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발바리 자전거잔치 찍고 헌책방마실

[헌책방 나들이 210] 서울 용산 〈뿌리서점〉

등록 2009.08.16 14:34수정 2009.08.1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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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진기 렌즈

지난 2008년 8월 16일 새벽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뒤로 한 해가 흘렀습니다. 아기와 함께 한 해를 살아냈다니 참 용하다 싶고, 우리하고 한 해를 지내 준 아기가 고맙기도 하며, 큰 탈 없이 한 해를 지내온 아기가 대단하구나 싶습니다. 아직 몇 마디 옹알이만 하는 녀석이지만, 이제는 쉼없이 온갖 곳을 제 다리로 걸어다니고 싶어 하며, 언제나 제 엄마 아빠가 하는 양을 따라하는 데다가, 집안 온갖 살림살이를 들춰내느라 바쁩니다. 아주 잠깐 동안조차 가만히 있지 않고 잠마저 적어, 어김없이 제 아빠를 닮았구나 싶은데, 이제 똥오줌 가리게 하려고, 또 여름이라 날이 덥다 보니 집에서는 기저귀를 벗기고 알몸으로 지냅니다. 이러다 보니 밥상에며 책꽂이에며 이불에며 문간에며 똥이고 오줌이고 누고 싶은 대로 눕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기 보고 집 안팎 살림 꾸리고 빨래하고 기저귀 갈고 하느라 보낸 나날은 얼마나 길까 하고 헤아리면 참 까마득합니다. 그렇지만 앞으로 새롭게 보낼 나날이며 이제부터 새로 치를 일은 훨씬 많겠지요.


우리는 혼인잔치를 따로 안 하고 삽니다. 아기가 백일이 되었을 때에도 따로 잔치를 안 했습니다. 돌을 맞이해서도 따로 잔치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가 고맙게 느끼는 분들을 아기를 데리고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밥 한 끼 함께 먹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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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떠나려고 하는 '발바리' 떼잔자칠 사람들. ⓒ 최종규


오늘(8/15)은 어디를 찾아갈까 생각해 보는데, 아침나절, 오늘은 '발바리(두 발과 두 바퀴로 다니는 떼거리)'가 100번째 맞이하는 잔치날임이 떠오릅니다. 다달이 셋째 주 토요일 낮 네 시에, 광화문 건너편 손바닥 만한 쉼터에서 자전거꾼이 모여 동대문 앞에서 꺾으며 종로를 한 바퀴 휘 돌고, 역사박물관에서 쉰 다음 한강다리 하나를 건너 한강 자전거길까지 달리는 떼잔차질을 가리켜 '발바리'라고 합니다. 한 해에 열두 차례 달리니 100번째라면 거의 열 해가 된 자전거잔치입니다.

오늘은 이 자리에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이태 사이에는 인천에서 도서관 열고 아이 낳고 기르면서 한 번도 고개를 내밀지 못했지만, 그에 앞서는 충주부터 자전거를 달려 빠짐없이 함께 달렸습니다. 반가운 얼굴을 모처럼 만나며 아기 인사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도서관으로 가서 길고양이 밥을 주고 책 몇 가지를 챙기고 집으로 돌아오고자 합니다. 그런데 볕이 퍽 좋은데다가 골목골목 집집마다 빨간고추를 잔뜩 널어 놓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대로 돌아가기 아깝습니다. 사진을 다문 몇 장이라도 찍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창영동부터 금곡동과 송림2동과 송림1동을 죽 돕니다. 한낮을 넘긴 햇볕은 맑고 밝다 못해 뜨겁기까지 합니다.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도는 동안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똑똑 떨어집니다. 시계를 보니 두 시가 가까워 옵니다. 네 시에 맞춰서 가려면 이제 돌아가야겠구나 싶고, 마지막 사진 몇 장을 더 찍으려는데 단추가 안 눌러지고 렌즈가 안 움직입니다. 뭔가 하고 렌즈를 툭툭 쳐 보고, 전지를 뺐다가 넣기도 하지만 말을 안 듣습니다. 아차, 그렇구나. 렌즈 굴대가 부러졌는가 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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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딩숲 사이를 지나 첫길을 나서는 발바리 떼잔차들. 우리 스스로 자가용을 줄이거나 버리고 자전거와 두 다리로 돌아온다면, 우리 삶터는 한결 맑고 밝아질 수 있으리라 꿈을 꿉니다. ⓒ 최종규


