조각가가 만든 것입니다. 저것을 맨처음 세운 게 54년 전입니다만, 300만 엔 이상의 비용이 소요되었다고 해요. 나와 '나가사키 증언의 회' 회원들은 저 동상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뭔가 항의를 할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그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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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 바라다본 나가사키 평화공원 '평화기념상'. 평화를 기념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지적에서부터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의 군국주의적 행적의 전력 때문에 다양한 비판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전은옥


나가사키 평화의 기념상에는 "상공을 가리킨 오른 손은 원폭의 위협을 나타내고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의미하며, 살짝이 감은 눈꺼풀은 전쟁 피해자의 명복을 빌고 있다"는 설명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기념하는 형상이 아니라는 지적에서부터, 기타무라 세이보가 전시에는 군국주의자들과 군신상까지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에 평화의 기념상을 만들 자격이 없다는 비판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나가사키에 끌려와 노예처럼 살다가 원자폭탄까지 뒤집어 써야 했던 조선인 강제연행 노동자들의 삶을 소설로 기록했던 소설가 한수산씨도 "침략전쟁을 이끈 군국주의자들의 조상을 만든 손으로 그는 평화의 상징을 또 빚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일본이 보여주는 반성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이제 나가사키는 원폭의 비극성이나 전쟁의 참상,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이 아닌 '평화의 발신지'로 자리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원폭은 이제 관광자원이 되고, 피폭의 역사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있습니다. 피해국으로 포장된 과거를 파는 시장, 피폭지를 걸었습니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당시 원폭 피폭 생존자 중에 화상을 입고 괴로워하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중에 후쿠다 스미코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공원에 나와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로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던 분이에요. 그분은 '이런 동상을 만들어 원폭의 비참함을 알리는 것은 그 자체로 좋습니다, 하지만 이 동상을 세울 돈으로 사람을 치료했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고, 덜 고통받고 치료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라고 비판을 했어요. 당시 피폭자들의 기분이 거의 그랬습니다. 다들 살고 싶었어요. 살아서 병원에도 가고, 밥도 제대로 먹고 싶었고, 치료를 받고, 좀더 살고 싶었어요. 그러니, 저런 거대한 동상을 세울 돈으로 사람의 치료에 사용했으면 더 좋았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입니다."

나도 수개월 전에 나가사키 방송에서 후쿠다 스미코씨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54년 전 평화공원의 동상이 세워질 무렵의 피폭자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졌다. 내가 본 방송에서는 후쿠다씨의 육성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아이들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날 죽어간 그 아이들을."

평화공원을 벗어나 약 400m 가까이 걸으니, 서구풍의 예쁘장한 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피폭당한 옛 학교 건물을 해체하고 88년에 서양풍으로 신축한 것이었다. 아이들은 "와, 예쁘다"라고 연발했다. 야마자토 소학교였다. 64년 전 8월 9일 당시는 수업은 없었다. 공습이 심해진 6월부터 소학교, 중학교는 학교에서 수업을 실시하지 않았다. 대신 학생들은 각 지구의 민가나 절, 신사에서 모여 그리로 직접 찾아와 공부를 가르쳐 주는 선생을 기다렸다. 학교에서 수업은 없었지만 컴퓨터도 없고 재미난 게임도 없던 시절, 친구가 그리웠던 아이들은 학교에 자주 얼굴을 내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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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 투하 중심으로부터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곳에 위치해, 피폭 당시 큰 피해를 당했던 야마자토 소학교. 교직원 28명과 학생 1581명 중 1300명 가량이 사망했다. ⓒ 전은옥

그날도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기 위해 나왔고, 공습경보를 듣고는 방공호로 대피했다. 당시 방공호는 수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비좁고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끔찍하게 더웠기 때문에, 방공호에 피난해 있는 시간도 사람에게는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공습경보가 해제되자 마자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와 다시 뛰어 놀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이 노는 데 집중하는 중에 귀가 참 밝은 소년이 한 명 있었다. 그 소년은 비행기 소리를 들었다. 공습경보가 해제되었지만 다시 비행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소년은 "비행기다!"라고 외치며 방공호 쪽으로 몸을 달렸다.

