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대초원에서 얻은 발견의 기쁨

[서평] 이동순 시집 <발견의 기쁨>

등록 2009.12.18 18:01수정 2009.12.18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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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白石 詩全集>(창작과비평사,1988)을 비롯하여 <이찬 詩전집>(소명,2003), <조명암 詩전집>(선,2003) <조벽암 詩전집>(소명,2004) 등 월북 시인들의 전집을 펴내고 그에 관한 비평 활동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의 문학사를 복원하는데 큰 역할을 한 이동순 시인이 새 시집 <발견의 기쁨>(시학,2009)을 상재했다.

 

이동순의 신작 시집 <발견의 기쁨>은 그가 열 번도 더 자전거로 탐사해온 몽골의 대초원,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동․식물, 풍경에서 빚어진 65편의 신작들로 이루어져 있다. 몽골 초원의 풍경과 유목의 삶에서 이동순 시인이 발견한 생명(生命)의 참 모습과 삶의 진정한 자유(自由)는 생태계 파괴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의 새 길을 보여준다.

 

들판을

기어가는 뱀처럼

길은 구불구불 놓여 있다

풀과 돌 사이를 비집고 흘러가는 강처럼

길은 저절로 휘어져

풀밭에 이리저리 뒤척인다

 

예로부터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저 대초원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걷고

말달리며 살아갔던 것인가

이 길을 걸어간

그 많은 영웅과 호걸 모두 어디로 갔나

 

오늘도 길은

밤에 별을 보며 나아가던 사람들

혹은 제 갈피를 못 잡고

터벅터벅 헤매는 사람의 갈 곳을 일러 주느라

저 들판 지평선 너머로 온종일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 '대초원 길' 전문.

 

몽골 초원에서 시인이 만난 것은 무엇보다도 '길'이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영웅․호걸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가 걸어간 간, 또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가야할 길을 발견한다. 시인은 그 길을 두고 "터벅터벅 헤매는 사람의 갈 곳을 일러 주느라/저 들판 지평선 너머로 온종일/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라고 하면서 '길'을 살아 있는 생명의 주체로 그려내고 있다. 인간의 의지 너머에 있는 이 '생명의 길'을 만나고 싶어서, 그 만남에서 삶의 새 힘을 얻으려 이동순 시인은 그렇게도 먼 거리를 수도 없이 달려갔던 것인가?

 

그리고 이동순 시인은 '빈 들판'이라는 시에서, "빈 들판에는/아무것도 없는 줄 알지만/쪼그리고 앉아/잠시만 풀밭을 뒤져 보면/작은 벌레들의 엄청난 세상이 있"고 또 "하늘을 보면/조개구름들이 내려다봅니다/그 사이로 바람을 타며/뽐내는 솔개 녀석들도 보"인다고 하면서 "이렇게 대초원은/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습니다"고 한다.

 

그렇다. 생명의 작동이 멈추지 않는 자연인 대초원은 인간의 심리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스스로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다는 것을 시인이 발견한 것이다. 자연(自然)과 생명(生命)의 본 모습이 그러한 것이다. 이러한 자연과 생명의 본 모습에 대한 발견의 기쁨은 아래의 시에서도 계속된다.

 

들판은

온통 소들의 차지다

말들의 차지다

아니 양떼들의 차지다

그 소와 말과 양들을 돌보는

얼굴이 까아만 소년들의 차지다

죽은 가축의 살점을 기다리는

독수리들의 차지다

아니 벌레와 야생초들의 차지다

아니 풀과 풀 사이에 끝도 없이 널려 있는

소똥과 말똥의 차지다

그 소똥과 말똥을 부수고 있는

연둣빛 날개가 아름다운 갑각류들의 차지다

아니다 아니다

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들판은 그 누구의 차지도 아니다

- '저 들판은 누가 차지하는가' 전문.

 

단순히 초록의 빛으로만 보이는 광활한 몽골의 들판 위에서도 수많은 생명의 작동이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지고 있음을 시인은 조용히 노래한다. 시의 마지막 구절이 압권이다. "아니다 아니다/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들판은 그 누구의 차지도 아니다"라는 시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 생태계는 고장이 나 그 작동이 멈춰서기 일보 직전이다. 인간의 물질적 욕망 추구로 자연을 거듭 정복하고 파괴해온 잘못된 인류 역사의 결과이다. "아니다 아니다/자꾸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들판은 그 누구의 차지도 아니다"라는 시인의 외침을 우리는 분명히 새겨들어야만 한다.

