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청자에 빠졌을까?

고려 첫 귀족인 문벌귀족의 도자기, 비색청자

등록 2009.09.21 10:40수정 2009.09.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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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박물관은 가까운 곳에 많이 있습니다. 국립, 도립, 시립 박물관을 비롯해 개인소유박물관까지. 각 박물관마다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는데요, 시대적 순서대로 전시하고 있으니 틈나는대로 도자기를 보면서 당시 역사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박물관이 재미없다고 하는데요, 그것은 어른도 마찬가지. 덩그러니 놓여있는 전시유물만 휙 살펴보고 서둘러 빠져나가자면 조금 민망하기도 합니다. <도자기로 보는 역사>시리즈를 통해서 도자기의 색과 작은 균열,그리고 그려진 그림이나 글자 하나하나에도 담겨있는 역사를 알고 간다면 조금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자의 탄생을 다룬 지난 이야기에 이어, 이번 회는 <비색청자-순청자와 상형청자>가 탄생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2.그들은 왜 청자에 빠졌을까?

**강진 청자의 발견

나주로 피난 간 임금과 높은 벼슬아치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급히 피난 온 터라 그릇을 챙겨올 리 없고, 그렇다고 해서 백성들처럼 토기나 나무그릇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고려시대에 쓸만한 그릇을 챙겨놓는 곳은 부잣집이거나 절이었습니다. 피난 온 임금은 아마도 절에 머물렀고, 그곳에서 놀라운 그릇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다!'

저절로 탄성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늘의 도움일까요? 귀족과 왕실이 너무도 간절하게 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 것이 바로 푸른 빛 청자였으니까요.

전쟁에서 지면 백성들은 왕실에 대해 의문을 가집니다. '정말로 하늘이 내린 왕일까?'하고 말이죠. 나주까지 피난길에 오른 그들로서는 무능한 왕실로 보일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는데, 그럴 때 만난 것이 진짜로 푸른 청자였습니다. 하늘의 도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로 강진 청자입니다.

순화4년명 항아리는 갈색에 가까운데도 청자라고 부릅니다(일부에선 백자라고 하기도 합니다만). 최길회라는 최고의 도공은 왕실로부터 모든 도움을 다 받으며 청자를 구웠습니다. 하지만 원하는 푸른빛을 얻지 못하고 만 것이지요. 최고급 기술자들도 해내지 못하고 있는 새로운 도자기를 피난길에서 보게 된 것입니다.

강진 도자기는 주변 사원이나 부자들이 주문에 맞춰 만들었을 뿐 다른 지방으로 팔려나가지 않았습니다(토기나 도자기는 왕실용이 아니면 대부분 지역사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그래서 지역성이 가장 뚜렷한 유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개경의 귀족과 궁궐에서는 강진 청자가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개경으로 돌아온 왕과 귀족들은 서둘러 나성과 천리장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준비하는 한편으로는 청자개발을 서둘렀습니다. 옥과 청동기가 하늘의 자손이라는 증표였던 것처럼 푸른빛 청자는 고려 왕실을 위기에서 구해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벽돌가마의 몰락이 가르쳐준 진실

한편 서해안을 따라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던 벽돌가마에게는 호족이라는 후원자가 사라진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피난길에서 올라온 왕실과 귀족이 남쪽에서 가지고 올라온 놀라운 청자를 보는 순간에 말이죠. 햇무리굽 청자가 완성된 것입니다. 바로 진흙가마에서 해낸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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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무리굽청자 햇무리굽 청자는 청자바닥이 햇무리모양으로 두꺼운 테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중국청자인 오월자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지만 훨씬 날렵하고 세련되었습니다. ⓒ 강진 청자 박물관


남해안에 있었던 진흙가마는 변변한 후원자가 없었습니다. 도공들은 차를 즐겨 마시는 사찰이나 부자들에게 찻잔을 팔아 겨우 견뎠습니다. 어쩌면 질그릇을 만들어 팔아 생활비를 벌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이 벽돌가마와 그들을 갈라놓은 것일까요?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들과 호족의 그늘아래 옛 방식대로 만들어내기만 했던 벽돌가마의 도공들...

