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없는 동네는 낙후한 곳일까요

[헌책방 나들이 217]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등록 2009.12.18 17:14수정 2009.12.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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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래된 동네와 오래된 책

지난 11월 26일, 인천시에서는 퍽 뜻밖이라고 할 소식을 알렸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인천 동구 금곡동과 창영동과 송림동 주민들이 반대하고 있던 '배다리 산업도로' 몇몇 구간을 땅 속으로 파들어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주민들 뜻대로 '백지'로 돌리지는 않았으나, 골목동네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공사는 안 하기로 하면서, 골목동네 구간은 땅속길을 내겠다고 합니다.


세 해를 이어온 힘겨운 싸움을 거의 모르쇠로 등돌리거나 팔짱을 끼던 인천시가 갑작스레 이렇게 이야기를 꺼내니 놀랍습니다. 그러나 길닦기는 이렇게 하면서도 골목동네 재개발 계획은 그대로 밀어붙입니다. 그러면서 주민들한테 설문조사를 합니다. '설문조사 결과를 받아 보고 찬성이 많으면 그대로 밀어붙이고 반대가 많으면 재개발을 하지 않겠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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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시가 밀어붙이는 '산업도로' 구간. 동네 너비 50~70미터를 싹 밀어내고 화물차 드나드는 산업도로로 뚫으려 했다가 주민 반대로 2007년부터 아직까지 공사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 산업도로 구간 가운데, 사진에 나온 자리는 '땅위'가 아닌 '땅밑'으로 놓겠다고 시에서 정식으로 밝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밀려나고 사라진 집은 어떻게 될까요. 또, 뒤따를 수많은 개발 계획들은... ⓒ 최종규


제 살림집으로 날아든 '재정비촉진사업 주민설문조사'를 들여다보면 "과거에 번화했던 동인천역 주변 등 기존의 구도심은 쇠퇴의 길을 거듭하여 오늘날 낙후된 지역으로 전락되었고 사업성이 없어서 장기간 도시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적어 놓으며, 저 같은 세입자한테까지 "60㎥이하 임대아파트 공급"을 해 주겠다고 '이주 및 생활대책(안)'을 문서로 적어서 보내 줍니다.

주민 모두한테 이렇게 문서로 하나하나 밝혀서 보냈으니 나중에 말을 바꾸는 일은 없지 않을까 믿고 싶은데(그러나 이러한 보상대책은 개발계획이 나기 앞서 그 동네에 세입자로 살고 있는 사람한테만 혜택이 주어지는데, 가난한 사람은 으레 한두 해에 한 번씩 집을 옮기고 있는 터라, 적어도 한 집에서 네 해는 살고 있지 않다면 이사비용이건 다른 보상대책이건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약속보다도 지금 저를 비롯한 이웃들이 살고 있는 동네를 '낙후-쇠퇴-전락' 같은 낱말로 깔아뭉개는 생각밭이 씁쓸합니다.

아파트가 없는 동네는 모조리 '낙후'한 곳이기만 할까요. 지은 지 스무 해가 넘은 집이 있는 동네는 죄다 '쇠퇴'한 곳으로만 보일까요. 끝없이 돈벌이를 해대지 않으면 '전락'해 버리는 곳으로 여겨야 할까요.

