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목사·신부도 직업윤리 있어야 살아남는다

종교인들, 사회적 신뢰도에 비해 과도하게 대접 받아

등록 2009.07.31 11:55수정 2009.07.3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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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직업적 신뢰도 10위권 밖으로 밀려나

흔히 성직자로 분류되는 승려, 목사, 신부들의 직업 신뢰도가 다른 직업군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이 지난 21일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만 19세 이상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한국인이 가장 신뢰하는 직업'에 대해 조사한 결과, 종교인 중에는 천주교 신부(74.6%, 11위)가 가장 신뢰도가 높고 승려(64%, 18위), 목사(53.7%, 25위)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가장 신뢰하는 직업은 소방관(92.9%)으로 나타났고 간호사(89.9%)와 환경미화원(89.2), 직업 운동선수(82.1%)와 의사(80.9%)가 그 뒤를 잇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중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직업군은 정치인(33위)이었다. <시사저널>은 보도에서 소방관이나 간호사, 의사의 신뢰도가 높은 것은 생명이나 건강에 기여하는 직업군으로 화재나 재해 현장에서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이나 질병과 싸우는 의사와 간호사의 모습에서 직업이 내재한 이타적 가치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또 소득 수준은 낮으면서도 오물이나 쓰레기를 처리하는 환경미화원에 대해 높은 신뢰를 보냈으며 운동선수 역시 원시적 순수함 또한 직업 운동선수에 대한 신뢰도를 끌어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조사를 통해 흔히 성직자라고 불리는 종교인들이 10위권 밖으로 밀린 것은 한국의 종교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성직자라는 뜻이 말 그대로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자들이라고 풀이되고 그만큼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함에도 후순위로 밀린 것은 대중들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춰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천주교 신부가 종교인들 중에서 가장 신뢰가 높은 것은 지난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영향과 비교적 양질의 사제수급 체계, 낮은 재정비리, 체계적인 언론 관리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경우는 각종 폭력사태와 비리 등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수행문화가 살아있고 템플스테이 등 현대화 노력이 작용해 20위권 안에 들었다. 개신교 목사가 가장 하위에 위치한 것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일반 국민들은 개신교에 대해 청빈보다는 물질적 성장을 추구하고 '예수천국·불신지옥'을 외치는 배타적이고 무분별한 전도활동, 수준미달의 목회자 양산과 세습, 횡령과 사기, 성폭력 등으로 인해 종교조직이라기 보다는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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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가운데서는 천주교 신부의 신뢰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지난 2월 20일 오전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거행된 고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미국이나 영국 등 서구사회에서 성직자들이 대체적으로 상위권에 드는 것에 비하면 아직 한국에서는 종교의 사회적 역할이 미흡하고 사회적 자본으로서 기능을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한국에서 성직자들의 이미지는 헌신보다는 군림한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인권과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운동 현장마저도 일반 직업군들이나 시민사회활동가들에 비해 과도하게 대접받고 대표성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성직자들이 신뢰도 이상으로 과도하게 대접(?)받는 사회는 대체적으로 후진적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역사적으로 성직계급은 샤먼들로부터 유래했다. 이들은 원시적 문화에서 초자연 현상을 해석하고 주술을 통해 병을 고치고 때에 따라서는 절대 권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후 제정분리가 진행되면서 제사만 담당하는 직업으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권력을 향유했다.


붓다와 예수, 성직계급의 특권타파와 자비의 실천 촉구 

제사장 계급이 스스로 권력을 창출하거나 권력의 대변자 노릇을 하면서 민중위에 군림하던 전통을 깬 것은 붓다나 예수였다. 이들은 각각 브라만의 승려들이나 예루살렘 성전계급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구축한 거룩의 정치를 타파하고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신의 자녀들이 될 수 있음을 선포했다. 붓다는 카스트 제도의 근간이 되는 신정 체제를 비판하면서 출신성분이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에 따라 존재가 결정된다고 설법했고 예수는 신은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자비로운 존재임을 강조하면서 당시 성직계급이 무시했던 여성과 병자, 어린이, 이방인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했다.