처음 시작은 같았지만 100년이 지나고 난 뒤 그들의 자리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벽돌가마에서 만든 그릇은 강진에서 만든 햇무리굽 청자의 적수가 못되었습니다. 햇무리굽 청자는 이미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순화4년명 도자기를 만든 것은 왕실에서 초청한 도공이니만큼 최고의 기술을 가졌지만 강진에서 조그만 가마에 청자를 굽던 사람들에게 밀렸습니다. 강진의 도공들이 우리 흙과 우리 물과 우리 나무에 대해 더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오히려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우리 것을 더 잘 알고 더 연구한 강진 진흙가마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벽돌가마로서는 최후의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아예 문을 닫을 것인지 아니면 강진과는 다른 도자기를 구워 틈새시장을 노릴 것인지. 경기도의 넓은 평야와 인천과 벽란도를 잇는 무역항이 가까워 부자들이 많은 곳에 있었던 그들은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백자였습니다.

중국에는 남부의 청자와 북부의 백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월국이 있는 월주지방은 남쪽이고 풍요로운 땅이 많아 농사가 잘 되는 곳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상징하는 푸른빛은 숭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청자는 그곳에서 오래전부터 인기를 끌었습니다.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유목민족이 많은 북쪽은 달랐지요. 날씨가 맑아 일 년 내내 강렬한 햇빛을 볼 수 있는 그들에게 눈부신 햇빛을 상징하고 그들의 생명줄인 우유빛을 닮은 흰색은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우리 민족의 선조인 부여도 그래서 흰옷을 즐겨 입었습니다). 중국의 북쪽 지방에선 백자가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그동안 한나라나 당나라가 어떤 나라보다 강력했던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북방민족에게 밀렸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것은 문화제국주의였습니다. 주변국가들보다 중국민족이 우월한 것은 힘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이지요(물론 그것은 돈으로 산 평화라고 할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송나라는 도자기 산업이 다른 이민족보다 절대적 비교우위를 가질 수 있는 훌륭한 문화산업이라고 여겨 적극 장려했습니다. 이때 남쪽 청자와 북쪽 백자라는 틀을 허물고 어느 가마에서든 백자와 청자를 전부 만들게 됩니다.

이것을 본 고려의 벽돌가마들은 인천을 통해 중국의 북쪽지방과 오가며 무역을 하던 상인들의 후원을 받아 새롭게 백자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청자의 시대입니다. 백자로 만든 햇무리굽 찻잔은 주목받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을 담지 못한 도자기의 운명은 그렇게 초라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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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주자 햇무리굽 청자 탄생에 도움을 준 월주청자입니다. ⓒ 강진 청자박물관


**진흙가마의 기적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은 강진청자의 푸른 빛. 왜 다른 곳도 아닌 강진에서 나온 것일까요?
청자가 푸른빛 색이 나게 하는 그 무엇 때문입니다. 0.1그램의 작은 차이와 섭씨 1도의 온도에도 미세하게 다른 색을 나타내는 그 무엇. 변화무쌍한 색을 드러내며 조화를 부리는 마술사는 바로 '철'입니다.

우리가 흔히 쇠를 철로만 생각하는데 우리 몸의 피가 붉은 것도 철 때문입니다. 철은 쇳덩이처럼 회색만이 아니라 피처럼 새빨간 색까지 다양한 색을 만들어내는 색채의 마법사답게 흙 속에 들어가 신비로운 빛을 드러냅니다.

대부분의 흙속에는 이 철분이 들어 있습니다. 지구에 가장 풍부한 금속성분 중 하나가 철입니다. 어두운 색의 바위나 어두운 빛깔의 흙은 철분 때문입니다. 수정처럼 투명하고 맑지 않는 한 그곳엔 어김없이 철분이 들어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야 최첨단 실험실에서 성분분석을 통해서 이 철분의 양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만 고려시대에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지요. 오로지 청자를 구워보면서 흙속에 들어 있는 철분의 양을 가늠해볼 수밖에. 