인천 배다리 골목동네 한켠에 자리한 헌책방 <아벨서점>을 찾아갑니다. '싸움에서 이겼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동네사람 모두를 지치게 하던 싸움 하나'는 가까스로 끝맺었기에, 그 다음 싸움인 동네 재개발 문제를 이야기 나누고자 찾아갑니다.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는 그동안 인천시 개발업자와 공무원하고 벌인 '배다리 산업도로' 반대 싸움에서 주민 공동대표를 맡은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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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아벨서점>은 '동네 재개발'을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받습니다. 이러한 서명운동은(서명운동만으로 보아도) 새책방이고 도서관이고 하는 데가 거의 한 군데도 없겠지요. 몇 군데 인문사회과학책방을 빼놓고. <아벨서점> 일꾼은 책뿐 아니라 삶과 삶터를 함께 읽기에 이러한 서명운동도 책방 한쪽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최종규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지요." 헌책방 <아벨서점> 아주머니를 비롯해 이곳 인천 배다리를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배다리라고 하는 인천에서 오래된 골목동네를 통째로 '역사 문화 지구'로 삼아야 한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아파트를 때려짓는 재개발은 그만두고, 그렇게 재개발을 하며 더 많은 돈을 거두어들이려는 몸짓이 아니라, 오래도록 동네 한 곳에서 뿌리내리며 살아온 숱한 사람들 땀방울을 느끼면서 이 땀방울을 젊은이와 어린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역사와 문화가 서린 이야기 나눔터'로 동네를 알뜰히 보듬어 주기를 바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책은 '헌'책이지만 않고 모두 똑같은 '책'이며, 내 마음을 알뜰히 채워 주는 넉넉한 밥그릇입니다. 오래된 골목 동네 사람들 삶은 '오래된' 삶이지만 모두 똑같은 '사람 삶'이며, 서로서로 따뜻하게 감싸안는 가슴이 있는 사랑입니다. 문화란 돈으로만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책 또한 돈으로만 이룰 수 없습니다. 재개발이나 개발이란 돈만 벌어들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아름답고 넉넉하게 꾸리는 삶을 지키는 일이어야 합니다.

스무 해가 지났다고 '낙후'한 책이라 여길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는 <토지>나 <태백산맥>이 언제 쓴 작품일까요. <광장>이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언제 처음 나온 책일까요. 꾸준히 다시 옮겨지는 실학파 책은 언제 적 이야기일까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다는 성경은 어느 때에 엮은 책이겠습니까. 아이들한테 '고전'을 읽혀야 한다고 외치는 어른들인데, 정작 우리 삶터 가운데 '고전이 될 만한 동네'는 없습니다. 서울이 고전 같은 동네일까요? 경주는? 부산은? 대구는? 인천은? 이 나라 어느 동네가 '오래된 아름다움을 건사하면서 지키'고 있을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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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한켠에 스티커를 붙여놓습니다. 헌책방이 깃든 골목동네가 인천이라는 데에서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 최종규


 (2) 책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신영훈(글),임재해(사진),백승길(영어로 옮김)-한국의 3대서원>(교학사,1986)이라는 책은 우리 나라 서원을 나라밖에 두루 알리고자 엮은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 글 옆에 영어를 함께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대한교과서주식회사'에서 1987년 12월 23일에 장만해 놓았다는 '장서' 도장이 찍혀 있는데, 헌책방마실을 하다 보면 이처럼 '아무개 출판사 소장 자료'라든지 '아무개 신문사 소장 자료' 들을 만납니다.

기관이나 모임에서는 더는 쓸모가 없어서 내놓은 책일 테지만, 저한테는 우리 삶자락을 돌아보는 데에 도움이 되는 좋은 책입니다. 아무래도 기관이나 모임에서는 틈틈이 옛 자료를 내다 버려야 할 테고, 저 같은 사람은 이 같은 옛 자료를 그러모아야 합니다. 기관과 모임이 폐휴지로 내다 버린다든지 하지 않고 헌책방으로 흘러들게 해 주면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나저나, 서원 사진을 돌아보면서 문득문득 느끼는데, 절이나 서원이나 궁궐 담은 사진은 모두 밝은 한낮에만 찍고 있습니다. 이른아침이나 새벽이나 저녁나절이나 해거름이나 밤에는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구름이 낀 날이나 비오는 날에도 느낌이 사뭇 다를 텐데, 날씨 흐름에 맞추어 서원이나 문화재 사진을 찍는 일은 거의 못 보았습니다.

어쩌다 눈오는 날 사진은 몇 장 담지만, 흐린 날 흐린 느낌이나 맑은 날 맑은 느낌에 따라 우리 삶터가 다 다르게 바뀌는 얼거리를 받아안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생각해 보면, 서원과 문화재 사진뿐 아니라 여느 사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웃음과 함께 울음을 담고, 기쁨과 함께 슬픔을 담아야 하는 우리 사진이요 그림이요 글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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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아벨서점>에서 만난 책 몇 가지 가운데. ⓒ 최종규