사진찍기를 해 온 지난 열 몇 해 사이, 렌즈를 어디에 부딪히거나 떨어뜨리지 않았어도 굴대가 부러지곤 했습니다. 얄궂게도 '보증기한 한 해'를 갓 넘길 무렵이라든지, 사진 몇 만 장쯤 찍었을 무렵 부러집니다. 렌즈이건 몸통이건 한 번 장만해서 잔고장 없이 죽는 날까지 쓸 수 있지는 않을 테니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나 저한테는 다른 렌즈가 없습니다. 이 렌즈 하나뿐입니다. 조금 뒤 발바리 자전거잔치에 가서 사진을 찍어야 하고, 이튿날은 돌잡이를 해야 하는데.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얼른 씻고 짐을 챙깁니다. 공휴일인데 용산 전자상가는 문을 열었을까 모르는 노릇이요, 발바리 자전거잔치 때에 맞추자면 서둘러야 합니다. 배고픈 채로 전철을 탑니다. 옆지기는 제가 렌즈가 맛이 간 뒤부터 힘이 쪽 빠졌다고 말합니다. 어쩌겠습니까. 사진쟁이한테 사진기를 빼앗은 셈인데. 글쟁이한테 볼펜과 종이가 없는 셈인데. 그림쟁이한테 붓과 그림을 안 주는 셈인데.


용산역에 내리고 보니 전자상가는 문을 열고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섭니다. 문간에 있는 가게에서 제 신을 보았는지 "검정고무신이네?" 하고 한 마디 뱉습니다. 집을 나서는 길에 어떤 이는 저보고 "외국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 하고 제 얼굴 앞에서 대놓고 말해서 '뭐 이 따위 얼간이가 다 있어?' 하고 쏘아 주려다, 바쁜 길이라 거들떠보지 않고 걸음만 재촉했습니다. 오나 가나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귀가 따갑습니다. 얼추 둘러보며 얼굴 좋아 보이는 분이 있는 가게 앞에 서며 렌즈를 묻습니다. 따로 흥정을 하지 않는데, "현금으로 주시면 삼만 원 깎아 드릴게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맞돈이 모자라 반반씩 하기로 하는데 삼만 원은 고스란히 깎아 준다고 합니다. 바가지는 아니고 아주 눅은 값 또한 아닙니다. 이달에 뜻하지 않게 목돈이 나가고 만다고 생각하니 아찔하지만, 여태껏 쓰던 렌즈가 좀 떨어지는 녀석이었으니, 이참에 한결 나은 렌즈를 쓴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맛간 렌즈는 손질해서 필름사진기에 내도록 달고 다녀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기 막 다루셨나 봐요?" "막 다룬 사진기가 아니라 언제나 들고 다니며 찍어서 그래요. 한번 잘 보셔요. 이렇게 곱게 닳아 버린 디지털사진기 보기 어려울 테니까요. 몇 만 장을 찍으면 이렇게 반들반들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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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째 발바리 잔치에서. 자전거 이야기를 꾸준히 띄우는, <오마이뉴스> 김대홍 기자님도 이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 최종규


 (2) 발바리 자전거잔치

다시 전철에 타고 시청역으로 갑니다. 시청역은 전투경찰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계단이며 안쪽이며 바깥쪽이며 길이며 길가며 전투경찰이 여름마실이라도 나온 듯합니다. 이 더위에 참 애먹는다 싶으면서도, 이 젊은 넋들이 이 더위에 왜 이런 데에서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짓을 하도록 시키는 권력자가 있는가 싶어 슬프고, 이 젊은 넋들은 저희들한테 이런 짓을 시켜도 말없이 따라야만 하는가 싶어 슬픕니다.

땀을 쪼옥 빼면서 바지런히 걸어 겨우 발바리 자전거꾼들이 모인 자리에 닿습니다. 고맙게도 아직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식구가 막 닿을 때에는 모두들 떠나려고 할 무렵. 겨우겨우 사람들 사진 몇 장 찍고, 얼굴 아는 분들하고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100번째 발바리 잔치를 맞이해서 만들었다는 기념옷을 한 벌 장만합니다.

