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하나면 낙안읍성 관광 끝!

[낙안군 이야기 총정리 7] 낙안읍성 관광객 눈으로 보는 23가지 관광길

등록 2009.10.13 18:24수정 2009.10.14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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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주 - 이 글은 조선시대 지방 전통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낙안읍성(순천시 낙안면)에 관한 이야기로 매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고 수많은 정보와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지만 낙안읍성을 제대로 보고 갔다고 하는 개운한 소리가 들리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에서 사진을 곁들여 길라잡이 형식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전문적인 연구 목적을 위한 연구자들을 제외한 관광객 입장이라면 "이것 하나면 낙안읍성 관광 끝" 이라고 말해도 결코 손색이 없다고 자신한다.

1. 낙안읍성은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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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의 전경 (김남표 작) ⓒ 서정일


낙안읍성은 옛 낙안군의 치소(治所)로 1397년 김빈길 장군이 최초로 토성으로 쌓은 후 1424년 9월부터 여러 해에 걸쳐 석성(石城)으로 개축됐으며 지난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된 이후 복원을 시작해 주민이 실제 거주하는 살아있는 민속보존마을로 자리매김했다.

총 면적은 223,108㎡ (67,490평)로 축구장 면적의 약 33배에 이르며 그 중, 성내의 면적은 135,597㎡ (41,018평), 성 밖(50m까지)은 87,511㎡ (26,472평)다. 또한 성곽의 길이는 총 1410m로 장방형(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

낙안읍성은 3개 마을(동내리, 남내리, 서내리)에 걸쳐 조성되어 있고 가옥은 관아 건물 등을 제외하고 모두가 초가집이다. 그리고 인구수는 2009년 7월 31일 현재 총 288명(120세대)으로 그 중 성내에 202명(82세대), 성 밖에 86명(38세대)이 거주하고 있다.

읍성 내에는 3백~6백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老巨樹) 32그루가 있으며 그 중 15그루(은행나무 3, 느티나무 1, 팽나무 6, 푸조나무 3, 개서나무 2)가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는데 돛을 상징하는 은행나무와 객사 뒤편의 이순신 팽나무는 특히 유명하다.

낙안읍성과 관련된 인물로는 읍성을 최초로 쌓은 김빈길 장군, 군수로 있으면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전해지는 임경업장군, 판소리 동편제의 대가 국창 송만갑, 가야금병창의 최고봉 오태석 등을 꼽을 수 있다.


관람은 1년 연중 휴일에 관계없이 가능하며 어른 2,000원, 청소년(군인) 1500원, 어린이 1000원이며 단체는 각각 1500원, 1000원, 500원이다. 또한, 넓은 주차장이 동문과 서문 주변에 있으며 주차료는 무료다.

2. 주차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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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동문 주차장 모습 ⓒ 서정일


낙안읍성 주차장은 동문, 서문, 남문 세 곳에 있으며 아스팔트, 흙, 잔디 등 종류도 다양하다. 그 중에서 가장 넓기도 하고 또 낙안읍성을 제대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동문 쪽에 있는 아스팔트나 흙으로 된 주차장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이곳은 순천시내에서 들어오거나 선암사, 벌교 등에서 올 때 낙안면 상가를 지나서 만나게 되는 가장 가까운 주차장이다. 가끔 낙안면 상가 쪽에 차를 세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관람의 동선이 달라지고 교통이 복잡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동문앞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좋다. 

주차장에는 화장실이 두 군데 있다. 여행의 여독을 풀기 위해서라도 용변을 보거나 손을 씻는 것은 바람직스럽다고 생각된다. 주차는 무료인데 차량 도난 등을 걱정할지 모르지만 지금껏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도 행사 등으로 복잡한 때에는 주의하는 것이 좋다.

