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가족구성권을 제안한다

등록 2009.10.23 17:01수정 2009.10.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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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19일 오후 3시. 서울 마포구 망원동 민중의 집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날 행사 제목은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 - <찬란한 유언장>'이었다. <다양한 가족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연구모임>(이하 가족구성권 연구모임) 주관으로 치러진 이 행사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 중 누군가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후 그 관계는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비롯된 행사다.

그날 삼삼오오 모였던 사람들은 어찌 보면 평범한 정상 사람들과 다름없었지만, 속내를 들어보면 달랐다. 현재 몇 년간 함께 동거하며 지내왔던 레즈비언 커플들은 2004년에 공증까지 해두어 작성했던 유언장에 재산사항의 변동으로 인해 유언장을 다시 작성하기 위해 행사에 참여했다. 또 다른 한 여성은 4살 된 사내아이를 업고 문을 열었다. 이 참가자는 '혼외자'라는 이유로, 첫째와 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자신의 아이를 구청장이 직권으로 친아버지의 자식으로 바꿔서 기록해버린 일을 얼마 전에 알게 되어 이날 행사에 참석했다고 밝혔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이야기로 들리지만, 우리 사회에는 점점 혈연 중심이 아닌 공동체, 이성애자가 아닌 동성애자 커플, 장애인 공동체, 비혼 가족, 독신 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호주제 폐지, 그러나 튼튼한 정상가족

2005년 3월, 지난 50년간 한국사회 가부장적 가족구조의 근간을 이루던 호주제 폐지가 현실화되면서 그 이전부터 확산되었던 가족에 대한 논의들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 전 불과 두 달 사이 여성가족부에서 가족복지부로, 다시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여성부로 몇 번이나 뒤바뀔 뻔 했던 가족정책 담당 부서의 풍전등화 같은 운명은 가족정책의 정체성과 위상을 둘러싼 혼란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입증해 보였다.

이처럼 변화하는 가족을 둘러싼 지난 몇 년간의 무수한 논의들, 그것이 만들어낸 많은 정책과 제도 변화는 아직도 우리 주위를 겉돌고 있는 듯 느껴진다. 지난 2006년 8월 민주노동당의 제안으로 꾸려진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은 그동안의 다양한 가족 논의들 사이에서 '빈 틈'을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가족에 대한 기존의 담론과 제도에 균열을 내겠다는 포부로 출발했다.

한국사회의 가족이 기반하고 있던 부계혈통주의, 성별분업구조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지원하는 정책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현실 속의 가족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데 참가 단위들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다양한 가족을 분류하는 범주들은 끊임없이 '가족'에 포함되는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을 나누고, 어떤 가족이 '가족'에 포함되느냐를 결정짓는 기준들은 저출산·고령사회 '위기' 극복을 위해 회복해야 할 가족의 돌봄 기능, 경제적 생존단위로서 역할과 더욱 밀접히 결합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은 이러한 논의의 틀로는 가부장적 결혼과 가족제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어려우며, 따라서 배제되는 현실 속의 다양한 가족과 개인들의 실질적 요구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가족 담론과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 했다.

혼인과 혈연의 울타리 바깥에도 가족이 있다


그래서 주요하게 내걸었던 의제는 '가족구성권'이었다. 우리 모임은 가족구성권이라는 문제 설정을 통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가족·공동체를 구성하고 어떠한 공동체라 하더라도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다 구체적으로 의미화 하는 작업들을 수행하기로 했다. 그 방안 중 하나는 현재 혼인·혈연 중심 가족의 범위를 넘어 동성애 파트너를 포함한 다양한 생활동반자관계 가족공동체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우리 모임은 이러한 법률의 입법을 주요 목표이자 과제로 정했다. 물론 이러한 목표 설정은 우리의 활동이 가부장적, 이성애 중심적 정상가족의 특권적 지위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족 담론을 확산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은 대중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실천 활동에 앞서 주로 새로운 파트너십 관련 법률 제·개정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양한 논리를 개발하기 위한 토론과 연구 활동에 집중했다. 2007년부터 2008년 약 2년의 기간 동안 우리 모임 내에서 진행한 세미나의 주제는 매우 다양했다. 기존의 다양한 가족에 대한 연구자료, 시민사회단체나 연구자들이 진행한 가족차별 사례 분석자료, 생활동반자관계 논의에서 주요 정책 대상이 되고 있는 성소수자(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을 통칭하여 이르는 말) 가족구성권 또는 동성결혼에 대한 연구나 자료들을 참고했다. 해외 동성결혼 또는 동성·이성 간 파트너십 관련 법률을 정리한 자료들도 우리가 지향하는 파트너십 관련 법률의 상을 만들어가는 데 밑거름이 됐다.

이러한 토론과 함께 진행한 또 다른 작업은 여러 사회정책·제도 안에 가족이 어떠한 정의와 범주로 설정돼 있으며, 그것이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에게 어떤 차별을 초래하고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 전문가 초청 강의와 자료 분석을 통해 건강보험, 임대주택제도, 조세제도 등을 살펴보면서, 그러한 제도 설계의 근간이 되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대안들을 모색해 보았다.

2007년 6월 11일에는 "가족에 대한 발칙한 이야기: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새로운 길 찾기"라는 제목의 워크숍을 진행하여, 1년간 고민해 온 문제의식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제도 안의 가족 들여다보기'라는 주제로 건강보험, 임대주택제도 안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살펴보고 가족과 개인, 가족과 가족을 차별하지 않는 다른 제도 설계 방안을 모색해 보고, 해외 파트너십 관련 법률의 주요 쟁점과 한국 동성애자 운동에서 제기되었던 가족구성권의 문제의식을 정리하는 자리도 마련했다.

2008년 4월 24일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은 기존에 참여하던 단체, 연구자, 활동가들 외에 더 많은 단체, 개인들이 참여하여 입법 운동에 필요한 기초 자료들을 정리하여 <대안적 가족제도 마련을 위한 기초자료집>을 발간했다. △심층면접을 통한 다양한 형태의 가족공동체 성원들에 대한 사례 조사 △가족구성권과 관련된 이론적 논의 정리 △동성결혼과 생활동반자관계 관련 해외 법률 정리 △고용정책, 복지제도의 가족상황차별 검토 작업을 진행했다.

이후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은 '연구모임'이 갖는 성격의 한계를 좀 더 뛰어 넘어야겠다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명박 정부 내에서 가족구성권이라는 이슈가 얼마나 공론화될 수 있을까?"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답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중에게 우리의 이슈를 알리는 첫 단추를 열기위해 지난 2009년 9월 19일 기획한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 -<찬란한 유언장>' 행사를 갖게 된 것이다.

앞으로 가족과 가족구성권에 관한 연구 작업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그 외에도 실제 변화하는 가족관련 법·제도,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 나갈 수 있는 실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이러한 운동에 공감하는 단체, 개인들과 보다 광범위한 연대모임(네트워크)을 구성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실제적인 문제로 일반 대중들에게 접근하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가족구성권'을 좀 더 알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가족구성권'은 차별의 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삶에 있어서 가족을 구성하는 것은 실제 생활의 주거, 노동, 건강 등 다양한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는 고리인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종걸님은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종걸님은 가족구성권 연구모임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기사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월간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인권위 #가족구성권 #이종걸 #성소수자 #동성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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