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곱고 맑게 살아가는 길이란

[책읽기가 즐겁다 324] 어니스트 칼렌바크, <생태학 개념어 사전>

등록 2009.12.24 14:23수정 2009.12.2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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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태학 개념어 사전》(에코리브르,2009)

 ├ 글 : 어니스트 칼렌바크 / 옮긴이 : 노태복

 └ 책값 : 11000원

 

인천과 서울을 오가면서 해야 하던 일을 그친 지 스무 날이 넘었습니다. 스무 날이 넘는 동안 새 살림집을 알아보러 다니고 싶었으나, 그동안 몸이 더 나빠진 옆지기를 돌보고 아이를 함께 보살피느라 어디로도 다니지 못한 채 거의 집에서만 붙어 지냈습니다. 이러느라 서울마실은 한 주에 한 번 살짝 할 뿐이었는데, 모처럼(?)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안 타다가 지옥철을 다시 한 번 타 보니 더없이 끔찍합니다.

 

날은 겨울이라 사람들 옷은 두툼해지니 자리에 앉아도 훨씬 비좁을 뿐더러, 다리를 벌리거나 신문을 쫙 펼치는 남자들 매무새가 짜증스럽습니다. 사람들 틈바구니에 찡기며 책장을 펼칠 때에도 밀치고 밟는 몸가짐은 매한가지라서 고단합니다. 집에서 식구들을 돌보고 쉬는(?) 동안에는 이맛살을 찌푸릴 일이 드물었는데, 고작 하루 지옥철을 다시 타면서 자꾸자꾸 이맛살을 찌푸립니다.

 

숨이 턱턱 막히면서도 책을 읽다가 덮습니다. 책읽기로 마음닦기를 하기보다 한손으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고 비비면서 마음을 다스려야겠다고 느낍니다. 이 지옥철에서는 나 홀로 고달프지 않을 테니까요. 이 지옥철에서는 나 혼자 끔찍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타고내릴 때에 새치기를 하거나 불쑥 끼어들며 밀쳐대는 숱한 사람들을 부대끼면서 마음이 바뀝니다. 이 지옥철을 타는 사람들은 으레 '고단하다고는 안 느끼지' 모른다고. 아주 자연스러운 당신들 삶으로 여기면서 '혼자 빨리빨리'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남이야 어찌 되든 제 몸만 느긋하면 괜찮은 몸가짐으로 살아가고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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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에코리브르

겉그림. ⓒ 에코리브르

.. 환경운동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이거나 과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무엇이 옳고 적합하며 아름답고 만족스러운가에 관한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삼는다 … 집에서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휴가 기간에 당신이 자연을 가장 적게 훼손하는 방법이다 … 장거리 여행은 당신의 '생태적 발자취'를 크게 남긴다. 음식 공급 체계를 비롯한 여러 사안과 마찬가지로, 관광에도 '지역으로 돌아가기'가 필요하다 ' 우리의 주요 책무는 우리가 고향이라고 부르는 지역의 가치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 자동차가 차지하던 땅을 되찾음으로써 우리는 도시를 더욱 푸르게 만들 수 있다 … 보존 운동이 우리 자연 유산이 파괴되는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교육ㆍ정치ㆍ법률적 노력을 더 많이 기울여야 도로 포장과 오염과 벌목이 초래한 결과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몇몇 주요한 동물 종만 구제할 것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와 그 안에 서식하는 모든 동물을 보존하는 쪽으로 범위를 넓혀야 한다 ..  (17, 39, 58, 90쪽)

 

'일상(日常)'이라는 한자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 한자말을 쓸 일이 없으나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이란 바로 '일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욱이 서울 둘레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 또한 '일상'이로구나 싶습니다.

 

한자말 '일상'이란 "날마다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늘 같은 삶"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같고, 오늘과 글피가 같으며, 글피와 모레가 같은 삶입니다. 지난날과 오늘날이 같으며, 오늘날과 앞날이 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삶이 아이 삶하고 같고, 이 아이 삶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 낳아 기를 아이 삶하고 같습니다.

 

이러한 삶이란, 경쟁과 학벌과 이름과 돈과 아파트와 자가용과 여행이라는 똑같은 틀거리에 맞춘 한결같은 삶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지 않으면서 아이한테도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을 찾거나 누리도록 돕거나 이끌지 않습니다. 어버이 스스로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면서 아이한테도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이름과 더 큰 힘을 바라도록 내몹니다.