오늘날 최첨단 실험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가장 좋은 청자의 빛깔은 약 3%의 철분이 포함되어 있을 때 나타납니다. 그보다 적으면 연두색에 가깝고 그보다 많으면 어두운 녹색이 됩니다. 8%에 이르면 갈색을 띕니다.

순화4년명 도자기가 청자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철분에 의해 색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철분을 조절하지 못한 나머지 갈색이 되어 버렸지만 말입니다. 오죽하면 이것이 왕실의 도자기로 쓰였을까요.

쟁쟁한 도공들도 쩔쩔매는데 작은 마을 강진에서는 어떻게 흙속에 있는 철분의 양을 조절했을까요?

남해안의 도공들은 더 이상 쟁쟁한 후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을 포기시키진 못했지요. 그들은 '청자'를 만들기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작은 진흙가마는 만드는데도 큰 비용이 들지 않았습니다. 남해안에는 다행히 언덕이 많고,숲과 물을 구하기 쉬웠습니다. 진흙가마 도공들은 비탈길을 따라 진흙가마를 만들고, 근처에서 땔감을 구하고, 그곳에서 구할 수 있는 흙으로 그릇을 빚었습니다. 그러다 원하는 빛깔이 나오지 않으면 쉽게 가마를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조금씩 해남에서부터 해안선을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옮겨가며 가마를 만들고 그릇을 빚고 구웠습니다. 원하는 색을 가진 청자가 나올 때까지 그들의 도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원하는 흙을 찾았습니다. 3%의 철분을 가진 흙! 그곳이 바로 강진이었습니다. 오로지 그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법입니다. 그들이 가진 행운은 97%의 노력과 이 3%의 철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도자기 생산국가가 되었습니다. 진흙가마와 벽돌가마의 청자산업전쟁은 진흙가마의 최종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강진청자는 고려청자를 대표하게 되었고 벽돌가마는 완전히 문을 닫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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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청자상감발 1073년(문종)에 제작된 청자 사발입니다. 아직 고려청자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드러내지는 못하고 도자기가 식으면서 만들어지는 잔금도 많아 고급스럽게 여겨지지 않지만 적어도 유약을 다루는 기술은 이 때 완성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유약이 골고루 잘 스며들어 흘러내린 자국이 없고, 얇게 빚어져서 투박한 질그릇 냄새가 나던 순화4년명 항아리보다 세련되어 보입니다. 강진의 진흙가마 도공들이 왕실을 위해 구운 첫번째 도자기군 중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새로운 귀족의 탄생

고려 제 16대 임금인 예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중요한 결심을 굳혔습니다. 고급청자를 만드는 일을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에 따라 1108년에 자기를 굽는 자기소에 대한 개혁 작업을 시작합니다.

남해안에서 가장 좋은 청자를 만들어내는 가마에 아낌없이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최고급 청자 탄생 프로젝트를 위해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사당리 가마가 선택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들어질 청자는 최고중의 최고여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새로운 권력자가 탄생한 것이었지요.

고려사회는 관리들이 이끌어가는 사회입니다만 그들이 나라 봉급으로 받아 사는 동안은 최고급 청자를 갖는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요.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귀족뿐이었습니다. 봉급쟁이가 아니라 귀족. 고려시대 첫 귀족이 탄생한 것입니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나타난 귀족은 '문벌귀족'이라고 합니다. 학문을 닦아 관직에 올라 그걸 바탕으로 귀족이 되었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지요. 귀족이란 대대로 신분과 땅을 물려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데요, 과거제도와 전시과제도를 통해 호족들을 누르고 관료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고려 왕실이 어째서 귀족들의 탄생을 지켜보았던 것일까요? 아니, 어째서 귀족들을 만들어낸 것일까요? 그 해답은 유학에 있습니다.

