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펼치다

[두 바퀴에 싣고 온 이야기보따리 79] 성주 만세운동과 파리장서 사건의 발단이 된 '성주'

등록 2010.03.01 14:20수정 2010.03.0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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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야계(倻溪) 송희규 선생(1494~1558년)이 지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163호입니다. 이곳에는 우리 나라 독립운동을 펼친 매우 뜻 깊은 곳이랍니다. ⓒ 손현희


올해로 91주년을 맞는 3·1절입니다.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며 울부짖으면서 만세운동을 펼치던 그 울분을 하늘도 아는 걸까? 아침부터 비가 잇달아 내리는 3·1절입니다. 나라 잃은 설움, 일제강점기 부끄러운 역사 앞에서 조국을 되찾겠다는 한 마음으로 모든 백성이 태극기를 드높이며 일어나던 때, 역사를 바로 알고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 날이 얼마나 뜻 깊은 날인지 모릅니다.

얼마 앞서 3·1절 운동의 대표되는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질 뻔한 이야길 듣고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게다가 어제 뉴스에서 보건대, 3·1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겨우 54% 밖에 안 된다는 조사는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였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우리 나라 역사를 바로 알고, 또한 더욱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워줄 책임이 우리 어른들한테 있지 않을까요?


경북 유림들의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한 곳 성주 '백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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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나무 이름난 옛집에 갈 때마다 보았던 '회나무' 이곳 백세각에는 집 안쪽 마당에다가 회나무를 심었습니다. 그것도 세 그루 씩이나... 본디 회나무는 대과에 급제했을 때 심는다고 하는 군요. 그렇다면 이 집안엔 세 분이나? ⓒ 손현희

우리 지역 가까운 곳에 '백세각'이란 곳이 있습니다. 지난해 10월에 다녀왔는데,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자리 잡은 옛집입니다. 조선의 문신이었던 야계(倻溪) 송희규 선생(1494~1558년)이 지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163호입니다.

당시 세도가였던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섯 해 동안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이름을 고산이라고 바꾸고 이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답니다.

이 백세각이 남다른 것은 바로 이곳에서 지난날, 1919년 3·1운동 당시에 공산 송준필을 비롯하여 성주 지역 유림들이 성주 장날이 서는 4월3일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고 보관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경북 유림단이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하며 모여서 유림들의 궐기를 독려하는 '통고국내문'을 만들고 배포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라를 되찾겠다는 여러 문인들의 독립운동 첫 걸음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숨 쉬는 곳이 바로 백세각입니다.


백세각에 들어설 때, 우리를 가장 먼저 맞아준 건 키가 큰 회나무 세 그루였답니다. 몇 해 앞서 해평 북애고택에 갔을 때 봤던 똑같은 회나무가 이 집에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회나무가 옛집에 있는 남다른 뜻을 잘 몰랐는데, 백세각을 지키며 이곳에서 살고 있는 송만수(61)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매우 뜻 깊은 나무라는 걸 알았어요.

본디 회나무는 대과에 급제한 집안에서만 심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이 집에는 세 그루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대과에 급제한 분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걸 말해주는 거지요. 또 이 집에는 다른 곳과 달리 집안에 이 나무들이 있는 게 퍽 남달랐어요.

해평 북애고택이나 성주 회연서원에서 본 건 모두 대문간이나 집 앞 뜰에 있었답니다. 이 댁 어른께 들은 이야기로는 남달리 불에 약한 터와 집 때문에 화기를 보호하려고 집안에 심은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었어요. 실제로 이집에서 불이 여러 번 났었고, 최근에는 13년 전에도 불이 나서 사랑방이 타버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성주 장날 '4·3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몰래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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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몰래 만들고 보관했던 곳 백세각 다락방에 이 지역 유림들이 모여서 성주 장날 4.3만세운동 때 쓸 태극기를 몰래 만들고 보관했답니다. 또 이곳에서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하기도 했지요. ⓒ 손현희


송만수씨의 안내를 받으며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는데, 집 모양도 퍽 남다르고 이곳에 얽힌 역사 배경도 귀를 쫑긋이 세우고 듣게 하시더군요. '口' 자 모양으로 된 안채에는 높다랗게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세워졌는데, 맞배지붕 건물에다가 쇠못을 쓰지 않고 구멍을 뚫어 사리로 얽어놓았다고 합니다. 또 대패질을 하지 않은 채 자귀로만 깎고 다듬어서 만든 집이라고 하네요.