3. 낙안읍성 들어가기 전 뿌리박물관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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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동문 아래쪽에 공사중에 있는 가칭 한창기 뿌리 박물관 ⓒ 서정일


본격적으로 낙안읍성을 관람하기에 앞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 있다. 바로 '한창기 뿌리박물관'이다. 지금은 비록 공사 중이지만 한창기라는 인물에 대해 되새김해 볼 필요는 있다. 지난 1997년에 작고한 고 한창기 선생은 인근 벌교 고읍리 지곡마을 출신으로 잡지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을 창간했고 우리의 전통 문화 사랑을 일생동안 실천한 분이다. 박물관에는 그가 평생 모은 다양한 전통 관련 예술품들이 진열될 예정이다.

적어도 내년 정도에는 정상적인 관람이 가능할 것으로 보이며 그때가 돼야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전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단지, 공사 중인 한편에 지난 2005년 구례군에 있던 백경 김무규 선생의 고택을 그대로 옮겨온 한옥이 이미 완공돼 있어 한옥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은 문화재적 관점에서 한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낙안읍성 밖, 동문에서 남문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다.)

4. 남문 풍경 놓치면 절반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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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남문을 통과해야 진면목을 볼 수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의 주 통로를 동문으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낙안향교를 비롯해서 마을이 주로 동문 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주차장까지 동문 앞에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동문을 통과해 낙안읍성 안으로 들어가고 있지만 낙안읍성의 진미는 남문을 통과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낙안읍성까지 와서 남문 풍경을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왜냐하면 남문을 향해 걷는 풍경이 장관을 이루고 남문 위에서 바라보는 들녘 풍경 또한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시원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른 성문을 통과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필자는 남문 통과를 적극 추천하고 싶다.

남문의 의미는 이렇다. 낙안읍성이 김빈길 장군에 의해 토성으로 만들어지던 1397년과 이후 석성으로 개축될 당시 이 지역엔 왜구의 침입이 잦았고 그 통로가 벌교 해안가였는데 당시 남문은 벌교를 향하고 있고 전투를 위해 군사들이 주로 남문을 통해 왕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미리 해안가에 매복해 있던 군사들이 척후병 등을 무찌르고 성 안으로 피신해 올 때 남문을 이용했을 것이며 적과 교전을 벌일 때도 남문은 든든한 방어막 역할을 해 줬을 것이다. 또한 성곽을 넘지 못하고 후퇴하는 왜구를 쫓아가 무찌를 때도 남문을 열고 군사들이 뒤쫓았을 것이다. 관람순서에서 남문이 첫 번째 코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으로 관람객 자신이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남문을 이용해야 하는 전부는 아니다. 남문은 낙안군의 진산이었던 금전산(金錢山)을 뒤로 하고 서 있는데 낙안읍성이 안치된 지형적 형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금전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 품안에 낙안읍성이 자리하고 있다. 단체사진은 바로 남문 쪽에서 찍는 것이 제일 멋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남문을 이용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동문이나 서문과는 달리 남문 입구주변으로 논과 밭이 있고 빙기등을 중심으로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시골의 정취를 느껴보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점이다. 시골 풍경을 느껴보기 위해 낙안읍성을 찾은 만큼 가장 시골스런 풍경이 있는 남문은 평생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5. 남문에 올라 낙안 평야를 바라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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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남문 쌍청루에서 바라 본 낙안 들녘의 모습 ⓒ 서정일


남문에 들어서면 곧바로 쌍청루(남문위의 누각)에 올라서서 성곽 밖을 둘러보길 권한다.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멀리 고흥의 첨산이 보이고 벌교 언저리도 보일만큼 시야가 시원스럽게 뚫려있다.

예전에 남문은 현재의 배밭이 비보숲 역할을 해서 다소 가려줬다고 하고 약 300여 미터 앞의 사포정까지 쪽배가 드나들어서 평야로만 이뤄진 지금과 같은 모양새와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남문위에서 보는 지금의 성곽밖 모습도 가히 환상적이다.

