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개념 제주 여행, 결국 산으로 올라가다

[2박 3일 제주도 여행 ③] 계획 포기, 좌충우돌... 세상만사 새옹지마

등록 2010.02.01 16:29수정 2010.02.01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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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 한라산 등반]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제주도 여행 3일째 되는 날, 깊이 잠들지도 못한 채 눈을 붙였다가 아침 7시에 눈을 떴다. 간밤 방안에 가득 벌여놓은 짐들을 수습해 밖으로 나와 보니 자전거는 아예 폭삭 주저앉았다. 그 꼴을 마주한 순간, 내 마음도 덩달아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자전거로는 한 걸음도 옮겨 디딜 수 없게 됐다. 나는 결국 자전거여행을 포기했다.


자전거를 민박집에 맡긴 채, 시외버스를 타고 다시 제주시로 향했다. 탑동 자전거대여점에 들러 짐을 찾은 뒤, 시내버스를 타고 무작정 제주관광공사를 찾아갔다. 마침, 제주관광공사 앞에서 한라산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한다는 기사를 읽은 게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등산화 비슷한 신발과 등산복 바지를 입고 있었던 것 말고 등산 장비라고는 하나도 갖추지 않은 채, '뭐 또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한라산에 올라갈 참이었다. 겨울에 산에 오를 생각까지 하다니, 제주도에 와서 내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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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표지판. 이제 겨우 600미터를 올라왔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 성낙선

아이젠이 없으면 등반을 막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좀 마음에 걸렸다. 사실, 관광공사 앞에서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더더욱 그 버스가 한라산 어디를 왔다 갔다 한다는 건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막연히 알고 있는 정보 하나로 어떻게 잘되겠지 찾아갔는데, 그곳 건물 앞 주차장에 떡하니 붉은 색 셔틀버스가 2대씩이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셔틀버스는 어리목코스 등산로 입구까지 운행했다. 오후 4시까지 산에서 내려오면 다시 제주시까지 데려다준단다. 등산 장비 중에 반드시 확보해야 할 것이 아이젠인데, 그 역시 등산로 입구 매점에서 판매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 정도면 '됐다' 싶었다. 뭘 해야 좋을지 모를 제주도 여행 3일째, 한라산 등반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얼마나 가슴이 뿌듯하던지, 이날 아침까지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왔던 사건들 모두 까맣게 잊혔다. 이 셔틀버스는 주말 관광객들이 몰리는 금토일과 공휴일에만,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 운행하고 있었다.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운 날, 승용차 운전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이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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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관광공사 앞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어리목 등산로 입구로 올라가는 길. 길 위에 눈이 덮여 있다. ⓒ 성낙선


셔틀버스가 주차장을 떠난 시간이 오전 10시. 드디어 또 다른 여행이 시작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다. 간밤에 눈이 내렸던지, 도로에 희끗희끗 눈이 쌓여 있었다. 눈이 조금만 더 내렸더라면 체인 없이 올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셔틀버스는 1100도로 어리목코스 입구 정류장 앞에 사람들을 내려주었다. 여기에서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까지는 2km를 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차에 있을 땐 몰랐는데, 눈이 부슬부슬 내렸다. 눈 내리는 겨울산, 차고 맑은 공기, 참 등산하기 좋은 아침이었다.


처음 만난 아이젠, 만만치 않네

아이젠이란 놈, 그동안 말만 들었지 이렇게 직접 대면하기는 처음이었다. 참 낯설게 생겼다. 한 10여 분을 걸은 뒤에 드디어 그놈을 발에 차야 할 때가 왔다. 그런데 처음에 그놈을 꺼내 발가락 부분에 대고 고정하려다 열이 뻗혀 죽는 줄 알았다. 이거 혹시 아이젠에도 사이즈라는 게 따로 있어서 내 발에 맞는 걸 달라고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구시렁거리기까지 했다. 나중에 그놈을 돌로 쳐서 편 다음 다시 내 발에 맞게 구부릴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혹시 발바닥 안쪽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고정하는 게 아닐까 해서 그곳에 대봤더니 딱 맞았다. 아이젠을 돌로 치려던 내 꼴이 어찌나 우습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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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초입. 아직은 걸은 만한데, 곧이어 경사가 급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 성낙선


등산로에 눈이 두텁게 덮여 있었다. 침목으로 계단을 놓았던 등산로가 눈으로 덮여, 눈과 얼음이 뒤섞인 미끄러운 비탈길을 이루고 있었다. 뽀드득 뽀드득, 아이젠으로 눈을 밟는 소리가 요란했다. 어리목코스는 내내 오르막길이다. 중간 중간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 아이젠을 신고 걷는 길이라 그런지 더욱 힘들었다. 등산객들 중에 더러 아이젠 없이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땀이 솟았다. 옷을 있는 대로 다 껴입은 데다 바람이 통하지 않아서인지 몹시 불쾌했다. 겉옷을 하나 벗어 버리면 시원해질 것 같은데 그랬다간 덜컥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이마로 줄줄 땀이 흘렀다. 아마 이때쯤 안 봐서 모르긴 한데 내 머리 위로 허연 김이 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길을 50대 아주머니 네 분이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신이 나는지 '호호 하하' 산길이 시끌시끌했다. 그렇게 함께 웃고 떠들며 오르는 길이라 그런지 그들의 얼굴에선 그다지 힘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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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에 눈이 덮여 길을 분간하기 어렵다. 빨간 깃발을 따라가야 한다. ⓒ 성낙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쉬어가기를 여러 차례, 겨우 사제비동산에 올랐다. 여기부터는 제법 경사도가 낮아 걷는 데 그렇게 힘든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제비동산에서 약수를 떠 마신 뒤 다시 길을 나서는데, 그때부터는 검은 구름 속 하얀 눈길이었다. 갑자기 불어닥친 구름에 10m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앞서 간 사람들이 순식간에 구름 속으로 사라져 버리더니,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쓰윽 구름 속에서 나타나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내 평생 이런 신기한 마술을 눈앞에서 목격하기는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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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사이를 헤치고 나타나는 등산객들. 눈 밑에 깔린 원래의 등산로가 살짝 들여다보이는 길. ⓒ 성낙선