'오늘 함께 달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을까? 우리 식구는 아직 힘들고, 아이가 좀더 자라면, 아빠는 자전거 뒤에 수레를 달고 엄마는 따로 자전거 하나를 달리면서 함께 자전거잔치를 즐길 수 있겠지. 멀리 서울까지 나오지 않아도 인천에서도 즐길 수 있으며, 인천하고 이웃한 수원으로 마실을 가며 즐길 수도 있고. 자전거잔치에 마실을 올 때에는 아예 여러 날 묵을 생각을 하면서 길을 떠날 수 있겠지. 인천에서 서울을 가더라도 42번 국도로만 밋밋하게 달리기보다, 인천 골목골목 차근차근 누비면서 골목여행을 하고, 골목여행을 끝내고 부천으로 접어든 다음에는 부천 상동 호수공원도 한 바퀴 돈 다음, 시흥이며 광명이며 안양이며 거쳐서 과천을 가로질러 서울로 접어들 수 있겠지. 이렇게 서울로 접어들면, 아빠와 엄마가 그동안 단골로 다니던 헌책방을 한 군데씩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책도 보며 다리쉼을 하는 가운데 마음밥을 먹어도 좋고. 돌아오는 길은 파주와 문산을 거쳐 강화와 김포를 돌아 인천 율도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려도 즐거울 테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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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오늘날 세상 흐름으로 따지자면 자가용을 몰며 싱싱 달리면 인천에서 부산까지도 대여섯 시간이면 달릴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금세 숙숙 고속도로로만 가로지르면, 우리가 선 이 땅을 느낄 수 없습니다. 시간은 줄이지만 삶은 없습니다. 아니, 시간을 줄인다기보다 우리 깜냥껏 넉넉히 즐길 시간을 쓰지 못하니, 외려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오다 나라찌라고 하는 어느 목사는 《지게꾼》이라고 하는 책에서, 맨몸으로 조선으로 넘어와서 전라도 광주부터 한양까지 스물닷새에 걸쳐서 걸어서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이는 이때 '말과 지식으로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은 일이 얼마나 잘못인가' 하고만 생각했지만, 몸소 스물닷새를 두 다리로 걸으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느 살림집에서 밥과 잠자리를 얻는 동안, 당신 고향나라 일본에는 없거나 잊혀져 가는 사랑과 믿음을 깨닫고는 깊디깊이 이 나라를 아끼고 돌보는 일에 몸바칠 수 있었다고 밝힙니다.

예전에는 서울부터 부산까지 '하루 만에 자전거로 달리기'를 해 보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달려 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좀더 느긋하게 짬을 내지 못한 탓이 있으나, 자전거를 하루이틀 한 해 두 해 더 타고 또 달리면서, '그런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달려 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하루 만에 달릴 수 있다는 셈이 나왔지만, 여러 날에 걸쳐 좀더 느긋하게 우리 땅과 길과 삶터를 느껴야 제대로 된 '자전거 달리기'가 아닌가 하고 깨달았습니다. 인천에서 춘천을 가든, 인천에서 목포를 가든, 인천에서 제주를 가든, 좀더 많은 마을을 샅샅이 누비고 돌고 부대끼면서, 이제까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던 내 이웃이 누구이고 내 곁지기가 누구인가를 받아들일 때가 더 기쁘고 신나고 재미있고 보람있지 않겠느냐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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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신나서 전철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아기. 사람들이 자리를 내어주건 말건 아기는 이렇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즐겁습니다. ⓒ 최종규


생각해 보면 제 삶은 '알맞게, 그러나 좀더 느리게' 꾸리는 빠르기입니다. 인터넷으로 책을 장만하지 않고, 굳이 인문사회과학책방에 전화를 걸어 책을 주문하거나 헌책방을 찾아가 '목록에 올려지지 않은 책'을 스스로 하나하나 살피면서 찾아 읽는 매무새가 그러합니다. 잘 빠진 아파트나 으리으리한 번화가에서 벗어나 수수하고 조용한 골목동네에서 살면서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고, 또 골목동네 한켠에 조그맣게 도서관을 열어 놓는 모습이 그러합니다. ㅇ마트 ㄹ마트 같은 데에는 안 가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술 한두 병을 그때그때 사서 마신다든지, 동네 옛 저잣거리에서 떡볶이와 순대와 찐빵을 곧잘 사서 먹는다든지 하는 나날도 그러하고요.

어느새 100번째를 맞이한 자전거잔치 '발바리'는 자전거만 타자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전거로만 달려야 한다고 외치는 발바리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우리 삶에 자전거가 함께 있으니 더욱 즐겁다고 말을 거는 발바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 자전거에 올라타면서 알맞게 달리고, 또는 좀더 느리게 달리며 내 땅과 내 이웃과 내 터전과 내 삶을 좀더 깊이 느끼고 맛보자고 하는 발바리라고 느낍니다.

