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북한의 수구꼴통들은 어떤 부류일까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 (36회) 남북합동수사본부

등록 2009.11.06 10:39수정 2009.11.0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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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체 네 구가 실린 뗏목은 6월 15일 이른 아침 대동강 유람선 선원이 발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유람선 선원은 출항을 위해 선박 정비를 하고 있던 중 정체 미상의 뗏목 비슷한 것을 처음 보았다고 했다. 선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뗏목은 양각도 골프 연습장 방향으로 떠가고 있었다.

선원은 뗏목에 아무도 타고 있지 않는 것을 조금 이상히 여기게 되었다. 그는 때마침 배에 출근한 선장에게 보고했다. 선장은 망원경으로 뗏목을 살폈다. 선장은 들어 올렸던 망원경을 떨어뜨리듯이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의혹과 불안이 들어차 있었다. 선장의 망원경에는 벌거벗은 채 뒤엉켜 있는 여러 구의 사체가 포착된 것이었다.

희생자들의 신원은 곧 확인되었다. 그들은 모두 북한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남한의 희생자들과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북한 사회의 기득권자들, 이른바 '북한식 수구꼴통'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먼저 강간 후 교살된 여자는 유명한 가극 배우 오진옥이었다. 그녀는 가극 <피바다>의 성악 가수였는데 기존의 조청미를 제치고 주인공 배역이 확정되어 있었다. 이미 그녀는 당국으로부터 인민배우 칭호와 대우를 받고 있었다. 북한에서 인민배우는 행정부의 부상(副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최고 시설의 병원을 이용하고 고급 아파트를 제공받으며 월급도 다른 배우보다 세 배 이상 높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민공화국을 미국과 맞먹는 세계 최고의 강성대국으로 알았는데, 그것은 나이가 들면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신념이 공연 때에도 마음의 내부로부터 우러나와 노래와 연기로 발현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공산당 간부로부터 '혁명성이 가장 투철한 공연 배우'라는 칭찬을 자주 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평양에 있는 예술학교를 다녔다. 북한에서는 밤새 눈이 내리면 아침에 모든 시민이 나와 제설 작업을 하는데 예술학교 시절 그녀는 눈이 내린 날이면 누구보다도 먼저 김일성 동상 앞으로 달려가 눈물을 흘리며 눈을 치웠다고 했다. 그녀는 모 공산당 간부와 술을 마시고 밤늦게 귀가하다가 납치되었다.

그녀의 몸에는 'IGNORANCE'(무지)와 'B.K'가 씌어 있었다.


두 번째 희생자 최명순은 40대 중반의 여자였다. 그녀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먼저 그녀는 작가 겸 공연연출가였다. 동시에 그녀는 북한 노동당 통일선전부 부부장이었다. 북한에 있는 김일성의 동상과 상징물은 약 3만 개인데, 동상이나 상징물에 새로운 글이나 그림을 만들 때에는 모두 그녀의 재가를 받아야 했다.

그녀는 동화 창작도 많이 했다. 김정일이 유치원에 다닐 때, 교사가 '1+1은 2'라고 말하자 김정일이 '1이 될 때도 있다'고 말한 이야기는 그녀의 창작이었다. 김정일은 물이나 진흙이나 민족은 두 개를 합쳐도 또 1이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처 김정숙은 김일성이 낮잠을 잘 때 시끄럽게 우는 새를 쫓곤 했는데, 김정숙이 죽은 후에도 새소리가 들리지 않아 김일성이 마당을 보았더니 세 살 박이 김정일이 새를 쫓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녀의 동화집에 있는 것이었다.

1999년 어느 날 김정일은'산에 목초지를 조성해서 염소 사육을 강화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로부터 3년 만에 전국적으로 수십 만 정보의 목초지가 조성되고 염소가 4배로 늘어나는 기적이 이루어졌다는 노동신문의 수필도 그녀가 쓴 것이었다.

순안 비행장에 씌어 있는 구호'당이 하면 우리도 한다!'와 소년문화궁전 현관에 붙어 있는'어린이들을 지상낙원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구호도 그녀의 창작이라고 했다. 그녀의 가장 큰 공로는 평양 5·1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집단체조와 카드섹션을 총지휘하는 데에 있었다. 카드섹션이 만들어내는 아래 구호들은 모두 그녀의 창작이었다.

두벌농사, 종자혁명, 정보산업의 시대, 자주국방 무궁번영, 인민경제의 현대화와·정보화, 우리를 당할 자 세상에 없다. 흥하는 내 나라 풀과 고기를 바꾸자. 어딜 가나 인민의 휴양소와 요양소. 도처에 수력발전소, 수령님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시랴.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타승하신 천세의 명장. 그녀는 서평양의 스포츠 타운에서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납치되었다.

그녀의 몸에는 'THE TOTALITARIAN'(전체주의)와 'B,K'가 씌어 있었다.