 

제아무리 헌법에 '인권과 기본권과 시민권'이 적혀 있다고 하여도 이 나라 푸름이한테는 어떠한 인권도 기본권도 시민권도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머리길이를 '교칙에 따라' 짧게 맞추어야 하고, 치마길이와 치마통을, 옷차림과 신발을, 가방에 넣고 다닐 책을, 머리속에 집어넣는 지식을, 그 어느 한 가지 자유와 민주와 창조와 평등에 걸맞게 가다듬을 수 없습니다. 교육감이 무슨무슨 틀거리를 새로 짜야 하는 '청소년 머리길이'가 아닙니다. 법에 따라 어찌어찌 적어 놓어야 할 '체벌 규칙과 높낮이'가 아닙니다. 헌법에 따라 마땅히 지켜 주고 돌봐 주고 아껴 주는 인권이요 기본권이요 시민권이어야 합니다.

 

.. 실제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공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 자동차는 공기를 오염시키고, 사람들을 단순한 운전자로만 만들 뿐 관심을 가져야 할 시민으로 대하지 않게 한다 … 세상에 펼쳐진 아름다운은 상당 부분, 생명이 다채롭고 풍부하게 존재하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 우리는 양식 물고기나 유전자 조작 식물이 언제까지나 우리를 먹여살릴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음식을 생산하려면 인공적인 먹이와 화학비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  (30, 57, 112, 143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낳아 키우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참다운 권리를 베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른들부터 참다운 권리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맑은 물을 마시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깨끗한 터전에서 오순도순 어울리며 즐겁게 두레와 품앗이를 펼치는 삶을 꾸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른들 누구나 제 은행계좌 숫자가 높아지고 제 아파트 평수가 넓어지며 제 자가용 크기가 커지기만을 꿈꿉니다. 내 은행계좌에 높아지는 숫자를 가난하거나 어려운 이웃한테 기꺼이 베푸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요? 구세군 냄비에 넣는 돈을 떠나, 소리와 소문이 없이 늘 기꺼이 나누며 삶을 꾸리는 어른은 얼마나 있는가요?

 

지옥철을 타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끔찍함'에 몸서리치는 까닭은 오늘 하루 몸이 몹시 고달파야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옥철이 되도록 서로서로 깎아내리는 이 터전을 비롯하여 우리 삶터 구석구석에서 내 밥그릇만 단단하게 붙잡는 모습이 훤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초를 안 기다리고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 때에는 새치기를 안 할까요? 밀고 밟으며 새치기를 하는 이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며 골목을 달릴 때에 마구마구 빵빵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내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무 데나 침을 뱉는 일은, 옳지 않은 법이 자꾸 생겨나도 나 몰라라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한 번 쓰고 나서 쓰레기로 버리는 물건을 끝없이 쓰고 있으면서 입으로는 진보를 외치거나 보수를 외치는 사람은 모두 한통속입니다. 참다운 진보라면 마땅히 이 땅 터전을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곱게 지키는 일에 온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참된 보수라면 누구나 이 나라 삶터를 알차고 슬기롭고 맑고 어여쁘게 가꾸는 일에 온몸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 땅 이 나라에서 진보요 하고 외는 사람과 보수요 하고 나서는 사람치고 '참 자연사랑'으로 삶자락을 추스르는 분은 몇이나 됩니까.

 