 (3) 용산으로 돌아와 헌책방마실

바삐 돌아친 하루이다 보니, 발바리 자전거꾼을 떠나 보내고 나서 기운이 쪽 빠집니다. 옆지기가 묻습니다. "이제 어디 가요?" 참말 어디로 가야 할까 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갈 데가 있나? 이래저래 렌즈를 새로 장만하느라, 그러다 보니 발바리 잔치에 늦게 오느라, 하루가 뒤틀려 버렸습니다. 게다가 배는 고프지, 아기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힘들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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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뿌리서점> 앞. 마침 발바리 자전거잔치도 있었는데, 헌책방마실을 자전거 타고 온 분도 있습니다. ⓒ 최종규


마땅한 밥집을 찾아서 걷지만 마땅한 밥집을 못 찾습니다. 종각역 둘레 나무숲 그늘에서 다리쉼을 합니다. 아기는 그늘자리에서 뜀박질하듯 걸어다니면서 웃습니다. 그렇구나, 넌 이렇게 걸어다니기만 해도 기쁘구나. 네 아빠는 늘 그렇게 되뇌고 다짐을 하면서도 또 잊고 거듭 잊는구나. 다시 기운을 내자. 어차피 여기까지 애먹고 고단한 판에, 좀더 고단하게 걸어다니면서 한 시간이나마 느긋하게 쉴 밥집을 찾아보자!

어그적어그적 걷다가 인사동 못 미칠 무렵 골목길 안쪽에 있는 ㅅ밥집에 들어갑니다. 옛 한옥을 고쳐서 만든 밥집이라, 이곳에서는 두 다리 쭉 뻗고 있을 수 있습니다. 아기는 방에서 밥 먹을 생각 없이 여기저기 걸어다니느라 바쁩니다. 그래, 그러면 넌 그렇게 놀아라. 엄마 아빠는 밥 먹고 쉬자!

인천 밥집과 견주면 밥값은 곱배기로 비싸고, 부피는 1/3밖에 안 되는데다가 반찬마저 얼마 없는 밥차림이지만 맛있고 달게 비웁니다. 두 사람 몫으로 일만육천 원어치 밥을 먹으나 배속에 뭔가 들어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데, 뭔가를 더 시킬 생각이 안 듭니다. 새로 시켜 보았자 돈은 돈대로 들면서 외려 더 허거프지 않을까 싶습니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섭니다. 새롭게 힘을 내어 아기랑 걷습니다. 이제 아기는 잘 못 걷습니다. 힘이 들 테지요. 하루 내내 신나게 걸어다녔으니. 아기를 안고 전철을 탑니다. 전철에는 사람이 제법 많지만, 그래도 듬성듬성입니다. 우리는 자리를 얻어 앉을 생각은 없었지만, 어린 아기한테 자리를 내어주겠다며 일어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용산역에 닿습니다. 아기를 안다가 걸리다가 하며 건널목 앞에 섭니다. 용산역에 있는 백화점 주차장 들머리를 지키는 젊은이는 자가용 드나드는 일에만 마음을 쏟을 뿐, 이 자가용들이 신호에 걸려 건널목 한복판에 뻘쭘하게 멈추어 서게 되어도 뒤로 물리거나 앞으로 당겨서 사람들이 걷기 좋도록 하는 데에는 마음을 하나도 안 쏟습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 스스로 건널목 한복판에서 앞으로든 뒤로든 비킬 생각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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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아주머니는 더위에 땀을 흠뻑 흘리면서, 당신 아이 돌보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 최종규


이제 헌책방 〈뿌리서점〉에 닿습니다. 그동안 우리한테 수많은 책을 알게 해 주고 만나게 해 준 〈뿌리서점〉 아저씨와 아주머니한테 우리 아기가 돌을 맞이했다고 말씀드리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우리는 연년생으로 아이를 키웠는데, 이제 숨을 돌리려고 하면 또 한 애가 있고, 애들 치닥거리를 하다가 조용해졌다 싶으면 또 어디론가 가서 말썽을 피우고 있고, 진짜 정신없어 죽는 줄 알았어요. 애들 어떻게 키웠는지 몰라."

갓 들어온 듯한 책묶음을 봅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책이 잔뜩 보입니다. 이렇게 만나기는 쉽지 않으니, 가방이 무거워도 모조리 장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끈을 끌르고 하나하나 꺼냅니다.