삼국시대는 정복전쟁시대였고, 이후 남북국시대는 그런 고대국가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고려시대는 성종이후로 관리, 그것도 문관사회가 되었습니다. 문관들은 유학에 기반을 둔 통치이념을 가졌습니다. 유학은 임금과 백성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忠'과 '孝'는 기본적으로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따라서 효가 가정의 근본이듯이 충은 나라의 근본이었습니다. 임금들이 좋아할 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공자가 처음 유학을 창설했을 때에 이 개념은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당시는 춘추시대, 모든 군주들은 백성을 재산취급을 하였지요. 마치 삽이나 도끼처럼 밭을 일구어 재산을 불려주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장에서 적을 물리치거나 영토를 넓혀주는 도구. 당연히 군주와 장수들은 백성들을 쉽게 죽였고, 재판 없이 처형했으며,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비인간적인 만행을 목격한 공자는 군주에게 '예치'를 가르쳤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대하듯이 백성을 대한다면 그런 나라는 강해질 것이라고 역설한 것이지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힘의 논리만이 있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라 '예(禮)'라고 불리는 새로운 관습법에 의해 재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진정한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예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그 골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학이 정식 국교로 선택되기 시작한 것은 한나라. 자로 잰 듯한 법치를 표방하였던 진나라의 멸망은 백성을 힘이 아니라 이념으로 다스릴 때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고, 한나라 무제는 동중서의 제안을 받아들여 '유교이념'을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동중서에 의해 왕도사상은 군주에게는 통치의 정당성을 주었고, 유학자들에게는 그런 통치에 대한 비판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 활동의 무한자유를 주었습니다.

따라서 유학자들은 돈이나 시간의 구애 없이 공부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대가는 백성들의 충성. 고려왕실로서는 꽤나 매력적인 거래였습니다.

물론 임금이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설파하는 유학자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겠지만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귀족'이 되게 해주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려 왕실은 이웃에 있는 송나라(북송)를 보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당나라가 전쟁으로 세계를 주름잡았다면 송나라는 애초부터 전쟁엔 관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중국이 역사상 가장 선진국이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송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 더 '지식'을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 결과 송나라는 과학, 기술, 문화, 상업이 발달해서 전 세계가 송나라 상인들로 들끓었습니다. 전 세계 귀족들은 송나라의 문물을 꿈꾸었습니다. 송나라가 칼과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기보다 지식인인 유학자 관리로 다스린 지식경영이 이루어낸 결과였습니다.

고려도 그런 지식강국을 꿈꾸었지요. 그러려면 안정되게 지식을 탐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자를 키우는 일에 큰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학문을 연구하고 발전시킬 사람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들이 귀족대접을 받도록 하기 위해 제도까지 바꾸었습니다. 임금으로서는 골치 아픈 군인들인 무관보다 그런 문관들을 더 우대한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그것이 고려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문종 임금은 5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에게는 귀족대접을 했습니다. 신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땅인 '공음전'을 주었으며 자식에게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도 벼슬을 할 수 있는 '음서'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전국의 젊은이들은 유학공부를 위해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국립학교인 국자감 외에 개경에 11개를 포함한 모두 12개의 사립학교인 12공도가 생겼는데 그중에서도 최충이 세운 9재학당은 과거합격률도 높고 학문수준도 높아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런 바탕은 나라를 이끌어가는 관리들에게 힘이 되어 문종 임금이 왕위에 있었던 1046년부터 고려시대의 황금기라고 할 만큼 진전이 있었습니다. 도자기는 세상을 손에 쥔 사람들의 상징물. 귀족들의 품위에 걸맞는 새로운 도자기가 필요해졌습니다. 그것이 최고급 청자제작 프로젝트를 위한 도자소설치의 숨은 이유였던 것이지요. 예종임금 시절, 문벌귀족은 세상 꼭대기에 오른 기분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비색청자, 송나라를 감동시키다

1123년 중국 송나라 사신으로 왔던 서긍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평소 도자기에도 조예가 깊어 고급 도자기를 보는 눈이 남달랐던 터라 고려의 고급 관리들이 가진 색다른 청자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하며 전 세계 돈깨나 있는 부자들의 넋을 놓게 하며 주머니를 털어오던 오월자가 최고인 줄 알았던 그로서도 고려 도공이 만든 청자의 신비로운 빛에 푹 빠졌습니다.