그러나 츠지모토군이 미처 방공호 안으로 들어가기 전, 즉 방공호 입구에 다다랐을 때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츠지모토군의 몸은 엄청난 폭풍에 휩쓸려 방공호 입구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까지 날아갔다. 곁에서 놀던 친구들은 거의 죽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시각 집에 있었을 그의 어머니도 죽었다. 이 초등학교의 학생 1581명 중 살아남은 학생의 수는 고작 300명에 못 미치는 수였다(전부 학교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각자 이 부근 어딘가에서 죽었을 것이다). 츠지모토군처럼 살아남은 '원자폭탄'의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의 시체를 태우고, 자신의 어머니와 오빠와 동생과 형과 누나를 태워야 했다.

현재의 학교 건물이 서 있는 장소가 본래의 운동장이었고, 지금의 운동장에 본래의 피폭된 학교 건물이 있었다. 피폭된 건물은 해체되었으나, 학교 안에는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고, 원폭자료실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었다. 피폭 당시의 뒷문 기둥과 방공호가 건물 뒤쪽에 남겨져 있기도 했다.

당시 그 자신이 피폭자로서 부상을 당하고, 피폭으로 인해 아내를 잃었던 의사 나가이 다카시 박사는 살아남은 아이들에게 피폭의 경험을 글로 쓰게 하고 그것을 정리해서 <원자구름 밑에 살아서>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원고료의 일부를 서로 내놓고 죽은 친구들의 추모비를 세워, 후배들에게 전쟁의 비참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호소하자가 설득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모두 찬성했다. 그리하여 바로 '그 아이들의 비'가 세워졌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1949년이었다. 어린 소녀의 얼굴이 새겨진 기념비를 바라보며 미츠기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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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들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 야마자토 소학교. 피폭에서 생존한 이 학교의 어린이들이 죽은 친구들을 생각하며 직접 세운 추모비다. ⓒ 전은옥


"나가이 박사는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이 비석 주변에서 마음껏 놀아도 돼요. 비석 위에 올라타도 좋아요. 하지만, 그날 죽은 친구들을 잊어서는 절대 안 돼요. 이 장소가 여러분과 같은 어린이들이 많이 죽어간 장소라는 것만은 꼭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죽은 아이들을 위해 지은 노래 'あの子'(그 아이)를 불렀다. 지금도 해마다 11월이면 야마자토 초등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은 이 비석 앞에서 추모제를 행하고, 'あの子'를 함께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 이 아이들도 죽지 않았을 테죠."

피폭 64년이 흐른 까마득한 여름날 이곳을 찾은 시마바라의 초등학생과 중학생들도 이 비석 앞에서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뜰 무렵, 미츠기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왜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 했을까요? 일본이 전쟁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들도 죽지 않았을 테죠."

학교 뒤편의 방공호로 걸음을 옮기자, 미츠기씨가 당시 일본 본토에 대한 공습이 있을 때의 방공호와 피난의 풍경에 얽힌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학교의 교장이나 관공서의 책임자급 되는 사람은 위급한 순간에도 반드시 몸에 '귀한 물건'을 소중히 모시고 '사수'해야 했다. 돈도 먹을 것도 아니고, 천황 내외의 사진이었다. 천황은 곧 하나님이었던 시대였으니까. 한 번은 천황의 사진을 등에 지고 가는 것이 발각된 교사가 해고를 당했다. 천황보다 자신의 몸을 앞세웠다는 비판이었다.

미츠기씨는 "자신의 목숨보다 귀한 것이 세상에 있을까요?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사진 한 장을 꼭 들고서, 그것도 자기 머리 위로 높이 받들고서 공손히 방공호로 들어가야만 했던 시절이었지요"라며, 개개인의 생명을 깃털보다 가볍게 여겼던 시대의 천황숭배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하의 황민화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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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자토 소학교 건물 뒤편의 방공호. 츠지모토 군은 방공호에 미처 들어가기 직전, 입구에서 피폭을 당했다. ⓒ 전은옥


어느덧 시간은 12시가 되었지만, 평화의 여행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학교 가까이에 있는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이었다. 피폭을 당하기 전에 이미 백혈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던 나가이 박사는 자신도 피폭으로 부상을 당했으나, 다른 피폭자들의 구호와 치료에 힘쓰고 원자병에 대한 연구서를 남겼다. 그는 의사이면서도 동시에 시와 그림과 글씨를 비롯하여 원폭피해에 대한 수많은 저작을 남겼다.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에는 나가이 박사의 생애에 대한 소개와 함께, 그의 저작물과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고, 2층 자료실에는 다양한 서적이 구비되어 있었다.

