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가 '대한민국 만세' 삼창했다?

등록 2010.01.08 11:58수정 2010.01.08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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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8일 오후 2시 10분]
 

수정된 단지동맹비

러시아 크라스키노에 세워진 단지동맹비에 "대한민국 만세"로 새겨져 있다는 본 기사가 나간 후 누리꾼 '사마천'님이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단지동맹비는 "대한국 만세"로 이미 수정되어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진 확인 결과 단지동맹비는 '대한국 만세'로 수정되어 있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한 기자가 잘못된 비문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은 것이 작년 7월 중순으로 이후 수차례 잘못된 비문이 방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수정된 것을 미처 확인하지 못해 독자들에게 혼란을 드리게 된 점 사과 드립니다. 앞으로 사실 확인에 엄중을 기해 보다 정확한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조선을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을사조약이 체결된 것에 저항,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안 의사는 의병 참모중장으로서 국권회복을 위해 의병부대를 이끌고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고, 민권과 자유가 신장되는 사회정의를 외쳤으며, 옥중에서 순국 직전까지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 정신에 감화된 중국인들조차 그를 영웅으로 그를 추앙했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 저격 8개월 전인 1909년 2월 7일 또 다른 11인의 애국열사와 함께, 

두만강 건너 러시아 땅 핫산(옛 녹둔도)에서 10km쯤 북쪽에 위치한 크라스키노(한국식 지명 연추하리) 마을에서 왼손 무명지를 절단하는 단지동맹을 결행했다. 이곳은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던 역사의 현장이자, 안 의사가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초로 조직했던 의병대 '동의회'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던 곳이다.   

 

단지동맹비에 새겨진 "대한민국 만세"?

 

바로 이곳에 안중근 의사를 포함한 12인 애국열사의 단지동맹을 기리는 '단지동맹비'가 세워졌다.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이 높이 3m, 너비 1.5m 크기의 화강암에 비문을 새겨 마을 입구에 세웠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어 방치되었던 것을 2007년 11월 블리디보스톡 총영사관에서 유니베라(구 남양알로에) 현지농장 앞 공터로 이전했다. 유니베라 구원모 사장은 "이때 광복회는 동판으로 비문을 다시 제작, 옛 비문위에 실리콘으로 부착했다"고 말했다.

 

필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100년이 되던 지난 2009년 7월 크라스키노 마을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단지동맹비를 보는 순간 선열들의 뜨거운 기운(혼과 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비문의 내용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다. 그 때 우리 일행은 잘못 기술된 비문의 내용을 광복회에 알리고 정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직도 정정되지 않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올해는 일제가 조선을 강제병합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애국 선열들께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다.    

 

다음은 <비문> 전문이다.

 

단지동맹유지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김기용, 백규삼, 황병길,

조응순, 강순기,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 등 12인은 이곳

크라스키노(연추하리) 마을에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하다.

이들은 태극기를 펼쳐 놓고 각기 왼손

무명지를 잘라 생동하는 선혈로 대한독립

이라 쓰고 대한민국만세를 삼창하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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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비> 안중근 의사외 11인의 애국열사가 결행한 단지동맹을 기리는 <단지동맹비>가 러시아 연해주 추카노프카 마을에 세워져 있다. ⓒ 강동원

▲ <단지동맹비> 안중근 의사외 11인의 애국열사가 결행한 단지동맹을 기리는 <단지동맹비>가 러시아 연해주 추카노프카 마을에 세워져 있다. ⓒ 강동원

'대한민국 만세를 삼창하다'라는 문구가 아주 뚜렷하게 눈에 들어 온다.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참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럽다. 안 의사 등 12인이 손가락을 절단해 피로써 조선독립을 결의하던 이 때의 국호는 분명 '대한제국'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은 단지동맹 시점으로부터 10년이 흐른 뒤인 1919년 4월 임시정부 첫 의정원회에서다. 당시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상하이, 국내, 러시아 등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 대표자 29명이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대한'을 국호로 제안, 민주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을 붙임으로써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가 탄생했다.
 
그런데 그들이 '대한민국 만세삼창'을 했다니 정말 어이가 없다. 안 의사의 자주독립국가를 위한 독립운동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우리는 지금 어떠한가.

 

안 의사가 부르짖었던 민권과 자유신장에 바탕을 둔 사회정의는 우리 시대에서 억압과 착취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피를 흘렸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진정 민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정의와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걸까.

 

안 의사가 주창한 동양평화사상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화해와 민족공조로,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연대와 세계평화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남북정상의 6·15 공동선언과 10·4 공동선언으로 반세기 동안 닫혔던 남북의 문은 열렸고 그 성과는 지대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북관계는 어떤가.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있다.

 

애국선열들께 참으로 부끄럽다. 경술국치 100년인 올 해, 증오의 대상이 자꾸만 늘어나는 것을 경계한다. '단지동맹비'의 잘못을 바로 잡는 것 자체가 역사를 바로잡고 민족정기를 이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단지동맹비 #안중근의사 #크라스키노 #광복회 #대한민국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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