붓다와 예수는 종교의 역할을 제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모순을 폭로하고 변혁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모든 존재가 해방을 꿈꾸었다. 변혁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제사장적 역할만 강조했던 종교는 거의 모두가 사멸했다. 고대 세계를 제패하고 화려한 문명을 자랑했던 중동의 바빌론제국, 이집트제국의 사제들은 통치 권력의 이익에 복무하고 민중들의 처지를 외면했기 때문에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사라졌다.

변혁의 종교는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강조한다. 깨달음과 하느님의 나라는 왕후장상·지위고하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였다. 성직자라고 깨달음을 먼저 얻고 무조건 하느님 나라에 간다는 보장이 없다. 그들은 단지 안내자일 뿐이다. 붓다와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가부장적 권위가 아니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면서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스승이면서 친구였고 민중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그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일부 성직자들처럼 말만 앞세우면서 성직자이기 때문에 존경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불교·기독교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붓다와 예수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진리를 추구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몸을 살랐던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만 보더라도 근래 우리나라에는 선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했던 경허, 만공, 수월, 탄허, 숭산, 성철 스님 등이 살다갔다. 그중 수월스님은 불교바깥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근대 한국 간화선을 중흥시킨 경허 스님의 제자로 평생을 중생이 겪는 고통의 현장에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눈 자비의 화신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수월 스님은 일제 강점기 조선유민들을 따라 두만강 너머 북간도로 건너가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낮에는 소먹이 꾼으로 일하며 밤에는 짚신을 삼으면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먹밥을 공양하는 등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인물이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살았던 그는 1928년 7월 간도의 한 계곡 바위 아래서 옷가지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입적했다. 성직자로서 어떻게 살다 가야할 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기독교와 천주교에는 문익환, 박형규 목사,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등 많은 성직자들이 70~80년대 군부독재시절의 암울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국제적으로는 나치에 저항했던 본 회퍼 목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다른 수형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막시밀리언 콜베 신부, 엘살바도르 군부독재자들에게 암살당한 오스카 로메로 신부, 빈자의 어머니 테레사 수녀  등이 참혹한 인간 말살과 고난의 현장에서 인간존엄과 인권의 가치를 되살렸다. 근래에는 달라이라마, 틱낫한, 고사난다 같은 승려들이 자신들의 국가(티베트·베트남·캄보디아)에서 벌어진 전쟁과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해 생명평화운동에 헌신해왔다. 이외에도 이름도 없는 성직자들이 세상과 이웃을 위해 살면서 이 세상이 아직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종교인들 노후 불안 등 세속적 고민에 매달리는 경우 많아

만일 앞서 언급한 인물들은 아니더라도 한국의 성직자들이 지금보다 더 큰 교회, 더 큰 불상, 더 큰 승용차에 연연하지 않고 이웃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다면 직업신뢰도에서 소방관이나 간호사, 환경미화원, 운동선수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10위 안에 들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일부 성직자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최소한의 역할은 물론 세속적인 의미의 직업윤리마저 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이들은 붓다와 예수가 극복하려했던 브라만교나 이스라엘 성전의 사제들처럼 제사(예배)와 염불(기도)만이 자신과 가족의 불행을 극복하고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속삭이면서 잿밥에만 눈독을 들이고 있다.

물론 성직자들이라고 해서 세속적 차원의 고민을 하지 말라는 것은 너무 가혹할 수 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은 존재들로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스님들과 목사, 신부들을 만나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 역시 덕과 악이 공존하고 호불호가 있으며 다양한 관심과 취미를 가지고 있고 돈과 건강, 노후문제에 있어서 민감하다.