 

한편 시인은 '사랑이라는 것'이라는 시에서는 "소 두 마리가/풀밭에 마주 서서/서로의 등을 핥아 주고 있"는 풍경을 보면서 "저 두 녀석은/서로 핥아 주고 몸 부비는 동안/외롭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상대를 위해주고 상대와 함께 하는 것의 삶, 그것이 사랑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또 시집 '후기'에서 이동순 시인은 "삭막한 도시 문명과 가파른 세상 인심에 시달리다가 온통 광대한 하늘과 대초원과 끝없는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몽골에서 대면하는 모든 것은 나에게 진정한 삶의 깨달음, 신선한 발견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시집 <발견의 기쁨>에 수록된 '유목민', '망아지', '말 탄 처녀', '몽골 소년', '세 꼬마', '게르 풍경', '간소한 살림', '길목 식당' 등의 시편에서 우리는 몽골 대초원과 유목의 삶에서 이동순 시인이 발견한 삶의 깨달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가 있다.

 

필자가 이동순 시인의 새 시집 <발견의 기쁨>에서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물렀던 곳은 '거울'과 '수묵화' 그리고 '낮잠'이라는 시편이었다. 길을 가다가 파란 하늘이 내려앉아 있는 길가 물웅덩이가 거울이 되고, 그 거울에서 후줄그레한 길손의 낯익은 얼굴인 자아(自我)를 대면하고 있는 시 '거울'은 어느 기업의 광고 문구처럼 소리 없이 강하다.

 

금이 가고

한 쪽 귀퉁이가 깨어진

돌비 앞에서

가지런히 두 손 모아 비난수하는

저 몽골 사내

그는 무엇을 바라는가

 

그의 등 뒤로

따뜻하게 비친 햇살이

돌비 위에 그림자를 드리워서

차디찬 돌 판에 기도하는 사람을 그렸다

흡사 돌비 속에

사람이 들앉은 것 같다

- '수묵화' 전문.

 

시인이 몽골 초원의 길을 가다 우연히 본 풍광의 한 장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해서 그려놓은 '수묵화'라는 작품이다. 실제 먹으로 그려놓은 수묵화(水墨畫)보다 더 수묵화 같지 않은가. 이 그림의 내용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시를 읽어가노라면 그 내용이 한 눈에 스스륵 다 들어오는 것이니. 다만 깨어진 돌비, 비난수하는 몽골 사내, 그리고 사내를 따뜻하게 비추이는 햇살이 각각 따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만 지적하고 싶다. 원래 자연과 인간은 따로가 아니라 하나다. 그래야만 한다.

 

광활한 몽골의 대초원이라는 낯선 이국적 풍경에서 맑은 인간의 삶과 생명의 참모습 그리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한 이동순 시인의 기쁨은 참으로 컸으리라. 시집 표사(表詞)에서 "이동순 시인의 몽골시편들이 일깨워 주는 가장 큰 미덕은 진정한 삶의 길이 어떠한 것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 준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유의 삶이 아니라 존재를 누리는 삶의 길이며, 탐욕과 구속의 삶이 아니라 해방과 자유의 삶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평한 문학평론가 김재홍의 지적은 적절하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껴안고 넘나들면서 하나가 된 무위(無爲)의 풍경을 그려놓은 아래의 시를 인용하면서 이동순 시인의 새 시집 '발견의 기쁨'에 대한 탐사를 끝맺는다. 진정한 자유와 생명이 흐르는 아름다운 삶이 바로 이러하리라.

 

오늘은 날이 더워서

천막집 천장을 열어 놓았다

조금 열린 구멍으로

유난히 파아란 하늘이 보인다

나는 천막집 게르에 누워서 하늘을 본다

천장의 열린 구멍은

하늘이 드나드는 교통로

반달 모양으로 곱게 잘린 하늘이

살며시 들어와

내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하늘의 어깨를 토닥이며

아기처럼 재우려 한다

자장 자장 자장

그렇게 나직하게 자장가를 불러 주다가

나는 하늘보다 먼저

잠이 들었다

- '낮잠' 전문.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컬처라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12.18 18:01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컬처라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발견의 기쁨

이동순 지음,
시학(시와시학), 2009


#이동순 #발견의 기쁨 #낮잠 #수묵화 #이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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