《姜信道 엮음-基初朝鮮語 (1)》(對外貿易敎育出版社,1991), 《중국 현대사 상식 (상)》(연변인민출판사,1984), 《중국 현대사 상식 (하)》(연변인민출판사,1984), 《풍몽룡,채원방 엮음/최재우 옮김-동주렬국지 (3)》(료녕인민출판사,1985), 《풍몽룡,채원방 엮음/최재우 옮김-동주렬국지 (4)》(료녕인민출판사,1985), 이렇게 다섯 권을 챙기고, 《중공중앙선전부 리론국 편찬-맑스주의철학학습요강》(연변인민출판사,1990)을 펼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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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나온 책들. ⓒ 최종규


.. 군중에 의거하자면 명령주의를 반대하여야 하거니와 추미주의도 반대하여야 한다. 군중의 모든 투쟁은 다 그들의 자각과 자원에 기초한것이여야 한다. 지도자의 책임은 군중을 계발하고 그들의 각성을 높여주며 자원의 원칙하에 그들이 조직되도록 도와주며 그 시대의 내외환경이 허락하는 모든 필요한 투쟁을 점차 전개하는것이다 ..  (179쪽)

말은 틀림없이 옳고 좋다고 느낍니다만, 참말로 중국 정부가 '명령주의에 반대'하며 '사람들 자유'를 키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자유민주주의라고 내세우는 우리 나라 정부는 얼마나 우리네 자유와 민주와 자율을 북돋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나라 정부를 이야기하기 앞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정부는 얼마나 올바르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게 나라살림을 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네스코 엮음/이극찬 옮김-인간의 권리》(문교부,1957)라는 책이 보입니다. 1948년 12월 10일에 나온 '세계인권선언'에 바탕을 두는 이야기책으로 나왔다고 하는군요. 이무렵에는 우리 정부에서 먼저 이와 같은 책을 펴내기도 했는데, 문교부에서 "인간의 권리"가 무엇인가를 찾거나 살피기는 했어도, 1950년대 우리 정부는 조금도 이 나라 사람들 권리를 지켜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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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골마루, 높고 쌓인 책탑과 책꽂이 사이사이 반가운 책을 만나는 몫은... ⓒ 최종규


《학생문제연구》(유네스코한국위원회,1970)라는 책은 1969년까지 여러 교수들이 뜻과 글을 모아서 엮은 책이라고 합니다. 책에 실린 글을 기획하고 쓴 사람들 이름을 살피면 오병현, 고영복, 이영덕, 현승종, 성내운, 오주환, 김경수, 이렇게 일곱 사람입니다. 이 가운데 '성내운'이라는 이름이 있어 이 책은 여느 흔해빠진 책이 아니겠다는 느낌이 들어 집습니다. 차례를 보면, 1부는 〈외국의 학생운동〉을 다루고, 2부는 〈한국 학생운동의 역사적 고찰〉을 다루며, 3부는 〈한국 학생운동의 현황〉을 다룹니다.

.. 학원 민주화 운동은(1960년 사월혁명 뒤) 세 가지 국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나는 자율적인 학생회 조직이고, 둘은 어용교수의 퇴진운동이고, 셋은 학교 행정 체계의 민주화 요구였다 ..  (162쪽)

책에 실린 이야기를 찬찬히 살펴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살아낸 여러 대학교 교육학과 교수들 삶과 생각을 어떤 눈길로 보여주고 있는가를 돌아보는데, 1960년에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다음, 대학교에서 '학원 자율과 민주와 평화'를 꿈꾸며 이루려 했던 숱한 일들은 얼마나 이루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율로 꾸리는 학생회'나 '어용교수 몰아내기'나 '민주에 바탕 둔 학교 행정' 가운데 이루어 낸 일이 있었을까요?

.. 5ㆍ16군사혁명은 4월혁명의 계승이라는 명분을 들고 일어났다. 혁명이 성공했을 때, 혁명주체들은 한손에 구악의 일소와 민생고 해결을, 다른 손에 민족주의 기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무능했던 제2공화국 정부와는 다르게 단호한 결단력과 박력 있는 실천력을 보여주었다. 혁명은 4월에 뿌린 씨앗을 결실하려는 의욕을 강하게 풍겼다. 절대적 자유 안에서 혼란을 체험하고 피흘려 성취시킨 대학의 이상이 다시 좌절되는 비운을 경험했던 학생들은 혁명정부의 과감한 시책에 지지성명을 냈다. 구심력 없이 난무했던 학생의 현실참여를 반성하면서, 귀중한 민족적 체험이 가치 없이 쇠진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러나 4월혁명의 기본 명제가 5월혁명으로 인해 소멸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군사제도의 권력 장악은 학원에 놀라움과 고뇌를 주었던 게 사실이다. 일부 극단론을 주장한 학생집단이 있었기는 했지만, 건전한 민족의식이 자명하게 받아들였던 통일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공격받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격한 지식인이 검거되었으며, 자유의 상당한 부분이 억제되었다. 이상주의에 차 있던 학생들은 다시 냉엄한 현실을 보게 되었고, 이 사이에서 숨길 수 없는 고민을 느꼈다 ..  (172∼173쪽)

