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 화양연화

[찬바람 불 때 다시 보는 영화 1] <화양연화>

등록 2009.11.20 17:55수정 2009.11.2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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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것은 그것을 볼 당시의 관람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매우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번 보는 것으로 지나칠수 없고 때마다 다시 생각이 나는 영화가 있게 마련이다.

 

쌀쌀한 날씨에 몸과 마음이 얼어붙어있다면 지나간 영화를 다시 보는 것도 좋은 감성 촉매제가 되기도 한다. 사람의 인생에서 영화라는 것은 다친 마음을 치료해 주는 의사이며, 기쁜 일이 있을 때 그 즐거움의 자리를 빛내주는 친구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추운 계절을 따뜻하게 녹여줄 따뜻한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프랑스와 대만의 합작영화인 '화양연화'는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소개되어

왕가위 감독의 새로운 작업스타일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1962년 홍콩에서 리첸과 차우는 우연히 같은 날에 이웃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그들은 정이 넘치는 유별난 이웃과 함께 하는 삶을 누리며 서로 음식을 나눠먹고 가족과 다름없는 행복했던 홍콩의 한 시절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행복의 틈새에서 불길한 예감이 스치게 되니….

 

리첸과 차우는 그들의 배우자가 서로 내연의 관계임을 직감으로 알게 된다. 하지만 서로의 남편, 아내에게 그 사실을 물어보지도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며 자신의 상처를 끌어안고만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차우가 아내의 생일 선물로 수리첸과 똑같은 핸드백을 사주고 싶다고 운을 뗀다. 그리고 혼자서만 막연히 생각하던 서로의 배우자가 벌이는 불륜 관계가 사실이라는 확신만 깊어지게 된다.그리고 그  두사람이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고 믿으며 괴로워한다.

 

그 뒤, 차우는 일본에 간 아내로부터 이별 통보로 짐작 가능한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아내의 생일날 리첸을 만나서 마치 아내와 저녁 식사 하듯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어서 먹는다. 그리고 아내가 좋아하던 겨자를 리첸의 접시에 덜어주고, 리첸 역시 그의 그런 행동에 충실히 응해 준다.

 

그후 차우는 '짧은 인생, 나를 위해 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그리고 그간 열망했던 무협 소설 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소설읽기를 좋아하던 리첸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차우는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리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조금씩 깊어져가고 주위에서의 눈초리를 의식한 차우는 싱가폴로 전근 갈 계획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녀와 자주 부딪치던 골목길에서 이별 연습을 한다. 그리고 '남과 다르다'고 부정해 왔던 것이 사랑이었음을 리첸도 깨닫고 서럽게 운다.

 

그후 차우가 싱가포르로 떠나기전 둘은 각자의 집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화양연화'라는 곡을 들으며,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한 시절이라는 노래 제목처럼 자신들의 짧지만 아름다웠던 지난 날을 회상한다.

 

싱가포르로 떠나는 날,차우는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몇번의 신호음이 울리는 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만다.결국 '표가 한장 더 있다면 나와 같이 가겠느냐'는 말을 마음속으로만 되뇌고 만다.

 

차우가 싱가포르로 떠나고 일년의 세월이 흐른 후 이번에는 리첸이 차우의 싱가포르 지사에 전화를 걸어 차우를 바꿔달라고 한다. 하지만 당사자가 전화를 건네받았을땐 말도 못하고 한참을 있다가 끊고 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내게 빈자리가 있다면 돌아와 줄건가요?'라고 되뇐다.

 

또다시 몇년이란 세월이 흘렀을 때 리첸은 예전에 차우와 이웃들과 어울려 살던 옛집으로 다시 이사와서 살게 되고, 이를 모르는 차우도 그 시절 이웃을 만난다는 이유로 다시금 옛기억을 떠올리며 그집에 들르게 된다.

 

모두들 어수선한 홍콩을 떠나는 분위기에서 이웃들은 모두 바뀌었고 예전의 이웃의 정은 과거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리첸이 살던 집에 '이제는 애 하나 딸린 여자가 산다'는 말에 차우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잠깐 스친다. 그리고 그곳에 리첸이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행복을 비는 마음으로 떠난다.

 

다시 세월이 흘러 1966년의 캄보디아에서 차우는 오후의 햇살이 쏟아지는 석조 기둥에 기대서 그 기둥에 뚫린 구멍에 가만히 입을 대고 있는다. 이를 먼 곳에서 동자승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 언젠가 그가 동료에게 얘기하던 '비밀을 묻는 방법'을 그곳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구멍을 막아서 자신의 사랑을 가슴속에 영원히 묻어버리기나 하려는 듯 구멍에는 짚덤불이 박혀있다. 그리고 그는 한결 강해지고 담담해진 얼굴로 그 곳을 떠난다.

 

▲뒷이야기 하나!