<윌리엄 키니/남정길 옮김-평화ㆍ비폭력ㆍ사랑(성서의 평화론)>(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1979)이라는 조그마한 책을 집어듭니다. 성서에 담긴 평화 이야기를 짤막하게 보여준다고 하는 책인데, 오늘날 우리 둘레에서 '성서에 담긴 평화'에 마음을 쏟는 사람이 더 많을는지, 성서와 하느님 뜻을 따르겠다며 어마어마한 예배당을 짓는 데에 돈을 쏟는 사람이 더 많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예배당 새로 짓는 데에 들이는 돈을 그러모으면 대학교까지 누구나 거저로 다닐 수 있는 한편, 낮밥 굶는 초중고등학생은 하나도 없을 테며, 가난에 힘겨워 할 낮은자리 이웃조차 모두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 도스또엡스키는 사랑이란 실제에 있어서 우리의 꿈속의 사랑에 비교되는 가혹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을 감상적이 되게 하기는 쉽다. 많은 사람들은 달콤하고 가벼운 말로, 그리고 들뜬 감정의 경험으로서 사랑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혼히 비극적이고 비통한 경험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의 거절과 반대, 그리고 사랑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세상의 죄와 악에 부딛칠 때 그 사랑은 그 가운데 십자가를 진 사랑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꿈에다 알맹이를 부여해 주는 확고한 실체이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있으며 사랑의 압도적인 힘을 안다. 사랑은 바울을 박해자로부터 박해당하는 자로 바꿔 놓았으며, 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승리를 통해 사랑을 모든 기쁨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이것은 그뿐만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일이다 ..  (132쪽)

<김유경 외 글/이창성 외 사진-한 길을 가야 인생이 보인다>(눈빛,2001)라는 책을 집어듭니다. 숨은 일꾼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책이라 할 텐데, 제 눈이 맨 먼저 꽂히는 꼭지는 '사진기 고치는 일꾼' 이야기입니다.

.. 그 당시 남대문시장은 도매업뿐만 아니라 수리기술에서도 중심지였고, 종업원들이 주인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심부름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한 해를 보내던 중 남대문시장에서 사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카메라 수리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친구의 소개로 전부터 하고 싶었던 카메라 수리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남대문시장 안에 사무실이 있는데 카메라점을 돌면서 그곳에 수리 의뢰 들어온 것들을 모아다가 수리만을 전문으로 하던 곳이었다. 그곳에서도 월급은 없었고, 선배들과 함께 먹고 잠자리를 제공받는 정도의 대우를 받으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것이 1968년이었다. 비록 용돈 수준이긴 했지만 월급을 받기 시작한 것은 삼사 년이 지났을 때였다 ..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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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슨 마음으로 책을 만들고 읽고 나누고 할까요. ⓒ 최종규


달삯이라 할 수 없는 돈을 그나마 받은 때는 서너 해가 지난 다음이라는데, 서너 해까지는 '일꾼 몫이라 하기 힘들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일을 배우도록만 했겠지요. 그러나 서너 해까지 '아무리 잔솜씨라 할지라도 아무 솜씨가 없었다' 하겠습니까. 나날이 솜씨가 는다 할지라도 그만큼 더 고개를 숙이면서 새로 배우고 거듭 배우면서 빈틈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갈고 닦도록 이끈다고 하겠어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일을 배운다 할 때에는 내 모두를 밑바닥에 깔거나 놓아 버린 채 몇 해씩 말없이 따르면서 배워야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섣불리 내 솜씨를 잰체하거나 우쭐거릴 노릇이 아니라, 서너 해이든 열 해이든 스무 해이든 늘 고개숙이며 새로 배울 줄 알아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나이 쉰이 되어도 배우고 나이 여든이 되어도 배우는 마음가짐이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일을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는 줄 젊은 나이에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오늘날은 더 어려운데, 먹고사는 일도 그렇기는 하지만 옳게 배워서 펼치는 '장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닦고 가다듬어야 하는가를 일러 주는 어른이 없을 뿐더러 젊거나 어린 사람들은 이런 대목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제도권교육 탓이 아니라, 집이고 마을이고 학교이고 사회이고 온통 들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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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고, 책에 담긴 삶이 있고, 책을 읽는 삶이 있습니다. ⓒ 최종규