어느 모로 보나 《학생문제연구》는 '낡은' 책입니다. 철지난 책이요 해묵은 책입니다. 자그마치 쉰 해쯤 묵은 옛날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섣불리 '흘러간' 이야기로 젖혀둘 수 없다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2009년 오늘에도 1961년 5월 뒤에 일어난 숱한 아픔과 생채기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독재자 한 사람을 몰아낸 다음 얻은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가운데 이참에는 군사독재자한테 억눌리면서 더 뼛속 깊이 자유와 민주와 평화를 빼앗기는 동안 몸부림친 이야기는 그저 옛날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오늘날에도 국가보안법은 살아 있고, 민간인 사찰은 그치지 않으며, 언론출판집회결사 자유를 제대로 누리지 못합니다. 노동3권 가운데 어떤 권리를 우리가 누리고 있습니까.

- 1963.3.28. 서울대, '갯벌이 옥토된다'는 구호 아래 덕양향토개척단의 간촉공사 위한 모금운동 전개.
- 1964.3.26. 이화여대, 경비정 건조 모금운동 시작.
- 1964.4.10∼11. 서울대, 고대, 연대에 괴소포 도착.
- 1964.4.17∼18. 서울대, 문리대, 사대, 학원사찰 중지 요구코 데모.
- 1965.8.25. 서울 시내 각 대학 만여 명 데모. 무장군인 출동. 무장군인 고대침입사건 발생.
- 1965.10.15. 서울대 농대, 전국 코스모스 심기 운동 전개.
- 1966.9.27. 서울대 학생총회, 삼성재벌 밀수규탄 성명서 발표.
- 1966.10.22. 유기천 서울대 총장, 충무(忠武) 발언.
- 1969.6.10. 서울대 기독학생회, '에로문화 화형식' 개최.
- 1969.12.11. 고려대 500명, 과외활동 제한 규탄 학원자유쟁취 선언.

책끝에 '학생운동 연표'가 붙어 있습니다. 1950년대 끝무렵부터는 거의 날마다 집회와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고 나오는데, 사이사이 남다르다 느껴질 일이 있어서 몇 가지를 옮겨 봅니다. 1963년만 하더라도 '갯벌 메우는 일'이 우리 삶터를 어떻게 뒤바꾸는지를 생각하지 못했구나 싶고, 1964년에는 여자대학 학생들 스스로 군대 문제를 깨닫지 못했구나 싶습니다. 1966년에는 2000년대 오늘날처럼 '삼성재벌 말썽거리'가 학생들한테도 큰 이야깃거리였구나 싶은 한편, 1969년 기독학행회가 했다는 '에로문화 화형식'이란 무엇이었을까 궁금합니다. 1969년에 말하는 '과외활동 제한'이란 입시과외를 못하게 했다는 소리인지, 학교 밖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일을 못하게 했다는 소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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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4)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장철 엮음-출판의 새 지식, 편집과 교정》(영윤사,1963)이라는 책은 1950∼60년대에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서울 혜원여자고등학교 8회 졸업사진책》(1983)이 하나 보여 넘겨 보니, 이 졸업사진책 임자가 받은 국민학교 졸업장에다가 졸업사진책 임자네 오빠나 언니가 받은 국만학교 졸업장이 함께 끼여 있습니다. 이 졸업사진책 임자는 처음에는 강릉에서 살다가 서울로 옮겨 왔음을 졸업장을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미의 여정 샘 내 강 바다》(아모레퍼시픽,2008)라는 두툼한 책이 보이기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궁금해서 펼쳐 보는데, '태평양 화장품' 발자취를 갈무리했습니다. 화장품 회사 역사를 다루면서 책이름을 '아무개 회사 몇 년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에 조금도 몰랐습니다. 이곳 '아모레퍼시픽'이라고 하는 데가 '태평양'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던 때 이야기를 퍽 꾸밈없이 적바림했다고 느끼면서 이 대목을 꼼꼼히 읽어 봅니다.

