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에서 부르는 삶, 그 고비의 노래

최승호 시집 <고비>(현대문학,2007)

등록 2009.12.29 15:56수정 2009.12.29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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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몽골 초원의 여행 체험을 바탕으로 한 이동순의 새 시집 <발견의 기쁨>을 읽으며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시집이 최승호의 열둘째 시집 <고비>(현대문학, 2007)였다.

 

최승호 시인
 1954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197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그동안 펴낸 시집으로는 『대설주의보』『고슴도치의 마을』『진흙소를 타고』『세속도시의 즐거움』『회저의 밤』『반딧불 보호구역』『눈사람』『여백』『그로테스크』『모래인간』『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얼음의 자서전』(자선시집) 등이 있으며, 오늘의 작가상, 김수영 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최승호 시인은 몇 해 전 한 방송국의 다큐 프로그램 제작 일로 고비 사막을 다녀온 적이 있다. '풀이 자라지 않는 거친 땅'이라는 이름의 고비(Gobi) 사막에서 진행된 열흘간의 취재 경험에서 얻은 생(生)의 강렬한 느낌을 최승호 시인은 72편의 신작시로 이뤄진 시집 <고비>(현대문학,2007)에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모래 언덕뿐인 황량한 사막에서 시인이 본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無)의 풍경이 아닐까. 그 무(無)의 풍경은 죽음마저도 지워버리는 적막(寂寞)의 풍경일 게다.

 

"그 풍경과 일치하는 말이 있지 않을까/ 대평원은 황량하다/ 이런 말은 황량한 대평원과 일치하지 않는다/ 막막하다/ 묘사를 하려 해도 막막하고/ 진술을 하려 해도 막막하다"로 시작하는 시집의 앞부분에 놓여있는 시 '황량한 대평원'에는 '황량하다'라는 서술어가 무려 25번이나 반복된다.

 

일찍이 청마 유치환이 '생명의 서'에서 진술한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을 떠올리게 하는 고비(Gobi) 사막은 "아무리 둘러봐도 망망할 뿐/ 가야 할 길을 찾으려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다만 언제 이 길을 가다 죽었는지 모르지만/ 죽은 이의 해골만이 길을 가리키는 지표가 되어"주는 곳이다. 이런 극한적인 공간인 고비 사막에서 시인 최승호는 무엇을 보고 깨달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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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 시집 '고비'(현대문학,2007) 표지 사진

고비에서는 고비를 넘어야 한다

뼈를 넘고 돌을 넘고 모래를 넘고

고개 드는 두려움을 넘어야 한다

 

고비에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땅의 고요 하늘의 고요 지평선의 고요를 넘고

텅 빈 말대가리가 내뿜는 고요를 넘어야 한다

 

고비에는 해골이 많다

그것은 방황하던 업덩어리들의 잔해

 

고비에서는 없는 길을 넘어야 하고

있는 길을 의심해야 한다

사막에서 펼치는 지도란

때로 모래가 흐르는 텅 빈 종이에 불과하다

 

길을 잃었다는 것

그것은 지금 고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 '고비의 고비'전문

 

위 시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최승호 시인은 지금 고비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그는 길을 잃었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없는 길을 찾으려 고비 사막으로 달려간 것인가. 길 없는 고비 사막의 길 위에서 시인이 본 풍경은 어떠한가? 최승호 시인이 진술한 풍경의 일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텅 빈 침묵의 얇은 껍질에 지나지 않는가."(도마뱀), "날이 없는 칼처럼/ 그 무엇이든 도려내는 고비의 바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 울부짖으며/ 허공을 물어뜯는 고비의 바람- 뼈들이 겅중겅중 사막을 뛰어다닌다"(바람), "누가 모를까/ 고요는 형상이 없다는 것을"(되새김질), "사막/ 눈부시게 거대한 증발접시"(증발), "사막은 말이 없다."(빨래), "살을 내놔! 피를 내놔!/ 몸뚱이를 내놔!/ 사막이야말로 정말 큰 도적이더군요/ 어디론가 도망쳐야 하는데/ 사방이 다 사막이더군요"(도적). 이러한 고요의 적막(寂寞)이 사자처럼 포효하는 고비 사막에서 시인은 '뼈의 음악'을 듣는다.

