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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의 추억', 당신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영화로 읽는 세상 이야기 16] 현대인의 소외된 성(性) <나인 송즈>

10.02.09 17:12최종업데이트11.05.2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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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 2008에서 표현의 자유와 수용 과정의 오해 등을 다루는 기획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영화 <나인 송즈> 포스터. ⓒ 레볼루션 필름스

영화를 즐기는 이들이라면 기를 쓰고 보는 관문 같은 영화가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과 엔니오 모리꼬네 두 거장이 만나 영사기사 알프레도 아저씨와 꼬마 토토 간의 우정과 영화에 대한 사랑을 인생과 영화 예술의 위대함으로 확장시킨 주옥같은 작품, <시네마 천국>입니다.

<시네마 천국>에는 영화의 키스신들을 '음란하다'는 이유만으로 죄다 잘라내는 마을 신부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음란한' 영화를 보고 자란 토토는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고 알프레도 아저씨와 세대와 생사를 넘어서는 영혼의 교감을 이뤄냅니다.

세월이 흘러 영화감독이 된 토토에게 알프레도가 남긴 마지막 선물은 삭제된 키스신 모음집입니다. 여기서 OST '러브 테마'가 흐르며, 음란했던 장면들은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영화의 추억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진짜 음란한 영화를 만난다면? <시네마 천국>의 키스신 정도가 아니라 두 남녀의 성기는 물론 실제 정사 장면까지 있는 그대로 발가벗기는 영화가 있습니다. 제목대로 아홉 번의 사랑과 아홉 번의 콘서트가 교차하면서 현대인의 '소외된 사랑'을 인상적으로 그려 낸 독립영화 <나인 송즈(9 songs, 2004년작)>입니다.

아홉 번의 콘서트와 아홉 번의 사랑  

"내가 그녀를 생각할 때 떠올리는 것은 단지 그녀의 체취와 그녀의 맛, 날 갈구하는 그녀의 살." 극지 리서치차 남극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매튜의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매튜는 영국의 인디 공연장인 브릭스턴 아카데미에서 리사를 만납니다. 리사는 교환 학생으로 1년간 런던에 온 학생. 시간이 흐를수록 둘은 서로에게 끌리고 감정의 결도 쌓이지만, 결국 어찌할 줄 모르고 리사는 미국으로 돌아가고 매튜는 그녀를 붙잡지 못합니다. 그 사이 둘은 아홉 번 공연장에 가고,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렬하게 사랑을 나눕니다.

매튜와 리사의 사랑은 시간이나 장소 불문하고 불붙는다. 그리고 둘은 그 사랑의 정체를 안다. 건조한 사랑일 뿐이라는 것을. ⓒ 레볼루션 필름스


<나인 송즈>는 섹스 장면들을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햇살이 비치는 부엌에서 식탁에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십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툭, 툭 칩니다. 그리곤 키스하고 깨물고 의자에서, 침대에서, 욕조에서 사랑을 나눕니다. 음악을 듣고 춤을 추며 실없이 웃다가 질투도 하면서 또 포개집니다. 위에서 아래서, 눈을 가리고 눈을 뜨고,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에 자위도 해보기도 하고, 그렇게 사랑을 한 뒤, 여자는 침대에 드러누워 남자에게 책을 읽어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영화는 일상의 한 단면을 잘라 놓은 것 같은 '생활 속' 사랑을 여과 없이 틀어 놓습니다. 두 남녀의 감정의 결을 예민하게 포착하던 앵글은 싱싱한 육체의 결합에서 놀란 듯 가끔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하기도 합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삶의 파편들 속에 앵글은 몰래 숨어든 것 같고, 둘의 사랑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은 채 '외롭게' 똬리를 틉니다. 

독립영화여, 권력과 자본에 맞대거리 하라

<나인 송즈>가 영화와 포르노의 경계에 서 있음에도 비틀거리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껏 영화 속 사랑이 '신'(판타지)이거나 아니면 과도한 물량공세로 자극만 하는 성에 머무른 데 비해 영화는 솔직담백한 현실 속 사랑으로 스크린을 채우기 때문입니다. 지루하지만 편안한 일상에 녹아든 사랑 말입니다.

영화가 생생한 살 떨림과 열정적인 록 콘서트로도 서로를 확인할 수 없는, 현대인의 관계의 소외를 성(性)을 통해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표현의 장르를 새로이 개척할 수 있게 된 데는 저예산 독립영화를 지향하는 감독 마이클 원터바텀의 영화 철학이 버티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006년에 미국의 폭력으로 무너지는 아프가니스탄의 핏빛 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해 격찬을 받았던 세미다큐멘터리 <관타나모로 가는 길>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그는 정치색 짙고 소재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도전적인 연출 솜씨로 일찌감치 거장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인디 음악인들의 라이브 콘서트 공연장으로 유명한 영국 런던의 브릭스턴 아카데미의 록 공연 장면. 매튜와 리사의 사랑도 선율을 타고 흐른다. ⓒ 레볼루션 필름스


그런 그가 현대 사회의 성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포르노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에 정공법으로 도전한 독립영화가 <나인 송즈>입니다. 본시 포르노는 자본주의가 게걸스럽게 먹잇감을 찾던 시절, 사창가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뭇 사내들의 욕망의 배출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 포르노에 정면으로 맞서 마이클 원터바텀은 이 영화에서 현대인의 관계의 소외를 성과 콘서트와 허무라는 키워드로 포르노그래피하게 그려내면서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 냅니다.  

