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공학자가 왜 가수가 됐을까

[2030에게 희망을 묻다⑨] <레 미제라블>로 주목 받은 '루시드 폴'

등록 2010.02.21 11:29수정 2010.02.2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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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을 만나기로 한 2월 16일, 필자는 오전 내내 그의 4집 앨범인 <레 미제라블>을 듣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그의 음악을 찾아서 들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사실 필자가 루시드 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음악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루시드 폴은 1999년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후, 2004년 스웨덴 왕립공과대학 (KTH) 대학원에서 재료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2008년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학교 (EPFL)에서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07년에는 스위스 화학회 '폴리머 사이언스 부문' 최우수 논문 발표상을 수상하였고, 그가 논문을 통해 발표한 '일산화질소 전달체용 미셀(Micelles for Delivery of Nitric Oxide)'이라는 의료용 물질은 미국 약품 특허를 취득하기도 했다.

 

이렇게 공학자로서 탄탄하게 입지를 굳히던 그는 돌연 귀국해서 전공과는 완전 무관한 음악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1993년에 서울대학교를 입학해서 2008년 스위스 로잔 연방공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15년에 걸쳐 공학도로서 쌓아올린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기한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안정된 수입이 보장된 공학자의 미래를 걷어차고 불확실한 음악인의 미래를 선택한 그를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루시드 폴이 음악인의 미래를 선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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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 ⓒ 루시드 폴

루시드 폴 ⓒ 루시드 폴

 

"스위스에서 박사 논문이 통과되고 일주일 동안 휴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친구 집에서 쉬었는데요. 그때 제가 그 친구에게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살면서 놀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즐겨본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았는데요. 열심히 해야 된다, 바쁘게 살아야 된다는 교육은 많이 받았는데 어떻게 잘 놀아야 하는지를 아무도 얘기해 준 적이 없더군요. 노는 방법도 모르겠고, 논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술 마시고 그냥 퍼져 있는 것이 노는 건가? 여행 가는 것이 노는 건가? 뭔지 모르겠더군요.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동안 시간을 다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루시드 폴은 스위스에서 '워커홀릭(Workaholic)'으로 불렸다고 한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거의 빠짐없이 실험실에 나와서 일을 할 정도였다. 이란에서 온 친한 친구가 주말마다 그를 불러내서 함께 놀려고 애를 썼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혹시나 그러다가 미칠까봐 걱정해서 그랬단다.

 

"당시에는 정말 즐겁게 공부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년 정도 그렇게 사니까 이상이 오더라고요. 어깨가 너무 무겁고 결리더군요. 몸이 안 좋아지더라고요. 그게 결국은 긴장, 스트레스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더 좋은 저널에 논문을 내야지, 빨리 졸업을 해야지, 어려운 프로젝트를 보란 듯이 성공시켜야지, 이런 것들이 겹쳐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단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통장 잔고는 줄어가지만, 정말로 선물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말했다.

 

"아침에 좀 늦게 일어나면 어떻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거예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삼일 동안은 집에서 라면만 끓여 먹으면서 만화책을 볼 수도 있는 것이고요. 우리는 쉬는 것에도 엄숙주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멋있게 쉬어야 하고, 쉬면서도 교양서적을 봐야하고, 그런 것들 말이죠. 저는 막 놀았어요. 못 만났던 친구 만나 술 마시고, 강아지 키우고, 산책도 다니고요.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물론 음반 낼 때가 되면 열심히 일을 했죠. 내가 원하던 일이고 가야하는 길이니까요. 즐겁게 했습니다."

 

"프리랜서와 백수는 종이 한 장 차이... 일 없으면 백수"

 

그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필자의 마음속에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절대로 다시 공학자의 길로 돌아가지 않겠구나.'

