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에 빠진 내 청춘의 이유를 다시 만나다

[서평]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고집 <진보의 미래>

등록 2009.12.01 15:40수정 2009.12.0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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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믿었던 시절에 이 세상은 간명했지요. 선과 악, 옳고 그름이 분명했습니다. 타도의 대상도 분명했고요.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진리는, 오직 하나라는 믿음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진리는 '오직 하나'가 아니라, 오히려 2개 이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는 일은 혼란스러운 일입니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가 구분하기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린다면 모두 다 제 멋대로 살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움직일 수 없는 어떤 기준, 진실, 진리를 확정지으려 합니다. 확정해 놓은 이 기준과 진로 이 세상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싶어 합니다. 적과 동지를, 거짓과 진실을 그리고 진보와 보수를….

 

물론 진리는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하나 뿐인 진리는 우리 인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 진리를 향해 나아갈 뿐일 것입니다. 대화와 모색과 성찰과 반성을 통해서….

 

# 2

 

안희정 최고위원. 사진은 지난 2006년 열린 1219 4주년 기념강연회 모습. ⓒ 오마이뉴스 이종호

안희정 최고위원. 사진은 지난 2006년 열린 1219 4주년 기념강연회 모습. ⓒ 오마이뉴스 이종호

 

지난 1990년에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선과 악으로 양분되던 민주진영과 군부독재세력의 패싸움이 끝나 버린 시점이었습니다. 1987년 노태우 정부가 국민투표로 등장했지요. 이제까지처럼 쿠데타 세력이라고 말 할 명분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한 술 더 떠서 1990년 김영삼씨가 3당 야합을 해버렸습니다.

 

군부독재 정권이라는 타도 대상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까지 적과 동지를 나누었던 모든 사회정치적 기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민주개혁, 진보진영은 일대 혼란을 맞았습니다.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김영삼씨의 민자당에 들어갔지요. 수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역사에 대한 낙관을 포기하고 진보 운동을 포기했습니다.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낙담한 채, 전업(轉業)의 길로 나섰습니다.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신념 하나만은 지키려 자포자기식 옥쇄 인생을 선언했습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가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그때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의 전선에서 물러나서 패잔병처럼 후퇴할 때, 노무현 대통령은 여전히 민주투사였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혼란에 대해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에 이 세상에는 여전히 싸워야만 얻을 수 있는 수많은 과제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그때 무너지지 않는 그 분의 모습을 보면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이념의 전선이 무너지고 독재와 민주의 전선이 사라져도 살아있는 나무처럼 꿋꿋하게 서있는 그분의 신념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 곁을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 3

 

'진보의 미래'표지 ⓒ 동녘

'진보의 미래'표지 ⓒ 동녘

대통령님의 글 모음집, <진보의 미래>(동녘)를 읽었습니다. 진보와 진보주의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수많은 좋은 사례와 생각의 근거들을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말씀을 관통하는 아련한 그 분의 향기를 느꼈습니다. 내 청춘을 몰빵하게 만들었던 나의 우상, '노무현'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꿈속에서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의 청춘을 붙잡아 맸던 그 분의 향기가 무엇이었을지 짐작하시겠지요. 그 분의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역사와 현실을 대하는 그 분의 자세였고 그 분의 태도였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독백을 하곤 합니다.

 

"맑시즘의 휴머니즘은 사라지고 마키아벨리즘만 간직한 사람이 되어선 안된다. 휴머니즘은 진보운동의 원천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동학을 만나면 인내천 사상이 되고, 맑스를 만나면 계급혁명 이론이 될 뿐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잊지 말자.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일뿐이다."

 

# 4

 

진보의 미래, 무거운 수많은 주제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또 만났습니다. 정치와 정부와 국가를 주제로 21세기 현재의 전 세계 모든 민주주의 진영의 과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진보의 미래라는 그 구체적 논의에 대해선 이미 이 책에 다 거론하고 지적하고 계시기에 중복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거듭 음미하고 배우고 싶어졌습니다.

 

첫째, 어떻게 해야 저 분처럼 겸허하고 진솔하게 자신의 모든 생각과 주장들을 객관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하여 자신의 주장을 아집이 아닌 진솔한 대화와 모색 그리고 성찰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을까.

 

둘째, 모든 고민의 출발점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정략적이지도 공학적이지도 않은 그분의 향기, 그 향기의 본질은 책 서두에 나왔던 고민에서도 <여보 나좀 도와줘>의 서문에도 나오지요. 사람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염치였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라고 봉하를 방문한 젊은 엄마, 아빠의 요구에 그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 그것이 노무현의 맛이고 향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보주의자의 본질인 인간에 대한 사랑, 휴머니즘일 것입니다.

 

셋째, 언제나 역사는 진보한다는 역사적 낙관주의입니다. 95년 언젠가 낙담하던 저에게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개체(個體)로의 인간은 변화하지 않는 것 같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하지만 류적(類的)적 존재로서 인류와 그 인류의 역사는 늘 진보한다고 나는 믿는다." 혁명의 시대, 운동의 시대가 끝났다면서 모두가 낙담하던 그 시대에 그 분의 이 말씀은 저에게 금과옥조가 되었습니다. 그 힘으로 오늘까지 저는 진보주의자로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기성찰, 휴머니즘, 역사는 진보한다는 낙관주의 이 세 가지가 노무현에 빠져들었던 제 청춘의 이유였습니다. 진보의 미래는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만난 소중한 책이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님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안희정 기자는 현재 민주당 최고위원입니다.

2009.12.01 15:40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안희정 기자는 현재 민주당 최고위원입니다.

진보의 미래 (특별 보급판) -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쓴 시민을 위한 대중 교양서

노무현 지음,
동녘, 2017


#진보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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