성곽 밖을 보면서 조용히 눈을 감고 그 때로 돌아가 보자. '그곳엔 말을 타고 창칼을 휘두르며 달려오는 왜구들의 함성이 있습니다. 점점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나는 활시위를 힘껏 뒤로 당깁니다. 성곽을 기어오르려는 왜구와 기나긴 전투로 이어집니다. 함성이 잦아들수록 성곽 아래엔 왜구의 시체들이 쌓여갑니다. 그리고 그들과 싸우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낙안군민도 있습니다.'

이제 다시 성곽안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그곳엔 또다시 금전산. 그런데 남문을 들어서기 전까지는 위풍당당하던 모습이 성곽 안쪽에서 바라보면 어느새 읍성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어머니품처럼 보인다. 남문 밖에서 볼 때는 그리도 당당하던 산이 남문 안에서 보면 포근하게 느껴지는 것을 무슨 연유일까요?

6. 금전산에는 이런 전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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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군의 진산 금전산의 모습과 처사샘 ⓒ 서정일


금전산은 낙안군의 진산이다. 해발 668미터로 아래쪽은 흙산이지만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바위가 많은 바위산으로 지역에서는 영험한 신기(神氣)를 가지고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 낳지 못하는 사람이 금전산 처사샘물을 마시면 아이를 갖게 된다"는 고전적 신기가 그것이다.

그 고전적 신기의 진원지는 금전산 7부 능선에 있는 처사샘으로 오르는 길은 불재쪽에서부터 가는 것이 훨씬 편하며 쉬엄쉬엄 가더라도 약 30분 정도면 도달할 수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처사샘은 약 15미터 정도의 큰 바위 아래쪽에 사람이 엎드려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 있는 바위굴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데 굴 안에는 어른 4명 정도는 서 있을 정도의 큰 공간이 나오고 그 안쪽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둘레 50센티미터, 길이 1미터 정도 크기의 바위샘이 있다. 그것이 바로 처사샘(구능수)이다. 금전산이 어머니 산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이와 같은 전설에서 오는 느낌인지도 모를 일이다.

7. 빙기등에 올라야 낙안읍성을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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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성곽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 빙기등, 이곳에 올라가야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 서정일


남문인 쌍청루에서 성곽위로 서문을 향해 걸어가면 성곽이 언덕을 타고 오르는 형세를 한 빙기등을 만나게 되는데 낙안읍성 성곽 전체가 평편한데 반해 이곳만이 계단을 오르게 돼 있다. 빙기등이라는 어원은 김빈길 장군이 토성을 쌓으면서 이 언덕에서 지휘를 한 것에서 유래됐다고 하는데 올라가 보면 그 말이 사실인 듯 낙안읍성이 전체적으로 환하게 보이고 필시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빙기등에는 두 가지 특별한 것이 자라고 있다. 하나는 대나무이며 또 하나는 차나무다. 대나무는 생활필수품으로 일상생활에서 안 쓰이는 곳이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지만 특히 이곳의 대나무는 죽창을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자라는 차나무는 순수 야생차로 대밭에서 이슬 맞고 자란 차 잎을 따서 만들었다는 죽로차인 셈이다.

8. 서문은 왜 복원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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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은 복원되지 않았다. 소방차의 출입 때문이라는 얘기가 통설로 돼 있다 ⓒ 서정일


빙기등에서 낙추문(서문)으로 가는 성곽길은 계단 없이 비스듬한 내리막이다. 그런데 분명 서문이라고 해 놓고 가서 보면 성문도 없고 누각도 없다. 문헌상에 정확한 기록이 없어 복원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지만 그 보다는 낙안읍성내의 모든 건물들이 화재에 취약해 소방차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훨씬 많이 통용되고 있다.

9. 기생 계단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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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엔 신기한 계단이 하나 있다. 밖에서 성곽을 오를 수 있게 돼 있는 계단이다. 서문쪽에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에서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밖에서 성곽을 오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계단이 있다는 사실. 서문 바로 옆에 있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만들어 놓았을까? 설마 적이 쉽게 성곽으로 올라올 수 있게 만들어 놓았을 리는 만무하고... 그런데 내로라하는 성곽 전문가도 해석하기 힘든 부분이라고 말해 정말 미스터리로 남는 계단이다.