정상적인 시대의 독립영화라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본연의 역할 외에 '표현의 힘'을 끊임없이 각색하고 연출해 내야 합니다. 그러나 한국처럼 좌파 적출의 시나리오로 영화계가 사경을 헤매고 특히 독립영화의 씨를 말리려는 시대에 영화는 시스템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간고한 투쟁에 매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독립영화 본연의 작가 정신을 충실하게 작품에 담아 나가기 위한 표현의 실험은 계속돼야 합니다.

이를 테면, 인간의 감각과 의식의 주요 테마인 성을 포르노로부터 독립시켜 일상생활 속에서의 사랑으로 전환시켜 내기 위한 표현의 실험 또한 되풀이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마저 상품화시키는 현대사회에서 영화가 성의 상품화에 '반기'를 들고 소외된 사랑을 복원하며 관객과 폭 넓게 호흡할 때, 권력과 자본에 맞대거리할 수 있는 '영화의 힘'은 외연을 넓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인 송즈, 허무한 사랑 <설국>과 통하다

아홉 개의 노래에 사랑을 실려 보내는 <나인 송즈>는 창밖으로 함박눈이 흩뿌리는 한 겨울, 음악을 틀어 놓고 흔들의자에 앉아 한 편의 시를 읊조리듯 젖어드는 영화입니다. 물론 그 시는 몸뚱이가 노래하는 슬픈 음률이자 허무의 끝자락입니다.

이는 영화의 계절 배경이 겨울이어서만은 아닙니다. 매튜가 "남극의 빙하 속에는 인류가 탄생하기 전의 기억이 그대로 얼어서 담겨 있다"고 말한 것처럼, 관계는 사랑의 기억으로만 남아 있고 시간이 흐르면 녹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끔 그것을 캐어내 추억의 한 컷으로 음미할 뿐입니다.

마치 날것으로 헐떡이던 매튜와 리사의 거친 격정 뒤안에 좁혀지지 않는 사랑의 간극이   흐르고, 절절한 뼈와 뼈의 부딪힘, 살과 살의 파고듦, 속살과 속살의 교합에도 불구하고 끝내 도달할 수 없는 둘의 거리는 결국 나를 사랑하는데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의 소외된 사랑에 다름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건조하며 해발고도 또한 가장 높아 사시사철 모진 바람이 거칠게 부는 대륙 남극. 태초의 비밀을 간직한 남극을 리서치하는 매튜의 발자국이 그의 내밀한 사랑만큼 인상적이다. ⓒ 레볼루션 필름스


"남극대륙을 날다보면 빙원들의 여정을 거꾸로 볼 수 있다"로 시작하는 매튜의 마지막 독백은 이런 현대인의 어긋난 사랑의 근원이 사실은 관계의 상실에 있고, 그 관계의 상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낮설어 하는 현대인이 사회 관계로부터 소외된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막막한 두려움에 뿌리박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영화는 유명한 록 밴드들의 실제 공연 사이사이 노랫말을 통해 매튜와 리사의 건조한 감정의 편린을 들춰냅니다. 

현대인의 소외된 사랑을 노래한 영화는 온통 눈 속에 파묻힌 세상과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 처연한 허무를 절묘하게 대비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떠올리게 합니다. 남극과 록 밴드와 두 남녀. 눈의 고장 니가타와 온천과 세 남녀. <나인 송즈>와 <설국>이 교차하며 만나는 지점입니다. 영화의 남극과 <설국>의 눈은 태초의 무한함을 상징합니다. 또한 매튜와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시대를 뛰어 넘는 고독과 허무로 일맥상통 합니다.

그리고 <설국>의 다음 문장은 보다 확연하게 <나인 송즈>와의 연결점을 보여 줍니다.

"확실히 기억해내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잡히는 곳 없이 희미해져가는 기억의 미덥지 못함 가운데, 이 손가락만은 여자의 촉감으로 지금도 젖어있어. 자신을 멀리 있는 여자에게로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으나, 문득 그 손가락으로 유리창에 선을 긋자 그 곳에 여자의 한쪽 눈이 뚜렷이 떠올랐다."

다채로운 감정의 결을 불러일으키면서 성의 아득함을 표현하는데 금상첨화격인 가와바타의 이 글은 <나인 송즈>에서 매튜가 중얼거리는 독백과 맞닿아 있습니다. 비록 감각의 편린에 깃들어 있는 한 움큼 빛바랜 허무의 기억처럼 그 흔적을 쉽사리 찾을 수 없을지라도.

어찌 보면 간략하고 어찌 보면 절제했으며, 어찌 보면 포르노그래피하고 어찌 보면 독립영화의 새로운 장르를 열어 놓은 <나인 송즈>. 하지만 외설과 표현의 한계에 대한 편견을 접으면 영화는 제대로 보입니다. 사랑의 행위에 대한 영화이고, 사랑은 사랑이되 '소외된 사랑'이고, 한 걸음 걸어 나와 사랑에 대한 당신의 추억과 현재진행형은 어떤지 되묻게 하는 영화이고, 결론은, 심플하다는 것.

나인 송즈 독립영화 포르노 마이클 원터바텀 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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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열의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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