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초보농부 요즘 무엇을 하나

나무에 말걸고, 완두콩 응원하기

등록 2009.12.09 09:31수정 2009.12.09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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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뜨락'인 숙지원(淑芝園)은 1/3쯤은 잔디밭이고 장방형 땅 둘레에는 철쭉과 감, 사과, 자두 등 유실수를 심었다. 우리의 쉼터가 되는 자두나무 남쪽으로 약 200평의 텃밭이 있다. 


10월 말에서 11월 초까지 고구마, 야콘, 생강, 토란, 울금을 수확하면 우리의 텃밭 농사는 거의 끝난다. 추석을 전후로 억센 풀도 더 자라는 일이 없기에 예초기를 짊어질 일도 없다.
해는 짧아지고 더구나 숙지원은 산골이라 해가 빨리 저물어 오후에 들르면 삽을 잡을 수도 없다. 게으른 농부에게는 놀 수 있는 핑계가 많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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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지원의 잔디길 아내의 모습이 멀리 보인다. ⓒ 홍광석


지금 숙지원(淑芝園)에 있는 소나무, 금목서, 은목서, 주목, 동백들은 상대적으로 푸른빛을 더하고, 울타리로 심은 남천은 꽃처럼 빨간 열매를 자랑한다. 자두와 매실 등 철 이른 과일나무는 꽃눈을 키울 채비를 하고 있다. 아직 묘목인 철쭉들은 서로 의지하며 다가올 추위를 대비하는 모습이다. 형체가 없는 씨앗들도 땅속에서 꽃피울 날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요즘에는 주말에나 숙지원에 간다. 아직 퇴비를 만들 능력이 없기에 퇴비는 농협에서 공급하는 것을 구입하여 사용한다. 때문에 특별히 삽을 들 일이 없다. 아니 못 찾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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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밭 배추,양파, 마늘이 심어진 밭이다. 겨울 숙지원을 지켜주는 것 같아 대견하다. ⓒ 홍광석


그래도 아내와 함께 텃밭에 들르는 건 중요한 하루 일과다. 소나무와 철쭉 같은 다년생 나무들은 스스로 크는 것이기에 대강 눈길만 주고 지나치지만 텃밭에서 자라는 마늘, 양파, 쪽파, 시금치, 완두콩, 갓과 비닐하우스 안에 심은 상추, 배추, 무 등은 우리 가족의 식탁에 오를 작물이기에 더 유심히 본다.

특히 마늘과 양파를 보면 그렇게 연약한 줄기로 겨울을 버틸 수 있는지 신기한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쉬 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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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파밭 마을 노인들이 씨앗을 주는대로 심었더니 팔아도 좋을만큼 되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도 내년까지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 홍광석


지난 가을 심은 쪽파도 푸르다. 쪽파는 김장철 양념으로도 쓰이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건강식품이다. 줄기와 뿌리는 머리를 맑게하고, 뿌리에 달린 수염은 감기에도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살짝 데쳐 숙지로 먹어도 좋지만, 김치로 담아 푹 익혀 먹으면 냄새도 없고 맛도 좋아 우리 가족이 즐기는 반찬이다. 아내의 말로는 내년 봄까지 먹어도 충분한 양이라고 한다.

그밖에 싱싱한 시금치나 토종 갓도 있지만 요즘 싹을 내미는 완두콩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을 넘어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서리를 이기고 싹을 틔워 바람만 불면 꺾일 것 같은 줄기로 겨울 추위를 이길 수 있다니. 그 강인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신비롭기만 하다. 풋풋하고 토실한 토실한 껍질 속에 나란히 들어 있는 완두콩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건 아내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아내는 새싹에 눈을 맞추며 감탄을 연발한다. 새싹을 응원하면 힘이 난다. 아마 응원하는 사람들에게도 힘을 얻을 것 같다. 희망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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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두콩 싹 겨울 땅에 솟아난 새싹이 아직 어리지만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 홍광석


숙지원에 있는 60여평의 비닐하우스는 여러모로 유용하다. 몇 가지 해결해야할 문제도 있고, 공부가 끝나지 않은 두 아들 때문에 집짓기를 조금 미루고 있는 중이어서 현재 비닐하우스는 우리 부부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의지처다. 비닐하우스는 겨울에도 채소를 가꿀 수 있어 더 소중하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상추를 비롯한 몇 종류 채소는 올 겨울 우리 식탁을 신선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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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안의 채소 한 겨울 식탁을 푸르게 해줄 채소의 일부다. ⓒ 홍광석


나무들에게 말을 걸고, 마늘과 양파와 완두콩을 응원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주일 쯤 먹을 푸성귀를 들고 오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아내는 인터넷에서 튤립을 구하여 심었고, 인터넷으로 사귄 사람들에게 다알리아를 비롯한 각종 구근류와 씨앗을 얻었다. 아내는 내년에 꽃밭을 가꿀 꿈에 부풀어 있다. 내년에는 좀 더 많은 꽃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게으른 농부를 들뜨게 한다.

또 한해가 저물어간다. 이제 3년이 지나니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던 묘목들이 훌쩍 내 키를 넘는다. 더러 기후조건이 맞지 않아 죽어간 나무들도 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기에 실패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흘린 땀에 비해 얻은 것이 많았던 한 해였다. 이른 봄의 보리수와 빨간 앵두, 하얀 자두꽃, 맛있게 익은 자두, 통통한 푸른 매실, 검게 익은 오디와 감자, 옥수수, 고구마, 야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보다 아내와 내가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이야기는 또 어떻게 다 할 수 있을까?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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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 울타리에 심은 남천의 붉은 열매가 꽃처럼 곱다. ⓒ 홍광석


아내의 뜨락, 숙지원. 세상의 소리에서 잠시 멀어질 수 있는 곳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공간. 텃밭 농사는 많이 가진 사람들의 호사가 아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다시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텃밭 농사를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한겨레 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초보농부 #완두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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