 

만약 늑골들이 현이었다면, 그리고 등뼈가 활이었다면, 바람은 하나의 등뼈로 여러 개의 늑골들을 긁어대며 연주를 시작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막이라는 청중으로 꽉 찬 사막에서 뼈들의 마찰음과 울림은 죽은 늑대의 뼈나 말의 뼈와 공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며 적막이라는 청중의 마음을 깊이 긁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뼈의 음악은 그렇다. 아무런 악보도 없이 뼈로 뼈를 연주해 텅 빈 뼈들을 뒤흔든다.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

- '뼈의 음악' 전문.

 

시 '뼈의 음악'에는 죽음의 냄새, 아니 그 죽음마저도 삼켜버린 적막의 냄새가 진동한다. 악보도 없이 연주되는 '뼈의 음악'을 두고 최승호 시인은 "청중으로는 적막이 제일이고 연주자로는 바람이 적합하다"고 했다. 나는 여기에 한 말씀을 더 보태고 싶다. 이 '뼈의 음악'의 무대는 '모래'로만 만들어진 음악당이고, 지휘자는 생(生)과 사(死) 그 어느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한(無限)의 '시간(時間)'이라고.

 

생명체의 피와 살과 가죽을 육탈시켜버린 바람이 연주하는 '뼈의 음악'은 다시 보면 그것은 죽음의 음악이 아니라 삶의 음악이다. 포효하는 적막에 맞서 일지처럼 '고비'의 시를 써 내려간 최승호 시인은 고비에 가서 고비를 넘겼을까? 최승호 시인은 아래의 시에서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고비 사막에서 자신을 만났으니 고비를 넘어가고 있는 중일 게다.

 

나는 놀랐다

어떻게 사막에 아무것도 없을 수 있단 말인가

지평선의 충격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득한 곳에서 선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직선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 커다란 선은 둥글었고

그 텅 빈 원 속에

원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중략-

둥근 황무지는 울타리가 없다

가없는 곳에서 가없는 바람 분다

서늘하다

 

- '지평선'부분.

 

시에서 말하고 있는 사막의 지평선은 직선이 아니라 커다란 둥근 선이다. 이 가없는 울타리에서 부는 가없는 바람이 오고 가는 것을 본다. 시인은 이를 "서늘하다"고 한다. 생명의 한계적 존재인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인식일 터다. 그래서 시인은 "몸을 옷처럼 벗어버리는 그날"까지 "어제도 꾸물거리고 오늘도 꾸물거리고 내일도 꾸물거릴 것이다"(옷)라고 진술한다.

 

말(언어)로 이 세상과 삶을 노래해야 하는 시인은 "나의 말들은 저 적막에게 먹힐 것이다. 모든 의미들은 적막의 이빨에 씹힐 것이며 소리들은 적막의 목구멍으로 흘러들 것이다"라며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은 적막이 두렵다. 말은 적막이 두려워 말을 하고 또 말을 한다. 헛소리, 넌센스, 바닥  없는 농담, 무의 잠꼬대, 말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누가 알아들을 수 없을지라도 말은 말을 하고 또 말을 해야 한다."(포효)며 시인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재(存在)의 허무(虛無)에 빗장을 건다.

 

한때 말들의

눈 속에 호수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말들이 늘어뜨리고

물을 마실 때

호수라는 크고 푸른 눈동자 속에는

늘씬한 말들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운 곳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천지간에 남아 있는 것일까

 

무(無)는 형상들이 그립다

말들이 하늘가에서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호수의 푸른 물을

들이마시는 것처럼

- '호수가 있었던 자리' 전문

 

인용한 시「호수가 있었던 자리」에서 '호수가 있었던 자리'를 그리워하는 주체는 '무(無)'다. 시적 화자가 말하고 있는 저 '무(無)'가 한계적 존재인 인간의 근원적인 존재가 아닐까. "그리움이 천지간에 남아 있는 것일까// 무(無)는 형상들이 그립다"라는 시구가 내 가슴을 오래도록 서늘하게 만든다. 최승호 시인의 시집 <고비>는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모습을 되찾게 하는 한 권의 묵시록(黙示錄)이다. 다시 우리 앞에 내놓을 최승호의 다음 묵시록이 또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컬처라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12.29 15:56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컬처라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고비

최승호 지음,
현대문학, 2007


#고비 #최승호 #이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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