.. 다행히 이때의 파업은 이내 잦아들었다. 그것은 분명 종업원들의 다양한 욕구를 회사 발전에 필요한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노사 관계를 정립하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태평양은 이 시대의 요구를 정확히 읽지 못했다. 단지 다른 회사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수동적으로 시대에 끌려갈 따름이었다. 이러한 판단 착오가 노사 간의 불신과 갈등을 점점 키웠고, 그것은 마침내 1989년 4월의 파업을 거쳐 1991년 5월에 있었던 노사 협상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노조원들이 본사를 점거하는 최악의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불행한 사태는 이십 일 이상 계속되다가 끝내 공권력이 투입되어 노조원들을 강제 해산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이로 인해 회사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파업 기간 동안 회사는 마비되다시피 하여 생산ㆍ영업ㆍ물류 등 모든 부문에서 차질이 빚어지고 손실이 발생하였다. 특히 노조의 자사 제품 불매 운동으로 회사의 이미지는 커다란 손상을 입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불행한 손실이었다 … 1991년의 파업이 전혀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쓰리고 아픈 상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곪아버린 환부를 드러내는 상처여서 자기 점검을 가능케 했다. 상처가 아물면 새 살이 돋듯 노사 모두에게 새로운 노사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원점에서 다시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이제 그해의 파업은 열병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새 삶을 부여한 수술 자국으로 남았다 ..  (195,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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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책에 끼여 있던 상장과 졸업장. ⓒ 최종규


그동안 '비매품으로 나온' 삼성 역사나 엘지 역사나 현대 역사나 무슨무슨 회장 회고록 같은 책을 보면, 1980∼90년대 파업과 노동자투쟁을 '아주 나쁘게만' 그려 놓습니다. 그런데, 《미의 여정 샘 내 강 바다》는 좀 다르게 적바림합니다. 다만, 이렇게 적바림하면서도 이곳 태평양에서 자르거나 괴롭혔을 여느 노동자 아픔과 생채기는 다루지 못하지만.

"그때의 사태를 지켜보았던 이능희 전 사장은 '수원 공장과 관악 공장에서 제일 먼저 터졌지요. 얘기를 들어 보니 터지게 되어 있었습니다. 인권은 고사하고 인격마저 무시당하기 예사였던 게 당시의 실정이었어요. 근로자들을 이 xx야, 이 x아 하고 마구잡이로 부르고는 했다니 나머지야 긴말 안 해도 넉넉히 짐작할 만하지 않겠어요?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다가 사회 분위기가 바뀌자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겁니다.'라고 원인을 진단했다.(194쪽)"는 이야기는 한 줄 들어가지만, 이러한 '인권과 인격 짓밟기'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노동자 목소리'는 따로 한 마디 안 실립니다. 그나마 다른 재벌회사 역사책이나 회고록에는 이마저 실려 있지 않으니, 한결 나은 셈이라고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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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책 안쪽 모습. 예전에는 이렇게 빽빽한 책걸상을 들여놓고 있었습니다. ⓒ 최종규


.. "급한 돈이 또 필요했습니다. 그때 정주영 회장이 프로야구단을 갖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태평양돌핀스를 현대에 팔자고 건의했지요. 그때는 구조조정이라는 걸 저 나름대로 속 편하게 정리해 두고 있었습니다. 창피해도 급하면 파는 거지 뭐, 라고요.(서경배)" … 재계의 순위 자리를 두고 삼성과 자존심까지 걸린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던 현대로서는 얼마든지 프로야구단을 탐낼 만한 상황이었다. 신설은 허용하지 않을 때여서 굳이 프로야구단을 소유하려면 기존 구단을 사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었다. 현대의 매각 제의에는 이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서경배 대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일을 밀고 나갔다. 태평양돌핀스는 그동안 태평양의 기업 이미지 제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94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은 수십억 원의 광고 효과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돌핀스에 들어가는 비용 규모가 너무 컸다. 매년 수십억 원에 달하는 지원금 말고도 당시 태평양돌핀스의 현안이었던 전용구장 건설 문제,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 비용 등이 태평양으로서는 무척 부담스러웠다. 안 그래도 자금난에 시달리던 태평양이 돌핀스를 매각한다면 이중의 부담을 덜 수 있을 것이었다. 이렇게 태평양이 돌핀스의 매각을 두고 저울질을 하고 있을 즈음 미묘한 상황이 돌출했다. S사에서도 프로야구단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경쟁이 불가피했다. 제값을 온전히 다 받으려고 하다가는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평가액에 조금 못 미치는 450억 원을 제시했다 ..  (200∼202쪽)