그 후 그는 자기나라 황제인 휘종에게 고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기행문인 '고려도경'을 만들어 바칩니다. 여기에서 그는 맑고 투명한 비취빛 청자인 '비색청자'를 본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도자기 강국인 중국에 고려청자가 마침내 제 이름을 가지고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비색청자는 잔금이 없고 차분한 푸른빛이라 볼수록 고요하고 깊은 느낌이 납니다. '수중금'에서도 송나라 청자를 제치고 천하제일 명품의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수중금은 중국에 사는 태평노인이 쓴 책으로 힘깨나 쓰고 돈깨나 있는 집 소장품 목록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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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죽절문주자 고려청자를 비색청자라고 합니다. 비취빛을 띄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 월주의 청자가 신비한 색이란 뜻으로 비색청자라고 불리는 것에 대응해 만들어낸 말이기도 합니다.비취빛은 옥과 같은 색입니다. 옥은 하늘의 징표와 같다고 여기는 중국인들이 청자에 흥분하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지금도 중국에선 옥은 다이아몬드 저리가라 할 만큼 인기가 있습니다. ⓒ 국립광주박물관


전 세계가 송나라 도자기에 열광할 때 그 중심에서 송나라 호사가들을 놀라게 한 비취빛 청자는 인종임금 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도자소를 정비해서 집중적인 투자를 한 예종임금의 아들이 인종입니다. 최고급 도자기는 마침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도자기를 손아귀에 넣은 귀족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하늘의 징표를 받아들고 들떠 있었던 것일까요?

그동안 귀족들은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우리학문과 문화를 매우 발전시켰습니다. 중국에 맞먹거나 어떤 면에서는 더 앞서기까지 했던 불교와 유교의 경전 연구결과들도 속속 내놓았습니다(고려시대 문벌귀족 양성 프로젝트의 최대 성과가 <삼국사기>와 <대장경>에 대한 탁월한 연구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고, 고려는 정복국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지배자의 자리는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귀족 간 이합집산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지요. 결혼을 통해, 그리고 관직독점을 통해 귀족 사이에는 뚜렷한 힘의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소수독점 귀족들은 자신들의 힘을 바탕으로 관직을 팔거나 힘없는 백성들의 땅을 가로채 대농장을 소유하였고, 재산을 빼돌리거나 은밀한 사병양성소가 되어버린 불교의 사원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들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족중의 귀족인 '문벌귀족'이 태어났습니다.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은 왕비를 배출한 외척가문인 경원 이씨 가문과 관직을 통해 힘을 기른 유학자들이 중심이 된 개경출신귀족인 김부식 가문. 이들의 힘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당연히 새롭게 관직에 오른 이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신진관료라고 하는데 불교와 전통신앙을 통해 세력을 키운 서경(평양)출신귀족들로 묘청과 백수한, 정지상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귀족을 꿈꿨겠지만 그들에겐 먹을 게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권력은 소수의 문벌귀족의 독점아래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신진관료들은 개경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문벌귀족들을 몰아낼 궁리만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외척출신 경원 이씨가문의 이자겸이 사단을 냈습니다. 경원 이씨는 11대 문종 임금부터 17대 인종 임금까지 무려 80년간 10명의 딸들을 6명의 임금과 결혼시켜낸 외척집안입니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던지라 오만방자해진 나머지 스스로 임금이 되려고 난을 일으킨 것이지요. 이미 손에 쥔 권력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아예 나라를 제 수중에 넣으려고 할 만큼 문벌귀족들의 힘이 커졌다는 방증이기도 했습니다.

개경문벌귀족과 서경신진관료는 일단 손을 잡고 이자겸의 난을 진압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둘의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뿐, 그들은 곧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눴습니다.

묘청과 정지상은 외척에 시달리며 골치가 아픈 인종임금에게 서경으로 도읍지를 옮기자고 제안했습니다. 임금은 솔깃했습니다. 그러나 개경에 터전을 두고 힘을 키운 김부식은 결코 이일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인종 임금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위기에 빠진 묘청이 반란을 일으키고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로서 최후의 승자는 외척도 신진관료도 아닌 유학자 출신의 문벌귀족. 그들의 손아귀에 권력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인종 임금시절인 1135년의 일입니다.