폐허의 나가사키에서 원자병 연구와 어린이 교육에 힘썼던 나가이 박사

나가이 박사는 피폭의 폐허 위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이 절망에 빠지지 않게 하려고 책을 읽게 하고 글을 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가사키의 재건을 희망하며 나무를 심고, 자신의 자택 옆에 '우리들의 책장'이라는 도서관을 지었다. 나가이 박사의 사후, 그를 기리는 브라질 재류 일본인의 기부금과 나가시키 시에 의해 '나가사키 시립 도서관'이 개관되었으며, 1969년 '나가사키 시립 나가이 기념관'으로 개칭하여 박사의 유품과 사진 등도 함께 전시하는 지금의 공간으로 서서히 바뀌게 된다. 지금의 기념관은 2000년에 전면 개축하여 나가사키 시립 나가이 다카시 기념관으로 재개칭하여 새롭게 개관된 공간이다.

원폭피해자들이 겪은 다양한 종류의 피해와 고통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는 필자는 나가이 박사의 수많은 저작 중에서 가장 일찍 출판된 <나가사키의 종>과 <이 아이를 남기고>를 구입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의 전집도 진열되어 있었고, 특별히 원자폭탄 피해로 인한 각종 질병에 대해 연구한 의학서적이 내 관심을 끌었지만, 일단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두 권의  문고판 책만 구입하고 다음에 재방문하여 천천히 자료실에서 다른 책도 읽어가기로 하였다. 미츠기씨가 아이들에게 영상물을 감상하거나 자유롭게 전시물을 관람하게 한 뒤, 나를 위해 별도로 나가이 박사의 저작물이나 기념관에 대해서 안내를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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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다카시 기념관 입구에서 판매중인 나가이 박사의 저작. 1층은 전시실과 영상 감상 코너, 2층은 도서관 겸 자료실로 구성되어 있다. ⓒ 전은옥


마침, 이 기념관의 관장이자 나가이 박사의 손자인 나가이 도쿠사부로 씨가 자료관에 나와 있었기 때문에 인사를 나누고 전시물 소개 팸플릿도 받았다. 2층에 있는 자료실도 소개받았는데 <이 아이를 남기고>는 박사가 아내를 잃고 자신마저 두 자녀를 남기고 곧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그린 유명한 책으로서, 2002년에 키드미즈사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되었다. 이 책을 현장에서 구입할 수는 없었지만, 자료실에서 대여해 읽을 수는 있었기 때문에 수첩에 메모를 해두었다.

그러나 나가사키에서 이토록 존경받고 특히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성인처럼 숭배되고 있는 나가이 박사도 당시 군국주의 천황제 하에서 국가에 대한 비판의식 없이 충성과 애국에 심취했던 큰 한계를 지니고 있다. 패전후에도 그런 의식은 크게 변화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별도로 논하기로 하겠다.

일행은 다음 견학장소인 우라카미 천주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기념관의 직원과 나가이 박사의 시나 노래, 그리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느라 한참 일행에게서 뒤떨어져 버렸으나, 곧바로 따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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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이 투하된 지역을 '우라카미 지구'라 부른다. 우라카미 천주당은 당연히 피해의 중심에 있었다. ⓒ 전은옥