어떤 이는 서문 너머 마을에 군수가 총애하는 기생이 살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그 기생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계단을 이용해 쉽게 적이 침투할 수도 있는데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 일명 기생계단이다. (빙기등에서 서문 쪽으로 내려와서 건너편 성곽으로 오르면 곧바로 있다.)

10. 낙안읍성 전시관에서 낙안군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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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이 낙안군의 치소로 옛 낙안군의 역사를 모두 기록해야 하지만 낙안읍성 자료관에는 반쪽 자료만이 있어 안타까움이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은 조선시대의 모습을 복원해 놓은 곳이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당시 낙안군에 속했으며 낙안군의 치소로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 낙안면, 별량면 보성군 벌교읍 고흥군 동강, 대서 등의 지역을 관장했던 곳이다.

이후, 1908년 10월 15일, 일제가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을 강제적으로 폐군시키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켜버린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다.

이런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낙안읍성 자료관을 들러볼 필요가 있다. 물론 현재는 행정구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낙안면 쪽에 치중한 자료들로 채워져 반쪽의 자료관이 됐지만 많은 사람들이 애정과 관심을 갖고 지적하고 개선해 나가면 올바르게 자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나마 낙안읍성이 어떤 곳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낙안읍성 전시관은 필수코스다. (북쪽 중앙부에 기와로 된 집, 새로 개관한 공연장 낙민관옆에 있다.)

11. 내가 낙안군수, 동헌, 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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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군수가 자리했을 동헌과 내아에 있는 마네킹 ⓒ 서정일


낙안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인 940년경부터 불렸으며 1392년 조선시대가 시작된 직후인 1397년 김빈길 장군이 토성으로 낙안읍성을 쌓았고 1442년 석성으로 개축되고 완료된 시점인 1446년에 낙안군이 됐다.

이후, 낙안군이 폐군되던 1908년까지 한때 현으로 강등된 적은 있지만 442년간 낙안군을 유지해 왔다. 이때 낙안군수가 집무를 봤던 곳이 동헌이며 기거했던 곳이 내아다. 이 두 건물은 북쪽 성곽 쪽에 붙어있으며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가끔 관람객들이 동헌과 내아에 와서 낙안군의 역사만큼이나 긴 세월동안 두 건물이 유지된 것으로 착각을 하지만 사실은 길어야 26년 정도 된 건물이다. 사적지로 지정되던 1983년부터 복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곳에 오면 건물의 역사성에 주안점을 두지 말고 고장이 찢기고 군민이 뿔뿔이 헤어져야만 했던 아픔을 비통한 심정으로 지켜봤을 비운의 낙안군수를 떠올리며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현재 동헌에는 낙안군수의 마네킹이 자리하고 있는데 그를 낙안군의 마지막 군수라고 생각하면서 바라본다면 나라 잃은 설움과 낙안군이라는 고장이 사라지는 아픔, 그리고 고을민들이 뿔뿔이 헤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참당함으로 처참했을 그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북쪽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헌과 내아는 연결돼 있다.)  

12.성곽에 구멍이 나있는데 이 또한 용도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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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또 하나의 미스테리, 북쪽 성곽에 20센티미터의 크기로 구멍이 뚫어져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 북쪽 성곽 벽에는 가로세로 약 20센티미터의 구멍이 뚫어져 있어 안에서 내다보면 바깥 풍경이 보인다. 무슨 용도로 사용했는지 정확치 않다. 성곽 전문가 또한, 안쪽과 바깥쪽에서 서신을 교환하거나 소리를 교환하던 통신구가 아닌가 하고 추측할 따름이다.