비색 청자는 이토록 무시무시한 귀족들의 다툼 속에 고고하게 탄생했습니다. 마치 진흙탕속에 뿌리를 두고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그래서 청자의 빛깔이 연꽃잎을 닮은 것일까요? 귀족의 손에 권력과 재물이 커갈수록 고려청자의 비색은 더욱 짙어져가고 있었습니다. 곧 몰려올 먹구름을 예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순청자와 상형청자

-무늬없는 비색청자(순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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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소문과형병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가장 완벽한 비색청자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고려는 불교국가였습니다. 불교에서 가장 숭배 받는 것은 지혜를 얻은 사람입니다. 연꽃은 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청자찻잔에 녹차를 마시는 것은 그 지혜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청자에 밥과 차를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은 지혜를 얻은 사람인 부처처럼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청자소문과형병'은 비색청자 중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 담긴 청자로 여겨집니다. 모양도 빛깔도 더 이상 좋을 수 없습니다. 참외 모양으로 만든 병을 '과형병'이라고 하는데 참외 속에 수많은 씨앗이 들어 있는 것처럼 모든 일이 잘 되고 많은 자손을 두기 바라는 뜻에서 즐겨 만들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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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청과형병 북송대에 만들어진 청자로 선명한 하늘빛을 띄고 있는 최고급 도자기입니다. ⓒ 영국 퍼시빌 데이비드 재단


송나라에서 만든 참외모양 병이 매우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가 송나라 청자를 보고 베낀 것입니다. 송나라 문화는 세계 최고였으니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 참외모양 병이 훨씬 더 색도 모양도 안정되고 깊이가 있습니다. 중국을 뛰어넘은 비색청자를 괜히 칭찬했던 것이 아니지요.

이처럼 청자는 처음엔 참선을 돕고 지혜를 얻기 위해 마시던 찻잔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점점 다양하고 화려한 모양으로 바뀝니다.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품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학문이 깊고 높다고 여겼던 귀족문화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비색청자가 권력의 다툼 속에서 더 찬란하게 꽃을 피웠던 것은 모두가 이런 상징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상형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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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투각 칠보문 향로 이보다 더 정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모양과 비색으로 고려청자중 가장 돋보이는 도자기입니다. ⓒ 국립중앙박물관


모양을 본뜨는 것은 인류가 흙을 주물럭거리는 그 순간부터 해 온 일입니다. 토기로 오리나 배, 사람모양을 만들었던 것처럼 청자로도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들었습니다.

이 청자를 본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중국에서 보아온 상형청자와는 달랐기 때문이지요. 중국에서 청자로 모양을 만드는 것은 투박하고 웅장한 청동기를 대신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황제들의 전설을 간직한 청동기의 모조품을 청자로 만들어 부잣집 서재에 하나씩 두었습니다.

고려의 상형청자는 달랐습니다. 매우 섬세하고 화려합니다. 두 나라의 귀족들이 청자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중국인들은 고대 황제들인 요순임금이 다스리던 시절을 이상향으로 생각합니다. 세발솥을 걸어 백성을 먹이는 것을 제일로 여기는 황제와 온가족이 모여 농사를 지으며 논두렁 밭두렁에 모여 나와 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태평성대'라고 합니다. 전쟁과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중국인들로서는 그럴법합니다. 유교는 이런 이상적인 시대를 최고로 발전한 세상으로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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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력식로 청동기시대의 이상사회를 상징하는 세발솥으로 북송시대 관요(나라에서 운영하는 가마)에서 만든 것입니다. ⓒ 대북 고궁박물관


우리나라는 송나라보다 귀족들이 불교적인 세계에 더 심취했습니다. 불교에서 사자는 진리를 의미합니다. 맹수의 왕인 사자 앞에서는 그 어떤 동물도 몸을 사리듯이 진리 앞에서 헛된 생각들은 사라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연꽃은 고요하고 고귀한 진리의 세계를 의미하고요.

그래서 고려시대 귀족들은 사자와 연꽃으로 모양을 만든 청자로 향로를 만들었습니다. 향은 하늘로 오르는 고귀한 영혼을 상징합니다. 송나라가 청자만 고집하지 않았던데 비해 고려시대 귀족들이 청자만을 만들었던 것은 좀 더 불교적인 가치를 청자 속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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