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당황시킨 베트남식 주소 적기법

호치민시에서 175/21 팜 응우 라오가 어디여?

등록 2009.12.15 10:28수정 2009.12.15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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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간 호텔 주소에는 호텔 대신 사진관이 있는 게 아닌가. 175 팜 응우 라오 주소에는 호텔이 없었다. ⓒ 김경석


얼마 전에 베트남 호치민시(옛 사이공)에 간 적이 있는데,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예약한 호텔의 주소에 가보니 호텔은 없고 대신 사진 현상소가 있는 게 아닌가? 인터넷으로 예약했는데, '설마 사기는 아니겠지'하면서도 황당하고 불안했다.

사실 가기 전에 종이에 주소를 적었는데, 주머니를 뒤져보아도 그 종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속에 외워 두었던 주소를 종이에 적어서 택시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175 Pham Ngu Lao(팜 응우 라오). 팜 응우 라오 길 이름은 워낙 유명한 것이라 확실했지만, 175라는 번지는 100% 자신할 수 없었다.


택시 기사는 다 왔다고 내리라고 했다. 그런데 호텔도 보이지 않고, 팜 응우 라오 길은 맞지만 번지가 175가 아니라 191쯤 되는 곳이었다. 그리고 쭉 살펴보니 175 번지쯤에 호텔이라곤 도저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호텔이 보이지 않고, 번지도 지나버렸다. 175 번지 호텔 바로 앞에 내려다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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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175 팜 응우 라오의 위치. 팜 응우 라오에서 꺾어 들어간 길 이름도 팜 응우 라오라니... ⓒ 구글맵


사실 짐도 좀 있고, 힘들기도 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175번지가 혹시 틀렸으면 기사가 호텔을 찾아 주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유턴해서 가면 175번지에 곧바로 갈 수 있을 텐데, 기사는 삥삥 돌아 5분 이상 지나서 175번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175 번지에는 호텔이 아니라 사진 현상소가 있는 게 아닌가. 아... 그 때의 절망감이란. 

나는 내가 외운 175번지가 틀렸다고 확신했다(위 지도에서 곱표(X) 기호가 있는 곳이 175번지). 때문에 노트북에 교류 전기를 연결하여 찾아 보기 전에는 호텔 주소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배터리는 고장 나서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호텔 전화 번호도 따로 적어 두지 않았다.

기사는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상황 설명을 하고 물어보았지만, 그의 말투에서 신통한 답변을 듣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기사는 내리더니 위의 지도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속으로 '아저씨, 거기는 팜 응우 라오가 아닌데요... 왜 엉뚱한 데 가서 찾으세요?'라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번지를 잘못 외운 게 분명하니까, 팜 응우 라오 길에서 호텔 찾을 생각을 하시지, 왜 엉뚱한 길에 가서 호텔을 찾으실까? 기사는 돌아오더니 모르겠다고 하였다. 나는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거기에 호텔이 있을 리 없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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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했던 호텔의 명함 ⓒ .


그 때 마침 구원의 손길이 왔다. 같이 간 친구가 내려 갔다가 돌아오더니 저기 호텔이 있다고 했다면서 내리라고 했다. 사실 다른 방안도 없고 해서 내렸는데, 친구도 택시 기사가 걸어갔다온 화살표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제법 걸어가도 호텔은 보이지 않기에, 확실히 알고 가는 거냐고 친구에게 물었다. 조금 헤매긴 했지만 결국 그 길에서 호텔을 찾긴 찾았다.


도대체 어찌 된 상황일까? 나중에 호텔 직원에게서 재미 있는 베트남식 주소 적기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외운 175 번지는 인터넷에 나와 있는 그대로 맞았다. 문제는 인터넷에 주소가 부정확하게 적혀 있었다는 점이었다. 호텔의 정확한 주소는 175/21 Pham Ngu Lao 였다. '/21'이 빠졌던 것이다.

그러면 '175/21'의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Pham Ngu Lao 175 번지에서 꺾어서 들어가면 그 길도 마찬가지로 Pham Ngu Lao이며, 꺾은 뒤에 다시 1, 2, 3… 번지가 시작된다는 뜻이다(아래 지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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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1, 175/2 등의 번지는 여기에 있었다. 175 팜 응우 라오에서 꺾어 들어간 곳의 주소 ⓒ 구글맵


그러니까 인터넷에 주소를 '175/21 Pham Ngu Lao'라고 적어만 두었다면, 택시 기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쉽게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잘못은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부정확한 주소에 있었다. 그때서야 아까 기사가 이 길로 들어왔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기사는 175번지에서 꺾어지는 길이 있는 것을 보고는 아마도 진짜 번지는 175/xx 인데, 이 외국 손님이 '/xx'를 빼고 번지를 잘못 적었다고 짐작했던 것은 아닐까?

호텔 직원은 내가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것도 얘기해 주었다. 길을 여러 번 꺾어 들어가는 곳은, '175/7/9/11'과 같은 식의 번지도 있다는 것이었다. 175번지에서 꺾어 들어간 뒤, 7 번지에서 다시 꺾어 들어가고, 거기서 다시 9번지에서 꺾은 뒤, 마지막으로 11 번지가 찾는 곳이다. 

나름대로 체계적인 주소 적기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혹시 이게 프랑스식 주소 적기법인지는 모르겠다). 사기 당하지 않았고, 그래도 호텔을 찾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호텔은 작지만 그런대로 친절하여서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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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금(/)이 들어간 주소에 있는 다른 호텔 간판. 28 Bui Vien에서 꺾어 들어가서 9 번지를 다시 찾는다. ⓒ 김경석


참고로 우리나라의 주소 적기법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아래 지도에서 사랑1길은 굉장히 길고 여러 갈래인데, 번지 찾기가 쉽지 않다. 특히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지면서도 같은 길 이름을 쓰는 경우, 어떤 규칙으로 홀수와 짝수 번지를 붙이는지는 상식적으로 알 수가 없다(아래 지도 참조). 베트남식 주소 적기법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긴 하지만, 꺾어 들어가서 다시 찾기에는 정말 쉽고 체계적인 주소 적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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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길이 모두 사랑1길이라는 같은 길이름을 쓴다. 번지를 매기는 방식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 ⓒ 행전안전부


#사이공 #호치민시 #팜응우라오 #도로명주소 #길이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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