북문이 없는 것은 북쪽은 그만큼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인지 아니면 관아 등의 경호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출입구가 없는 만큼 일명 통신구가 그것을 대신하지 않았을까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일명 통신구는 북쪽 성곽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야외무대장 바로 뒤편에 있다.)

13.이순신장군 팽나무와 머리 풀어 지킨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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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객사 뒤편 이순신 장군이 심었다는 팽나무 ⓒ 서정일


낙안읍성에는 노거수가 제법 있다. 그 중에서 장터 난전에 있는 은행나무와 객사 뒤편의 팽나무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모두 수령이 500년에 가깝고 둘레도 어른 예닐곱 명이 손을 마주잡아야 할 정도다.

먼저 장터 난전의 은행나무를 포함해 세 그루의 노거수가 낙안읍성의 돛대역할을 한다고 한다. 낙안읍성이 물길을 헤치고 나아가는 배의 형상을 한 행주형이기 때문인데 성곽에 붙어있는 나무들은 노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장터 난전 은행나무를 주목해 보라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지난 6-70년대, 이 나무가 지금은 공터가 됐지만 당시에는 개인 마당에 있었다고 한다. 한창 나무가 귀하던 시절이라 이 나무 주인이 목재상에게 거금을 받고 팔았는데 그때부터 은행나무가 웅웅거리며 울기 시작했고 목재상이 톱으로 가지를 치자 그 안에서 구렁이가 나오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마을 주민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고 할머니들은 머리를 풀어헤치며 막아섰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돈을 준 목재상이나 받아 써 버린 주인이나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다행히 동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오늘날까지 살아있게 되었다는 사연 많은 나무다.

또한, 낙안객사 뒤편에 서 있는 팽나무는 1597년 여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후 군사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낙안군의 치소였던 낙안읍성에 와서 3일 동안 낙안 객사에 머물면서 객사 뒤편에 이 나무를 심고 낙안의 유지들과 국운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고 하는 설이 전해오는 의미 있는 나무다.

14.국창 송만갑과 가야금병창 오태석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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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은 국창 송만갑과 가야금병창의 중시조 오태석의 고향이다 ⓒ 서정일


1983년, 사적지와 민속마을로 시작된 낙안읍성이 지금은 국악의 본향으로 거듭나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이곳이 바로 국창 송만갑과 가야금병창의 중시조 오태석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송만갑선생이 살았던 집과 오태석선생이 태어났던 집은 그대로 보존돼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송만갑 선생은 판소리 명문대가에서 태어나 '아기명창'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발휘했으며 낙안읍성에서 김소희 명창 등 많은 제자들에게 소리를 전수했다. 지금도 낙안읍성에는 그가 생활하고 제자들이 기거했던 가옥이 보존돼 있다.

오태석 선생은 낙안읍성에서 태어나 송만갑 선생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박덕기 선생으로부터 가야금을 배웠다. 가야금병창(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소리를 함께 함)을 국악의 한 장르로 정립해 가야금병창의 최고봉이라 일컫는다. 낙안읍성을 방문하면 제자들이 이어가고 있는 판소리와 가야금연주를 들을 수 있다.(송만갑 선생과 관련 있는 집은 보존가옥인 짚물공예와 남내노인당이며 오태석 선생이 태어난 집은 낙안객사와 가깝게 위치하고 있으며 (사)낙안읍성가야금병창 보존회가 가야금 전수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15. 동서대로 걷다가 난전에서는 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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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난전과 식당의 모습 ⓒ 서정일


오태석 생가를 구경하고 동서대로로 나오면 길옆으로 가게들을 만날 수 있다. 낙안읍성내의 길은 알파벳 T자 형으로 동문에서 서문으로 길게 뻗어있고 남문에서부터 올라가는 길은 그 길과 맞닿아 있다. 그 만나는 지점이 난전이며 식당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관아가 있는 북쪽과 민가가 있는 남쪽이 동서대로로 갈려있는데 그 도로를 중심으로 한 계단 높은 쪽이 관아가 위치한 곳이며 한 계단 낮은 쪽이 민가가 자리한 곳이다. 난전과 음식점은 민가 쪽으로 대로 보다 낮게 옴팍진 곳에 있다.