세 번째 희생자는 김일성대학 정치학 교수 이동휘였다. 그는 김일성 사후 북한 사회를 결집시킨 이른바 '강성대국론'과 '선군(先軍)정치론'의 입안자였다. 대학에서는 실력이 없는 데다 정치성이 강해 소외 받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북한 정권의 수뇌들에게 '권력 세습이 갖는 논리의 취약성을 일소한 학자'라는 극찬을 받았다.

사실 외부의 관찰자들에게 북한의 수령제와 권력 세습은 봉건적인 절대주의의 부자 세습 이상으로 비치지 않았다. 북한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던 좌파 이론가들의 상당수가 김정일의 권력 세습 이후 북한에 대한 눈길을 거두어 버린 것이 사실이었다. 남한에서도 북한 비판의 핵심적 근거를 수령제와 부자 권력 세습에 두고 있었다. 정상적인 관점이라면 북한의 수령제와 부자 세습은 봉건적이고 반민주적인 전제정치의 전형일 수밖에 없었다.

이동휘 교수는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있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를 먼저 공격하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에 의하면 현대의 민주주의는 단지 부르주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민주주의가 자랑하는 선거라는 것은 부르주아들끼리의 위장된 잔치라는 것이었다. 그는 수령제와 부자 세습의 결과만을 가지고 말하지 말고 과정과 함께 분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사와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했다. 아울러 그는 김일성 수령의 인간적 숨결을 느끼며 성장한 김정일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그는 김일성 부자 우상화는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예방하는 인간주의라고 말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틈바구니에서 주체를 견지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임을 알아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동휘 교수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동격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함으로써 오히려 김정일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는 김일성의 직함이었던 주석직을 폐지시킨 브레인이었다. 김일성은 정신력으로 통치가 가능했지만 김정일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김정일에게 국방위원장직을 맡으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군 우선으로 하는 선군정치를 펼치게 해 물리적 수단인 군사력을 거머쥐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동휘 교수에 의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제 사회계의 주목과 경탄을 함께 받는다는 것이었다. 조선은 선군정치의 기적으로 명실상부한 인민의 나라, 자주성이 강한 나라, 도덕성이 고매한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인민공화국은 선군정치로 하여 가장 공고한 사회·정치 기반을 가진 위력한 나라로 강화되었다. 공화국의 수령, 당, 대중의 일심단결은 오늘 선군정치에 의해 매우 높은 수준에서 공고화되었다. 제국주의자들의 끊임없는 공화국 압살 책동과 이어 들이닥친 자연 재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견인불발의 정신으로 화를 복으로, 역경을 순경으로 전환시키면서 사회주의 강성대국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은 경제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동휘 교수는 경제적 어려움의 모든 책임을 미 제국주의의 경제 봉쇄에 있다는 논리를 만들어 냈다. 예컨대 평양 보통강 유역 서장 언덕에 짓던 105층짜리 유경호텔은 공사대금 지체와 계약 불이행으로 프랑스 기술진이 철수했기 때문에 공사가 중단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경제 봉쇄로 유리를 수입하지 못해 공사에 착오가 생겼다는 식으로 주민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경제 재건을 위하여 어느 정도 개방과 개혁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한은 2002년 7·1 경제개혁조치를 취하면서 3,40대의 간부들을 대거 기용했다. 북한 당국은 생산기여도에 따라 차등보상제를 실시함으로써 개인 경쟁을 유도했다. 북한은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를 줄이기 시작했다. 소유 제도를 다양화하고 기업에 자율성을 주기 시작했으며 개인간 주택 거래를 일부 인정한다고 발표했다.

이동휘 교수가 힘을 잃기 시작한 것은 7·1 경제개혁조치에 반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북남 화해 세력이 내세우는 '민족우선론'을 공격했다. 그에 의하면 민족성보다는 여전히 계급성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금강산 관광을 허용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물신(物神)을 불러들이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그는 개성공단의 건설에도 반대했다. 개성은 휴전선의 군사 요충지이자 고려의 고도(古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개성을 개방하면 안보에 지장을 초래함은 물론 유서 깊은 역사의 숨결이 오염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북한 사회에서 이동휘 교수 부류의 영향력이 여전이 크다는 데에 있었다. 북한에는 이동휘 교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지도층에 의외로 광범위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북한의 학계는 오히려 군보다 더 수구적이었다. 그들은 텔레비전에 남한의 거리가 비칠 때마다 남한 여인들의 복장과 외국어 간판을 경멸했다. 김정일이 남한 답방을 하지 않은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북한 수구 세력들의 발목잡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동휘 교수의 등에는 'SELF-RIGHTEOUS'(독선)과 'B.K'가 씌어 있었다.
#7`1경제조치 #김일성대 #선군정치 #부자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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