인천에 연고를 둔 '태평양돌핀스'가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현대유니콘스'가 되었는가 하는 뒷이야기를 밝히는 대목이 여러 쪽에 걸쳐 나옵니다. 그무렵 스포츠신문을 보든, 또 야구밭에서 일하는 동무나 선후배한테서 듣든 하는 이야기로는 좀처럼 알기 어려웠던 몇 가지를 읽으면서, 이렇구나 이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늘 바닥을 헤매던 인천 연고지 야구단이었지만, 1994년은 '늘 꼴찌만 하던 설움덩어리'가 처음으로 큰소리를 냈고, 이 큰소리는 인천이라는 도시가 개화기 때부터 '무엇이든 서울로 바쳐 올리는 징검다리이자 공장지대이나 침대도시' 노릇을 했던 쓰라림을 살짝 쓰다듬어 준 일이기도 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야구단을 뒷배하던 회사가 지역사람들한테는 따로 어떤 말이 없이 구단을 팔았고,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천이라는 바닷가 도시 느낌'에 걸맞는 이름을 붙인 '돌고래(돌핀스)'는 먼지처럼 스러졌습니다. 게다가 몇 해 뒤에는 현대 재벌 스스로 돈으로 컸다가 돈으로 무너지면서 인천에 연고를 둔 야구단은 둘로 쪼개져 버렸습니다.

히유, 한숨을 쉬고 책을 덮습니다. 옆지기가 이제 집으로 가자고 말합니다. 아기도 힘들고 당신도 힘들다고 합니다. 하기는. 저도 힘듭니다.

〈뿌리서점〉 아저씨는 저녁을 들러 집으로 들어가셨고, 〈뿌리서점〉 아주머니가 남아 가게를 지키고 있습니다. "내일이 돌인데 어떡해. 우리는 가 보기 힘든데." "아니에요. 저희는 따로 돌잔치 안 하는데요. 그래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잖아요." "그래도. 아저씨가 빨리 나와 보서야 하는데." 아주머니가 부리나케 집으로 들어가십니다. 얼핏, 아주머니가 우리한테 돌맞이 보탬돈을 챙겨 주시려고 그러는구나 하고 알아챕니다. 아저씨가 나오기를 기다려 인사를 했다가는 어르신이 쥐어 주는 돈을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도 서둘러 짐을 꾸려 전철역으로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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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자리에 겨우 자리를 마련해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잠을 재웁니다. ⓒ 최종규


동인천으로 가는 급행전철을 기다리며 섭니다.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한테까지 자리가 안 돌아올 듯합니다. 전철을 타고 보니 모두들 잽싸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쉬게 할 자리를 얻지 못합니다. 바퀴걸상과 자전거를 놓는 자리에 아기를 데리고 갑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아기를 어르며 서고 쭈그리며 앉고 합니다. 맞은편에서 할아버지 두 분이 아기를 그쪽에 앉히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리 하나로는 아기와 아기 엄마가 쉴 수 없습니다. 또한, 이제 돌을 맞이한 '제법 큰 아기'인 탓에 한 자리로는 젖을 물릴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옆지기는 전철 바닥에 주저앉아서 아기한테 젖을 물립니다. 부천역을 지날 무렵 아기가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사람이 많이 타기도 했지만, 아기가 바닥에 누워서 잠들고 있어도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안역에 닿을 때까지 누구 하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지 않고 눈치만 보거나 아예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기만 합니다.

'아기를 데리고 마실을 나온 사람이 잘못인가? 아니다. 아기를 데리고 마실을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을 살피지 못할 만큼 우리들 모두 마음이며 몸이며 메말라 버리고 있는 셈이겠지. 이런 세상에서 우리 아기가 참 대견하게 한 해를 잘 살아냈구나. 이제 앞으로 훨씬 기나긴 나날을 살아내야 할 텐데, 앞으로는 어떻게 되려나? 앞으로는 우리 세 식구를 비롯해서 서로서로 좀더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으려나?'

동인천역에서 내립니다. 가게에서 마실거리 하나 사고 분식집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산 다음 집으로 옵니다. 세 식구가 함께 씻은 다음 늦은 먹을거리로 배를 채우니 온몸이 뻑적지근합니다. 아기는 일찍 안 자고 놀겠다고 버티다가 젖을 물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엄마와 아빠도 함께 잠이 듭니다.

덧붙이는 글 |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 서울 용산 〈뿌리서점〉 / 02) 797-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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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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