 

이 영화의 메이킹 필름에서는 차우와 리첸이 캄보디아에서 우연히 만나는 장면이 있다고 한다. 수리첸은 남편의 회사일로 함께 캄보디아에 따라온 것이었고, 친구와 캄보디아를 관광하던 리첸이 차우와 우연히 다시 만난다는 설정이라 한다. 그리고 차우가 '혹시 예전에 싱가폴로 전화하지 않았냐?'고 묻자 그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한다.

 

또 아직도 리첸을 잊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 차우의 새 여자 친구가 그와 함께 리첸이 살고 있는 예전 그 집으로 다시 찾아가서 그들이 만나는 기회를 만들어준다고 한다.

 

▲왕가위, 생동하는 카메라

 

영화의 매력은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을 자랑한다는 점일 것이다.〈중경삼림〉에서의 어지러울 만큼 난해하던 구성과 반대로, 이 영화에서는 지극히 정적이고 일반적인 화면위에 화려한 색채와 남다른 카메라 기법을 사용한다.또한 리첸과 차우의 배우자는 얼굴이 한번도 나오지 않고 뒷모습만 비춰주며 그들의 목소리 역시 비정상적으로 우울하고 먼곳의 사람들 같이 여겨지게 구성하여 주인공들에게만 집중되도록 구성한 점이 돋보인다.

 

▲주변 인물을 통한 주제 암시

 

영화 속 주변 인물들은 스쳐가듯 하면서도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다. 리첸의 회사 사장은 젊은 여자와 불륜의 관계를 가지며 집안에도 충실하느라 정신 없는 사람이다. 리첸은 사장의 심부름으로 그의 젊은 애인과 부인을 위해 똑같은 핸드백을 사다달라고 해외출장가는 남편에게 부탁하기도 하며 '불륜'을 현장에서 지켜보며 나름 '동조'하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결국 사장은 가정과 애인, 일 모두를 열심히 하기가 벅차다는 것을 깨닫고 애인에게서 선물 받은 과감함 색상과 디자인의 넥타이를 풀어내고 자신의 평상시 넥타이를 매며 '익숙한 것이 좋은 것이지' 하며 그 애인과의 만남에도 종지부를 찍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온 사장은 단정하게 염색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안경까지 쓰고서 일에 매진하며 리첸을 찾는 차우의 전화가 있었노라며, 자신이 불륜에 빠져있었을 때 리첸이 하던 일을 자신이 대신 하고 있는 귀여운 아이러니가 나온다.

 

이미 일상으로 돌아와있는 사장은 자신의 과거도 잊고 리첸의 '불륜' 일상이 어이가 없기도 하다. 리첸이 '내 사랑은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으로 차우와의 만남을 이어간 것처럼 사장 역시 자신은 남과 다른 사랑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이기심마저도 따뜻이 감싸준다.

 

결국 차우나 리첸, 사장 모두 남과 다를 바 없는 일종의 '불륜'의 잣대로 자리매김하겠지만 그들이 아름다운 한 시절로 기억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담담히 용납하는 누군가의 눈으로 보듯 그려지고 있다.

 

▲ 수많은 아류작의 모티브

 

국내에서 허진호 감독의 영화 '외출'에도 모티브를 제공해 주는 등  많은 아류작을 남긴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각종 CF와 드라마의 장면에서 감동적인 씬을 연출하는 데도 영향을 주었다. 드라마 '내이름 김삼순'에서 주인공 삼순이가 아픈 애인을 위해 참깨죽을 쑤어주는 장면은 '화양연화'에서 리첸이 '아무 의도 없는척' 하며 차우에게 참깨죽을 쒀다 주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 끝없는 이야기

 

이 영화는 2004년 개봉작인 '2046'과 연결되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홍콩의 과거와 미래를 그리고 싶었던 왕가위 감독이 자신의 구상한 바를 촬영하던 중, 필름의 일부는 잃어버리고 남은 것이 '화양연화'라고 한다. 그리고 '화양연화'를 촬영하면서 그 느낌이 강하게 나오자 촬영에 더욱 박차를 기하게 됐고, 그 전에 이미 구상하고 있던 '2046'은 '화양연화'가 개봉 된 지 몇 년 뒤에 나오게 된다.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소설 작업을 하던 작업실 방 번호가 2046호였고, 그 방에서 차우가 미래의 공상을 담은 소설을 쓰게 되는데 그 내용이 바로 영화 '2046'인 것이다.

 

현대에 와서 영화가 마음의 치료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다친 마음을 쉴 수 있는 매개체로서 영화가 기능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현실적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질 수도 있게 된다. 지금 영화가 필요한 그대들이여! 추운 날씨를 녹여줄 영화, 마음의 냉기를 가셔줄 영화를 찾아서 조용히 몰입해보라.

2009.11.20 17:55 ⓒ 2009 OhmyNews
#가을영화 #홍콩영화 #왕가위 #화양연화 #양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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