 

"음악을 하겠다는 결정은 쉽게 했습니다. 문제 자체가 가벼워서 쉬웠다는 것은 아니고 답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민은 많이 했어요. 고민의 가장 큰 부분은 두려움이었는데요. 어떤 것이냐 하면, 제가 병역특례로 1999년부터 3년 반을 안성의 공장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공부할 때도 계속 월급을 받았어요. 그쪽에서는 대학원 학생이 고용된 연구원 성격이 강하거든요. 그렇게 매달 월급 받으면서 10년을 지냈는데, 이제는 통장에 매달 들어오는 돈이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이죠. 프리랜서와 백수는 종이 한 장 차이잖아요. 일거리가 없으면 백수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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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 4집 앨범 <레 미제라블> ⓒ 안테나 뮤직

루시드 폴 4집 앨범 <레 미제라블> ⓒ 안테나 뮤직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있다. 음반 시장의 열악한 상황 말이다.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다는 상황을 항상 경신하고 있지 않은가. 음악에 전념하기로 결정을 한 루시드 폴에게는 이것이 자신의 현실인 것이다. 어려운 음반 시장의 상황을 이겨낼 해결책을 물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면서 삽니다. 기본적으로 사는 것이 힘들잖아요.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렵다고 봅니다. 애를 낳아서 교육시키기 힘들고, 집 한 채 장만하기도 힘들고, 회사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이런 상황에서 여유 있게 차 한 잔 마시면서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러 갈 정신적 여유는 없죠. 단순히 돈 1만 원, 2만 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친구랑 술 한 잔 하면서 몇 만 원 쓸 수 있지만 음악 시디를 살 여유는 없는 거죠.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거예요. 지금 음악을 많이 듣는 10대라도 나중에 30대, 40대, 50대가 되면 음악을 안 들을 겁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한 필자에게 그는 계속해서 조곤조곤하지만 신념 있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야근이 당연한 것이고,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그런 상황에서 시디사라고 아무리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옛날에 음악을 너무너무 좋아하고, 저보다 음악도 더 많이 듣고, 음악 하겠다고 얘기하던, 그런 친구랑 어제 술을 먹었는데요. 그 친구가 '음반시장은 앞으로 30대 40대 연령대에서 팽창할 거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기에 제가 얘기했어요, 너 지금 음악 안 듣지 않느냐고, 너 최근 2년 안에 시디 산 거 있냐고, 멜론이나 싸이월드에서 MP3 산 적 있냐고 말이죠. 그 친구도 남 보기에는 근사한 직장을 다니지만, 하루에 4시간 5시간밖에 못자고 밤 12시, 1시까지 일하는 것이 예사예요."

 

"음악 하겠다는 결정 쉽게 했다, 답이 확실했기 때문"

 

익히 알려져 있듯이 그가 만든 음악들은 사회적 이슈를 피해가지 않는다. 최근 앨범인 4집 <레 미제라블>에 수록된 '평범한 사람'이 용산참사 문제를 다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음악만큼이나 음반 시장의 위기를 보는 그의 시선은 좀 더 근본적인 문제에 닿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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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 ⓒ 루시드 폴

루시드 폴 ⓒ 루시드 폴

 

"한 뮤지션이기 전에 한 개인으로서, 우리가 만날 연애질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잖아요. 신문도 보고 뉴스도 보고,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그 중에서 내가 노래하고 싶고 만들고 싶은 것이 음악의 주제가 될 거예요. 우리 집 강아지 얘기일수도 있고, 애인 얘기일수도 있고, 사회문제일 수도 있고요. 그건 제 자유잖아요."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스스로 만족할 만한 완성도로 만들어 내고 싶다고 말한다. 자신이 음악을 하는 이유는 그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누가 들어주든 그렇지 않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것이란다.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다. 루시드 폴의 음악이 그 자신의 모습을 닮아 있는 이유를 말이다.

 

공학자의 삶은 루시드 폴, 아니 조윤석에게 안정적인 삶과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통장을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공학을 통해서는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한편 음악가의 삶은 그에게 안정적인 삶과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통장을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윤석, 아니 루시드 폴은 음악을 통해서 그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음악을 하겠다는 결정은 쉽게 했습니다. 문제 자체가 가벼워서 쉬웠다는 것은 아니고 답이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루시드 폴의 대답이다.

덧붙이는 글 주변 분들중에 단순히 취업준비와 스펙쌓기를 넘어서 도전적인 삶으로 희망을 일구어나가는 20대 30대의 청년이 있다면 이메일 reltih@nate.com 로 추천해주세요. 많은 분들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루시드 폴 #조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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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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