난전에서 성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주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을 판매하고 있고 3군데 식당에서는 파전이나 동동주를 비롯해서 식사류를 팔고 있는데 팔진미는 낙안읍성의 특별음식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대접했던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16. 콕 집어 한 집이라면 김대자 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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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가옥으로 돼 있는 김대자 가옥은 옛 것을 간직하고 있고 다양한 생활용품을 보관해 놓고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내에는 저마다 특색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90여호의 가옥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 복원과정에서 새 목재를 사용해 만들어놨기에 형태는 분명 고전적이지만 느낌은 현대적인 것들이 많다.

만약 손때 묻은 집을 보고 싶다면 서문에 가까운 지점에 있는 보존가옥 김대자가옥을 추천한다. 기능인 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데 거무튀튀한 마룻바닥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집주인의 노력으로 오래된 생활도구들도 전시돼 있어 구경해 볼만한 집이다.

17. 기생청 (기방)은 어디에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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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에서 기방청의 복원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이 옛 전통도시인 낙안군의 치소였다는 것을 알고 들어왔다면 상당히 많은 의문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무기는 어디에 보관했을까? 양반들이 모여 시를 읊었던 곳은 어디일까? 조선시대엔 기생들이 있었다는데 그들은 어디에서 생활했을까 하는 것 등.

아쉽지만 향사당, 무기고, 기방청 등은 복원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입심을 보태고 있어 머지않아 복원돼 명실상부한 전통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이라 기대가 된다. 하지만 자칫 기방청은 영원히 복원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필자가 기방청의 복원에 관심이 가는 것은 조선시대 당시 사회계급으로는 최하층인 천민이지만 가무, 시, 서화에 능한 교양인이며 예술인이며 지식인이었던 그들의 문화도 분명 돌아봐야 할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술 접대와 성 접대라는 점을 부각시켜 사장시키는 것은 한 시대를 지금의 잣대로 재단해서 버리고 취하는 조작된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관광적 측면에서도 기생은 그 어느 계층보다 화려한 의상과 몸치장이 있었기에 그런 의상과 용품들을 전시할 경우 충분히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하고 그들이 펼쳐놓은 예술 또한 양반층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을 것이라 추측돼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도 보존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원래 기방청이 있던 자리는 동헌 낙민루앞 현재 잔디밭으로 조성해 놓은 곳이었으며 당시 관기는 15명이었다고 한다.)

18. 생활 속의 장인 누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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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내에는 다양한 생활기능인들이 살고 있다 ⓒ 서정일


낙안읍성에서 가장 낙안읍성다운 생활 속의 장인들은 누구일까? 흙은 빚어 생활자기나 용품들을 만들었을 도예방, 짚을 이용해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을 짚물공예방, 쇠를 녹여 각종 생활도구를 만들었을 대장간, 삼베 짜는 집, 천연 염색하는 곳이다. 많은 기능인들이 있지만 적어도 이곳들은 빼먹지 말자. (도예방은 남문 왼쪽, 대장간은 난전, 삼베 짜는 집과 천연 염색하는 곳은 기능인이 모여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 이 화장실은 꼭 보고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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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에는 특별한 화장실이 하나 있다 ⓒ 서정일


재래식 화장실을 우수개 소리로 '푸세식' 화장실이라고 한다. 그 화장실을 구경하려면 남문 입구 들어오자마자 우측에 있는 가옥이나 짚물공예를 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면 된다. 그런데 그 정도가지고 '이 화장실은 꼭 보고 나가자'는 말을 건네고 싶지 않다.