이국적인 분위기를 간직한 아름다운 우라카미 천주당도 역시 피폭으로 인하여 산산조각이 나버린 곳이었다. 지금은 새롭게 건물을 복원하여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으나, 피폭으로 인해 부서진 건물의 잔해를 곳곳에 보존하고 있었다. 교회 왼편의 강변 절벽에는 피폭 당시 종이 매달려 있던 성당의 돔이 원래 위치로부터 35m나 떨어져 내려온 잔해가 남겨져 있었다. 미츠기씨기의 지도에 따라, 학생 중 한 명이 성당 지붕의 잔해 쪽으로 내려가 자신의 키와 지붕의 규모를 비교해 보였다. 무게 50톤의 건물도 부서져 수십 미터를 날아와 박힐 정도로 원자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우라카미 천주당의 곳곳에는 목이 잘려나가거나, 군데군데 부서져 버린 채 피폭의 상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조각과 잔해가 당시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더 많이, 더 쉽게, 더 빨리' 사람을 죽이기 만들어낸 악마의 무기

이제 오늘의 평화순례를 마무리짓는 장소, 폭심지 공원(원폭투하 중심지)으로 이동했다. 모든 이동은 도보였다. 더위 속에서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픈 시간, 9시 30분에 평화공원에서 집합한 아이들은 1시가 넘도록 아직 점심밥도 먹지 않은 채 평화의 순례 중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곳, 폭심지 공원의 500미터 상공에서 미군의 비행기가 '팻맨'이라고 불렸던 플루토늄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다시 자료를 펼쳐든 미츠기씨는 상공에서 촬영한 나가사키 지도를 보여주면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원래 미군은 나가사키의 가장 번화한 시가지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 폭탄을 개발하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는데, 만일 바다나 산 위에 떨어 뜨리면 아까우니까, 최대한 많은 건물을 부수고 사람도 죽고 피해규모가 크면 클수록 개발비가 아깝지 않게 된다고 생각한 거죠."

결국 시중심지인 메가네 바시 부근에는 원폭이 투하되지 않았다. 그리고 평화의 순례단이 마지막으로 선 '폭심지 공원'에 원폭이 투하되었다. 나가사키 인구 21만명 중 7만~8만 명이 죽었다. 7만 5천명 정도가 부상을 당했고, 나머지 7만 명도 크고 작은 피해를 당했다. 군인뿐 아니라, 소학교에서 뛰어놀던 어린 아이들도, 대학교에서 연구 중이던 의학자들도, 전차를 타고 어딘가로 이동 중이던 사람들도, 피침략국의 백성으로서 강제연행 당해 서럽게 노동하고 배곯아 가며 생활하던 조선인·중국인 노동자들도 처참하게 죽어갔다. 처음부터 사람을 죽이기 위해,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쉽게'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던 대량살상무기에 의해서. 무기가 투하된 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사람을 죽이게 되어 있는 무기, 그 원자폭탄에 의해서.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기억하여, 지금 이곳의 삶을 묻고 또 물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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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투하 중심지에 '폭심지 공원'이 있다. 이곳으로부터 상공 500m에서 미국의 플루토늄 원자폭탄 '팻맨'이 무수한 생명을 살상하기 위해 떨어졌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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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에게 평화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또다른 길위의 평화운동가, '나가사키 증언의 회' 야마카와 씨. 등을 보이고 설명중인 이가 야마카와 씨다. ⓒ 전은옥


'나가사키 증언의 회' 회원들도 바로 이 원자폭탄에 의해 가족과 친구를 잃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피폭지 나가사키에서 원폭의 체험을 전하고,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고발하고 있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또 묻는다. 물음을 그쳐서는 안 된다며, 증언을 그쳐서도 안 된다며, 원폭의 체험과 전쟁범죄, 특히 이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도 용서할 수는 없으나 원자폭탄 투하를 불러들인 일본의 전쟁책임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증언과 교육, 앎과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이들은 실천적 평화 교사들이다.