 (3) 사진 하나에 담는 이야기

손바닥책 <원유한-조선후기화폐유통사>(정음사,1978)를 골라듭니다. 모든 책이 이렇게 나오지는 않았습니다만, 지난날에는 학문책이 이렇게 손바닥책으로 곧잘 나왔습니다. 오늘날에는 두툼한 양장판으로 비싼값을 붙고 나오는 학문책인데, 이렇게 작고 값싸게 나오면서 학문밭을 넓힌다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돈 넉넉한 출판사에서 학문책을 이렇게 손바닥으로 값싸고 예쁘장하게 펴내 준다면, 학문하는 사람한테나 학문을 깊이 파고들고자 하는 사람한테나 크게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또한 문학책을 이렇게 작고 곱게 여미어 준다면, 아직 이름을 떨치지 못해 작품을 내놓기 어려운 새내기들한테 좋은 열린 마당이 될 테고, 더 너른 목소리를 더 널리 담아내며 책마을을 한껏 북돋울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쉽지 않은 노릇이기는 하나, 크고 돈 많은 출판사에서 이름난 나라밖 글쟁이 책을 우리 말로 옮기면서 치르는 선인세(로열티)로 '작고 예쁘고 알찬 손바닥책 기획'을 하면, 아무리 못해도 100권은 펴낼 수 있습니다.

<유아사진 촬영의 첫걸음>(두산산업 코닥사업부,?)은 사진을 널리 퍼뜨리고자 필름회사에서 만든 길잡이책입니다. 펴낸해를 따로 밝히지 않은 모습으로 보건대, 이대로 수만 부를 찍어서 뿌렸겠구나 싶은데, 필름사진일 때이든 디지털사진일 때이든 사진을 바라보거나 다루는 매무새는 한결같음을 보여줍니다. 사진찍기를 배우고자 하는 분들이라면 굳이 새로 나오는 책이 아니라, 이렇게 철지난 길잡이책을 들춰보면서 익혀도 좋겠다고 느낍니다.

< Jerome Darblay-Living in Portugal >(Flammarion,1995)은 '포르투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두툼한 책입니다. 내세우기로는 '포르투갈이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사진책인데,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다루려는 눈길이 '바로 오늘 살고 있는 사람들'한테 눈길을 두면서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라는 테두리가 아닌, '더 나은 세상은 틀림없이 있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이곳 삶을 꾸밈없이 사랑하고 아낀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니까, 가난한 동네에 살면 가난한 대로 즐거움과 웃음이 있으며, 돈있는 동네에 살면 또 그곳대로 누리고 즐기는 삶자락이 있음을 사람들 결과 흐름에 따라 차분히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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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서(나 교과서) 하나에도 이 녀석을 들여다본 젊은 넋들 손자국과 땀이 배어 있습니다. ⓒ 최종규


사진 하나하나를 오래도록 즐기면서 들여다봅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이와 같이 찍을 줄 알아야 함을 말없이 가르칩니다. 사진 한 장으로 내 나라이든 내 고향이든 내 터전이든 무엇이든 담아내자고 하면 어떠한 매무새와 눈높이와 눈길과 눈썰미와 마음바탕이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사람 그림자는 하나도 없으나 '사람이 살고 있네'를 보여주는 사진을 봅니다. 뒷골목 옆골목 샛골목 사진을 실어 놓았는데 이러한 사진들이 고스란히 '포르투갈 사람들은 이곳에서 예부터 조촐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 In every walk of life >(Hoechst,1988)는 'Hoechst'라는 회사가 1863년부터 자그마치 125년이라는 발자국을 찍었음을 기리는 책입니다. 우리로 치면 'Hoechst 125년사'쯤 될 텐데, 우리 나라에서 찍어내는 '○○년사' 같은 책은 자랑과 떠벌임이 가득한 지루한 책이라면, < In every walk of life >라는 사진책은 회사 발자취를 담는 새로운 틀을 보여주는 한편, 사진이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빛과 그늘이 사뭇 다름을 느끼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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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은 헌책 하나를 되살리는 일꾼들 손품이 있기에 우리한테 좋은 책선물을 하는 터전으로 자리잡습니다. ⓒ 최종규


 (4) 책이 있는 삶이란

책값을 셈하고 책방을 나섭니다. 이곳 <아벨서점>을 드나드는 분들이 굳이 생각할 까닭은 없겠으나, 헌책방 <아벨서점>이 깃든 건물은 쉰 해가 넘었습니다. 헌책방 <아벨서점>은 몇 해 뒤면 헌책방 역사 마흔 해라는 숫자를 찍습니다. 그냥 저냥 값싼 책을 만날 수 있는 헌책방이 아닌, 책하고 온삶을 지내온 발자취가 서린 책쉼터입니다.