사제비동산에서 시작된 구름 속 산책은 윗세오름 휴게소까지 계속됐다. 2km 가까운 길을 구름 속에서 거닌 셈이다. 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거짓말처럼 구름이 걷혔다. 앞서 도착한 사람들이 휴게소 계단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니, 이내 멀리 한라산 정상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잠시 후 구름이란 구름은 모두 산 아래로 가라앉은 듯, 하늘엔 구름 한 점 남지 않았다. 한라산 어리목 등산코스는 윗세오름을 지나 남벽분기점까지만 이어진다. 백록담까지 오르려면 성판악이나 관음사 코스를 이용해야 하고, 그 코스로는 어지간한 등산 경력 없이는 오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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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가린 한라산 정상. 오른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이 윗세오름 휴게소.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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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걷힌 뒤에 맑은 얼굴을 내비친 한라산 정상. 흰 눈과 파란 하늘이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 성낙선


윗세오름 휴게소에서 컵라면을 사먹었다. 이곳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누구나 한 그릇씩 해치우고 내려간다는 컵라면, 겨울 산행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 된 지 오래다. 컵라면 한 그릇이 금세 뱃속으로 사라진다. 버릴 것이 없다. 다들 이 컵라면을 하나씩 들고 젓가락질을 하느라 정신들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는 컵라면 빈 용기를 비닐봉지에 담아 배낭에 매달고 기분 좋게 산을 내려갔다. 휴게소에는 쓰레기 버릴 곳이 없다. 쓰레기는 모두 최소한 등산로 입구까지 가지고 내려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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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 저 멀리 산 아래 구름이 깔려 있다. ⓒ 성낙선


내려가는 길에 구름이 걷혀 또 다른 장관이 펼쳐졌다. 구름은 산 중턱 아래로 낮게 깔려 있었다. 내려가는 길은 거의 반자동이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계속 발을 앞으로 내디뎌야 했다.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갔다. 그 와중에 눈썰매용 깔판을 가지고 올라온 남자 대학생들 여럿이 있어, 내려가는 산길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뉘 집 자손들인지 참 명랑들하시다. 등산로에서 눈썰매를 타지 말라는 금지 플래카드가 붙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이 반드르르 닦아 놓은 길을 밟아 내려가는데 꽤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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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이 없었다면 설설 기어서 내려가야 했을 길. ⓒ 성낙선


좌충우돌 2박 3일, 그리움으로 남을 땅 제주

오후 3시 등산로 입구에 도착했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2박 3일 제주도 여행이 이렇게 막을 내렸다. 처음부터 돌풍을 만나 정신없이 휘둘리기 시작한 여행이, 마지막 날 운 좋게 한라산 등반으로 마감을 하게 되었다.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식의 계획 상실, 무개념 여행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먼 훗날 아득한 그리움으로 남을 게 분명하다.

제주도는 도무지 애정을 버릴 수 없는 곳이다. 자전거 고장으로 뜻밖의 고생을 겪기는 했지만, 그건 불가항력적인 요인이 강하게 작용한 탓이다. 자전거 대여점 직원들은 내게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다. 자전거점포 주인들은 필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자리를 비웠을 것이다. 오토바이 수리점 기사들은 자전거점포와의 상도의를 지킬 수밖에 없었을 터이고.

민박집 주인은 졸지에 교통수단을 잃은 나를 버스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태워다 주었다. 그리고 자전거 고장으로 불편해진 내 심기를 다독여주려 애썼다. 고내포구의 한 음식점 주인은 문 밖까지 나와 나를 배웅해 주었다. 길에서 만난 한 초등학생은 내게 길을 가르쳐준 다음에 '안녕히 가시라'고 집안 어른 대하듯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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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 만세동산 전망대에서 올려다본 한라산 정상. ⓒ 성낙선


숨가쁘게 돌아친 3일이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3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런 식의 여행도 꽤 의미가 있을 법하다. 펑크에 대처할 수단만 충분했다면 생각하기에 따라 시종일관 즐거운 여행이 될 수도 있었다. 하루는 올레 여행을, 또 하루는 자전거 여행을, 그리고 마지막에는 한라산 등반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거 꽤 괜찮은 방법 아닌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눈을 떠보니 그새 서울 하늘이었다. 문득 창 밖을 내려다 보니 거기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불빛들이 도로와 광장과 건물들을 알알이 비추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밤은 왜 또 그렇게 아름답던지, 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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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낙선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월 20일부터 22일까지 제주도를 다녀왔습니다.
#한라산 #제주도 #윗세오름 #만세동산 #사제비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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