기능인 가옥을 방문할 때 낙안읍성군악대라는 푯말이 있는 집을 찾아가 보면 본체와 떨어져있고 담벼락에 붙어있는 낮고 문도 없이 거적으로 가려진 곳이 있다. 흡사 토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 초가집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맨땅에 볼일을 보는 화장실'이다.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가면 헛간처럼 생겼는데 예전엔 그곳에 넓적한 돌이 두 개 있었고 그 옆에 잿무더기가 있었다고 한다. 돌 위에 올라 앉아 볼일을 본 후에 삽으로 재를 가져와 뿌리고 다시 그것을 잿무더기로 던져놓으면 자연스럽게 거름이 된다는 가장 원시적이지만 자연친화적인 화장실인 셈이다. (낙안읍성군악대는 기능인 가옥이 몰려있는 서문쪽 민가에서 대장금촬영장 앞에 서당과 맞닿아 있는 집이다.)

20. 옥사와 연지는 세트로, 물레방아는 덤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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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내에서 남문쪽에 위치한 연지는 자연정화, 범인 도주 방지등의 목적을 갖고 있다 ⓒ 서정일


대체적으로 성내에서 옥사는 한쪽 귀퉁이에 자리 잡기 마련이다. 하지만 낙안읍성에서 옥사는 주민이 사는 곳 한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민가에 둘러싸여있고 성내에서도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는 옥사의 모습은 이색적이다.

더 이색적인 것은 옥사와 가까운 연지이다. 연지는 원래 구정물을 걸러 성 밖으로 내 보내는 역할을 했던 것인데 이곳에서는 죄인이 탈옥을 했을 경우 도망가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도 사용된 세트라 할 수 있는 것이 특이할만하다.

그리고 바늘 가는 곳에 실 가듯이 낙숫물이 있으면 물레방아가 있기 마련인데 현재 연지 옆에 있는 물레방아는 원래 있던 것이 아니라 민속마을 조성하면서 만들어놓은 것이어서 의미를 찾기 보다는 그냥 덤이라고 보면 된다.

21. 성곽에 올라 동문으로 걷는 길도 매력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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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남문과 동문 사이의 성곽은 가장 매력적인 성곽길이다 ⓒ 서정일


물레방아와 연지에 현혹돼 연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배회하게 되면 쌍청루(남문)에서 성곽을 따라 낙풍루(동문)를 걷는 낭만과 아름다움이 있는 환상의 성곽길의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1400여 미터의 성곽길 중에서 남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는 성곽길이 가장 낭만적이다. 마치 시골 들녘을 걷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봄이나 가을에 그곳을 걷는다면 싱그러운 바람과 꽃향기가 한층 흥취를 더해준다.  

22. 동문 나설 때 반드시 석구 머리 쓰다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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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에는 석구 세 마리가 동문앞에 서 있다. ⓒ 서정일


이제 낙안읍성과의 아쉬운 작별이다. 낙풍루를 내려와 동문을 통과하면 낙안읍성과는 안녕이다. 하지만 성문 앞에 있는 세 마리의 석구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악귀를 물리치고 행복을 비는 마지막 특별한 의식이 남아있다.

낙안읍성 동문 앞에 세워진 석구는 일본에는 많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낙안읍성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봉산이 악산이라 악귀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고 하는데 큰 성을 지킬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 한 사람 지켜주는 것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기에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개인의 안녕과 소원도 빌어봄직하다.

23. 잔디광장에서 고인돌과 함께 충분한 휴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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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동문앞에는 고인돌과 함께 쉼터가 마련돼 있다 ⓒ 서정일


동문에서 나오면 우측으로 잔디밭이 있고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산각도 있고 운동기구도 있고 벤치도 있다. 물론 손 씻고 용변 볼 화장실도 있다. 이곳은 낙안읍성 주변에 있는 여유로운 휴식공간으로 안전하고 행복한 귀갓길을 위한 마지막 쉼터인 셈이다.

* 인근 관광지로는 송광사, 선암사, 순천만, 태백산맥문학관, 나철생가, 보성차밭 등이 있다.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하지만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낙안군 #남도TV #민속마을 #낙안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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