무소유를 강조하는 불교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스님들의 많은 수가 노후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실천불교전국승가회 산하 불교미래사회연구소가 조계종 전국 스님 56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2008년 9월 23일 발표)를 통해 노후생활 염려 정도를 묻자 133명(23.8%)이 '매우 염려한다', 233명(41.6%)이 '염려한다'고 답했다. 스님들은 노후 불안요소로 거처(25%), 생활비(23.2%), 질병치료(21.8%) 등을 꼽아 사실상 의식주 문제를 걱정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님들은 가장 원하는 노후대책으로 의료 및 생활수발자 지원(39.8%)을 꼽았다. 이어 거처문제(35.2%)와 수행비용(18.2%)의 해결을 들었다. 또 가장 선호하는 노후대책으로 국가보험(37.7%), 사설 사암 운영(15.2%), 사유재산(12.3%)을 꼽았다. 스님들은 또 노후대책이 없어서 수행에 전념하기 어렵고(29.8%), 개인재산을 축적하게 되며(26.1%), 사설 사암이 증가(14.1%)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난다고 답했다.

개신교 역시 일부 교단 외에는 주거시설, 연금, 의료보험 등 성직자들의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한다. 이들은 결국 노후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교회성장에 매달리고 생계비 조달과 자녀들의 학자금 마련을 위해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면서 신자들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특히 수백개에 달하는 무인가 신학교 출신 목회자들 경우는 종교시장(?)을 더욱 혼탁하게 한다. 그들은 신의 축복은 교인 수에 비례한다는 왜곡된 교회관으로 양육되었기 때문에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 성장에 매달린다. 이들을 위해 마련된 교회성장 세미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들은 그런 방식으로 세계 최대, 동양최대 교회를 세우고 세속적 명성을 얻는 일에 골몰하면서 수십억에서 수백억의 헌금을 걷는 것에 전 생애를 바치고 있다.

그러나 건물의 크기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신자수가 수십만에서 수만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들의 이름이 국내외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음에도 그들이 사회로부터 존경받지 못하는 것은 소외된 사람에 대한 관심보다는 자신의 명성과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고 독재시대에 기득권 세력의 방패막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만일 순복음교회같은 초대형교회를 설립한 목사들이 사망한다고 했을 때 신문과 방송에서 요란하게 보도는 하겠지만 김수환 추기경 같은 전국민적 추모열기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종교지도자보다는 기업총수같은 이미지로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

성직자로서 직업윤리를 바로 세워야 살길이 있다

소방관들이나 간호사, 환경미화원들이 그들 앞에 성직자라는 그럴 듯한 명칭도 없이 당당하게 사회적 신뢰를 얻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앞으로 한국의 종교인들은 성직자가 아니라 좀더 솔직하게 종교업 종사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시민사회가 성숙하고 민주적 전통이 깊이 뿌리내린 서구사회에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 특정한 건물이 없이 카페나 체육관 등 문화시설을 이용해 법회나 예배를 드리고 성직자들은 일상적으로는 심리치유나 종교컨설턴트 같은 역할을 통해 생존모델을 찾고 있다. 그리고 신자들과 관계에서 권위보다는 수평적으로 대하고 재정도 회계사 등을 통해 관리하고 있다. 서구에서 제작된 영화를 보면 신자들이 목사나 신부의 어깨에 손을 얹고 대화를 하거나 손잡고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는 영리를 최고 목적으로 두고 착취적 관행, 부패에 물들었던 기업들조차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하면서 사회공헌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반부패와 투명성을 국가경쟁력의 척도로 삼고 있다. 또한 종교조직이 강점으로 삼았던 자원봉사나 복지시설에 대한 지원이 사회적 대세가 되고 있다. 종교가 설 땅은 좁아지고 있는 셈이다. 종교가 살길은 건물이나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 점점 확고해지고 있는 것이다. 종교인들 역시 세속적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최소한 사회적 기준에 따라 윤리적 기준을 만들고 행동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평가를 받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헌신한다면 사람들의 존경심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월 수백에서 수천만원의 수입이 있으면서도 종교적 특권을 앞세워 세금 한푼 안내는 성직자들을 납득할 국민들은 거의 없다. 그리고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세습하는 것은 재벌총수들 보다 질적으로 더 나쁘다. 한국의 성직자들이 직업윤리를 바로세우지 않으면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시각은 더욱 냉정해 질 것이다.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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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모.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씨알재단에서 홍보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씨알정신을 선양하고 시민사회발전에 기여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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