헌책이 있으니 헌책방이요 새책이 있으니 새책방이며 책을 갈무리해 놓고 있으니 도서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 겉모양새로 나누는 이름이 아닌, 책을 어떻게 나누고 즐기느냐를 돌아보았을 때, 오늘날 거의 모든 새책방은 '책을 사기만 하는 곳'이지, 책을 찾고 읽고 즐기고 나누는 '책쉼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요즈음 도서관은 많이 나아져서 도서관 또한 '책쉼터'라 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갓 나온 책을 다루는 새책방만큼은 책쉼터라는 이름을 붙이기 부끄럽습니다. 더구나, 새책방을 '책나눔터'라는 이름으로 일컫기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헌책방과 도서관이 책쉼터이자 책나눔터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쉬운 헌책방이 있고 얄궂은 도서관이 있습니다. 모자란 헌책방이 있으며 얄딱구리한 도서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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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우리 스스로 찾아서 보면 됩니다. ⓒ 최종규


책이란 한 번 읽고 종이쓰레기로 버리는 뭉치가 아닙니다. 책이란 한 번 읽어 가슴에 새겨지는 대목이 있을 때에는 오래도록 간수하면서 동무와 이웃과 식구한테 되읽히는 마음밥입니다. 언제라도 펼쳐서 배울 수 있는 마음 스승입니다. 내 아이한테 물려주고 내 아이는 그네들 아이한테 물려줄 수 있는 마음 선물입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헌책방이나 새책방이나 도서관이라 한다면, 책 하나를 놓고 내 삶을 함께 사랑하는 길을 찾도록 이끄는 곳입니다. 우리가 믿을 만한 헌책방이나 새책방이나 도서관이라 한다면, 책 하나가 있기에 아무리 먼길이라 하여도 애써 찾아가서 마음을 쉬고 몸을 쉬며 삶을 가다듬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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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아기는 세이레를 끝마친 다음부터 만나 바깥손님이 헌책방 아주머니였는데, 언제 찾아가도 헌책방 아주머니 곁에 착 달라붙습니다. ⓒ 최종규

헌책방 <아벨서점>은 인천 배다리라고 하는 조그마한 골목동네 한켠에서 요모조모 힘을 쏟으면서 마흔 해에 가까운 삶을 꾸려 왔습니다.

이제 '산업도로 막공사' 바람이 조금은 수그러들어 마흔 해라는 점을 찍을 수는 있구나 싶지만, '낙후된 구도심 재정비와 도시정화'라는 이름을 빈 재개발 바람이 새롭게 불어들 터라 마흔 해라는 점을 찍을 때까지 꿋꿋하고 힘차게 걸어갈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아벨'이 제 몸을 바치며 사랑과 믿음을 나눈 뜻을 펼치는 헌책방이요 책쉼터이기에, 쉽사리 불꽃을 끄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섣불리 촛불을 끌 일이 없으리라 믿습니다.

책손들 누구한테나 "책이 뭔 줄 아세요? 바로 삶입니다. 책은 바로 우리 삶입니다." 하고 당차게 외칠 줄 아는 아주머니들이 가꾸고 있는 헌책방 〈아벨서점〉은 다름아닌 '헌' 책을 다루기 때문에 더더욱 책을 아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알며 보듬을 줄 아는 마음으로 사람들과 부대낍니다.

헌 것이든 낡은 것이든 오래된 것이든 모두 없애려고만 하는 이 나라에서, 헌 것이요 오래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빛나며 아름답고 슬기로울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를 들려주는 책나눔터로 꾸준히 책살림을 꾸려 나가리라 봅니다.

책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지치지 않으니까요. 돈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지칠 뿐 아니라 팍팍하고 메마르고 거칠어지지만, 책으로 삶을 들여다보면 고와지고 맑아지며 어여뻐지니까요.

덧붙이는 글 |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032-766-9523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032-766-9523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헌책방 #아벨서점 #배다리 #책읽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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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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