'나가사키 증언의 회'는 해마다 피폭자들의 증언을 모으고 원폭피해와 관련한 다양한 테마의 연구논문도 함께 모아 꾸준히 발행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 역사왜곡뿐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평화를 위협하는 국내외의 다양한 움직임에 대해서 올곧게 저항하고자 하는 이들은, 쉽고 상냥한 언어 속에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끝없이 반성하고 묻고 성찰하는 예리한 정신의 빛줄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나가사키 증언의 회'는?
1967년 11월, 일본 후생성이 발표한 원폭백서에 "건강, 생활의 양면에 있어서 국민일반과 피폭자 간에는 상당한 격차는 발견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결론이 실렸다. 이에 대한 비판을 동기로 하여, 자주적인 실태조사, 증언운동을 개시, 이후 40년 동안 일관되게 원폭 피폭자의 입장에 서서 반핵의 증언과 고발을 해 왔다. 피폭자가 아니라도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으나, 피폭자 비율이 높다. 69년부터 줄곧 해마다 증언집을 한 권씩 발행하고 있는데, 나가사키 피폭지 곳곳을 안내하며 평화교육을 실천하는 회원은 약 15명이고, 책을 발행하는 편집위원은 10명 정도이다. 나가사키 지역 밖에서 활동하는 회원도 있어, 후쿠오카,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활동을 각자의 거주지와 연결해 펼치고 있다.

증언의 회가 발행하는 책자에는 증언회의 운동의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 핵병기 금지, 폐절과 세계 평화의 확립, 2. 피폭자의 구호와 국가보상에 입각한 원호법 실현, 3. 피폭체험, 전쟁체험의 계승, 피폭자를 중핵으로 하는 국민적, 국제적 연대의 강화. 이 세 가지 과제의 실현을 위해서 강연 및 증언 활동, 증언기록의 수집, 평화교육, 문화활동, 조사연구, 증언집 발행 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사상이나 당파의 차이를 넘어서 활동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증언의 회에서 발행하는『증언-히로시마 나가사키의 목소리』원고모집 안내문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글을 모으고 있다. "1945년 8월 체험을 중심으로, 그때까지의 생활과 그후 64년의 세월, 또 현재까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 등을 써주세요. 특히 원폭이 당신에게 준 영향이나 자신이 그것에 어떻게 맞서 왔는지를 가족이나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정리해 주세요. 전쟁 전, 전시, 전후를 되돌아 보며 미래를 바라보는 증언과 유언을 응모해주세요. 1. 나의 피폭체험과 그 64년의 세월의 기록, 2. 피폭자의 가족, 친구로서의 증언, 3. 피폭을 이야기하는 활동 및 국제연대와 원수금 운동 등의 기록, 피폭실태조사, 평화연구논문, 4. 피폭체험기 등의 독서감상문, 서평, 소개글 등. 수기, 채록, 에세이, 르포, 시, 회화, 사진, 만화, 그 외 장르와 형식도 자유. 누구든지 투고 가능. 피폭체험의 유무를 묻지 않음"이라고 적고 있다.

필자가 만나본 '나가사키 증언의 회' 회원들은, 단순히 "우리는 원폭 피해자"라는 점을 강조하여 피해자 증언을 중심으로 활동하지 않고, 가해와 책임과 반성을 함께 강조해나가고 있는 피폭자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바람직한 평화운동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일본 나가사키 소재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원폭피해자 문제 및 일본의 평화운동과 교육, 평화박물관 등을 테마로 연구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는 시민단체 '나눔문화' 연구원을 거쳐, '원폭2세피해자 김형률 추모사업회'의 간사로서 '원폭문제 공동대책위'의 실무를 책임져왔고, 국내에서 오랜 세월 소외되어 왔던 원폭피해자 및 대물림되는 다양한 질병과 후유증, 가난과 차별 속에 고통받는 2~3세 피해자들에 주목하면서 '한국원폭2세환우회'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일본 나가사키 소재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객원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원폭피해자 문제 및 일본의 평화운동과 교육, 평화박물관 등을 테마로 연구 활동 중이다. 한국에서는 시민단체 '나눔문화' 연구원을 거쳐, '원폭2세피해자 김형률 추모사업회'의 간사로서 '원폭문제 공동대책위'의 실무를 책임져왔고, 국내에서 오랜 세월 소외되어 왔던 원폭피해자 및 대물림되는 다양한 질병과 후유증, 가난과 차별 속에 고통받는 2~3세 피해자들에 주목하면서 '한국원폭2세환우회'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나가사키 #원폭 #평화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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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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