.. 미국에서 처음에 야생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지역이 대부분 '바위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산업 시설이나 교외 주택단지를 지을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공간이었다는 뜻이다 … 우리는 쓰레기와 찌꺼기를 '버린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계속 돌고 돈다. 우리가 환경이며 환경이 우리인 셈이다 ..  (150, 210쪽)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밑앎'을 차분하게 들려줍니다. 마르크스를 알든 공병호를 읽든, 대학 졸업장이 있든 대학원 학위가 있든,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밑슬기'를 먼저 닦아 놓고 있어야 함을 이야기합니다. 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내 집이 어떻게 마련되었으며, 내 밥이 어떻게 밥상에 놓이는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머리통에 지식을 가득 채운다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며, 지식인이라는 이름은 가방끈으로 붙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몹시 슬픕니다. 이 책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굳이 읽어야 할 까닭이 없어 더없이 슬픕니다. 이 책은 '생태환경 갈래를 모르는 새내기'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는 책인데, 생태환경 갈래 이야기를 이 나라 웬만한 지식인들은 한줌 지식으로조차 머리속에 넣어 놓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으로 읽어 머리속에 넣어 놓을 지식을 담은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있으면 누구나 마땅히 시나브로 깨우치면서 몸뚱이로 익히는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 소비 자본주의가 부흥하는 내내 서구인들은 기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고, 종교와 문화는 부차적이라는 믿음을 고수했다 … 성숙한 도시일수록 유지 보수에 쓰는 에너지가 더 많으며, 도시 자체의 성장에는 에너지를 덜 쓰게 된다 … 우리 인간은 콘크리트로 뒤덮인 도시로 땅을 점령해 버림으로써 생태계를 어지럽힌다 ..  (18, 56, 113쪽)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길잡이책입니다. 아니 '길잡이책을 알아보는 길에 한 번 들추어 보는 읽을거리'입니다. 이 땅과 사람과 목숨붙이 이음고리를 헤아리는 길잡이책이라 한다면 《수달 타카의 일생》(헨리 윌리엄슨)이나 《모래 군의 열두 달》(알도 레오폴드)이나 《슬픈 미나마타》(이시무레 미치코)나 《침묵의 봄》(레이첼 카슨)이나 《체르노빌의 아이들》(히로세 다카시)이나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쿠루사)나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이나 《우리들의 하느님》(권정생)이나 《너를 부른다》(이원수) 같은 책들입니다. 이러한 책을 먼저 차근차근 곱새겨 읽고 내 온몸으로 바르고 곱고 따뜻하고 즐거운 삶을 꾸려 낸 다음에 비로소 집어들면서 '이론을 갈무리해' 보도록 거드는 《생태학 개념어 사전》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은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른 삶을 꾸리고 있을 때에 앞으로 더욱 즐겁고 힘차게 이 길을 씩씩하고 튼튼히 걸어가도록 돕는 길잡이책입니다. 길잡이책이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맨 처음 읽는 책'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쥐어들며 읽는 책은 '배움책'입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배움책으로 삼는다면 생태와 환경을 놓고 '지식 쌓기'는 할 수 있으나, '삶 다스리기'는 할 수 없습니다. 생태와 환경 이야기란 지식을 쌓으려고 알아보는 갈래가 아닌 만큼, 지식을 쌓으려는 배움책으로 《생태학 개념어 사전》을 만나려 한다면, 차라리 이 책을 안 읽느니만 못합니다.

 

.. 우선순위의 방향을 경제에서 생태로 전환해야 한다 … 땅 일부를 야생 지역으로 남겨 두면, 인간이 간섭하지 않은 땅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 언제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  (190, 206쪽)

 

그런데, 책을 덮으며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생태학 개념어 사전》이 모자라거나 어리숙한 책이라서 아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번역이 그리 깔끔하지 못하며, 우리 말법과 말투에 알맞지 못한 대목이 많습니다. '쉽고 바르게'라는 잣대가 아니라, 우리 삶터에 발맞추는 말과 글이 못 되었으며, 우리 겨레 문화와 발자취를 곰곰이 되돌아보도록 돕는 말과 글이 아니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책 하나만 번역이 아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번역책들은 우리 말과 글을 옳게 살피지 않고 쏟아집니다. 외국말은 훌륭히 잘할는지 모르나 우리 말은 너무도 형편없이 못하는 분들이 번역일을 하고 있느라, '참 좋은 책'이 우리 말로 옮겨지기는 하지만, '참 좋은 모양새'로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좋은 책에 담긴 좋은 이야기를 좋은 넋을 살리는 좋은 말로 풀어내기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서 대단히 힘든 노릇일까요. 좋은 책을 좋은 말로 엮어내며 좋은 삶을 보여주고 좋은 생각을 어깨동무하기란 우리 터전에서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일까요. 아무쪼록, 앞으로는 우리네 지식인들이 우리 땅과 삶과 사람과 목숨에 걸맞는 '생태환경 이야기책'을 즐겁고 알차게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꿈을 꿉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2.24 14:23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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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 개념어 사전

어니스트 칼렌바흐 지음, 노태복 옮김, 박병상 감수,
에코리브르, 2009


#환경책 #책읽기 #환경문제 #생태학 #환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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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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