무엇보다 놀라운 건 오른쪽으로 얕은 나무 계단을 밟고 좁은 난간을 붙잡고 올라서면 다락방이 두 곳이 있어요. 바로 이곳에서 그 옛날 경북 유림들이 한데 모여서 '파리장서 사건'을 의논하고 성주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펼칠 때 쓸 태극기를 손수 만들고 보관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또 파리장서 사건을 일으키며 전국의 유림들이 일어나 줄 것을 부탁하는 '통고국내문'을 쓴 곳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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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유림들의 발자취를 따라 작은 다락방, 태극기를 만들고 보관했다던 그 곳 안을 보려고 허리를 숙여 들어갔어요. 나무로 된 좁고 낮은 난간을 붙잡고 겨우 올라갔답니다. 그 뜻 깊은 역사가 숨쉬는 곳에 지금은 휑하니~ ⓒ 손현희


국내에 통고하는 글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서울을 비롯하여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와 큰 항구 및 깊은 산골 외진 마을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호하고 춤추며 한 마음으로 함께 외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내린 것을 뉘우치고 사람들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도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소리 없이 통곡한 지가 지금 십년이 되었도다 이제 천 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여론이 스스로 공평하여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있는데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에 문을 닫고 앉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글을 띄워 우러러 고하노니 이것은 실로 온 나라가 같은 심정일 것이며 여러 군자들의 생각 또한 마음속에서 빛날 것이다.

원컨대 지금부터 군에서 향으로 향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 회의에 글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 함으로써 공평한 여론이 널리 펼쳐지게 한다면 천만다행이리라. [통고국내문 전문]


파리장서 사건의 발단이 된 '백세각'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의 유림(儒林)대표 곽종석(郭鍾錫) ·김복한(金福漢) 등 137명이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 탄원서를 작성 서명하여 이를 심산 김창숙 선생이 상하이[上海]에서 파리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낸 것이에요. 그러나 일경(日警)에게 발각되어 곽종석 이하 대부분의 유림대표가 체포되었으며 일부는 국외로 망명하였다. 그 후 곽종석 ·김복한 ·하용제(河龍濟) 등은 감옥에서 순사하고 그 밖의 인사들도 일경의 고문에 못 이겨 죽거나 처형되었어요.

3·1운동 때엔 온 나라의 일반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고 한다면, 파리장서 사건은 그때 함께 하지 못했던 유림들은 일제에 강제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잘못된 일을 세계에 알리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뜨거운 마음으로 들고 일어난 매우 뜻 깊고 소중한 일이었답니다.

바로 이런 뜻 깊은 일을 이곳 백세각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하니,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더군요. 이 뜻 깊은 곳에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굳은 의지로 태극기를 만들고 유림들에게 알리는 '통고국내문'을 쓰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편지를 쓰며 의논하던 곳이었어요. 이렇게 매우 훌륭하고 뜻 깊은 역사를 지닌 곳이 우리 지역 가까이에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지낸 것도 퍽이나 부끄러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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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사랑채 키 높은 회나무가 반겨주는 대문에 들어서면 일자 모양으로 된 사랑채가 나옵니다. 이 건물은 몇 해 앞서 불이 나는 바람에 새로 다시 고쳐 지었다고 합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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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사랑채를 옆에서 본 모습이에요. 남달리 불에 약한 터라고 할까요? 풍수지리를 보는 분들도 그렇게 얘기를 한다고 합니다. 새로 고쳐지은 사랑채랍니다. 백세각 전체 바깥 모습을 보면 뭔지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축대를 봅니다. 안과 밖에 모두 네모난 모양의 축대를 쌓아 만들었는데, 이것도 후손들이 새로 큰돈을 들여 쌓았다고 하는데, 어쩌면 원형대로 복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훼손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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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불이 나기 앞서는 저 '백세각'이란 현판의 글씨가 한석봉 선생의 글씨로 쓴 것이라고 하네요. 불이 나는 바람에 그만 안타깝게도 다시는 볼 수 없답니다. ⓒ 손현희




역사를 널리 알리며 그 장소 또한 제대로 보존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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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지킴이 이 댁의 후손이기도 한 송만수(61)씨에요. 이 어른 덕분에 백세각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손현희

어쩌면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한 곳, 이런 곳이 제대로 소개되지도 못했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화나는 일이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이런 곳이 제대로 보존, 관리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퍽이나 안타까웠답니다.

이집을 지키고 있는 송만수씨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 옛날 원형대로 복원하는 데도 돈이 무척 많이 든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개인이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라에서도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 안타까운 일이었어요.

게다가 안채의 안과 밖에 새로 쌓은 듯한 축대는 몇 십 년 앞서 더 좋게 꾸민다고 개인 돈을 들여서 쌓았다는데, 도리어 원형을 훼손한 꼴이 되어버렸고, 몇 해 앞서 불이 나는 바람에 사랑방에 걸린 한석봉 선생이 쓴 '백세각'이란 현판조차도 불에 타서 새로 쓴 것이라고 하네요.

이렇듯 뜻 깊은 역사를 지닌 '백세각'에서 보고 들으며 느낀 여러 가지 이야기들은 참으로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너끈했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마음이겠지요.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훌륭한 곳은 앞으로도 널리 알려야 될 책임이 우리한테 있지 않을까요? 또 그것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도 매우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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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각 지붕 이곳을 지키는 어르신 송만수(61)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건축양식 학자들이 이 지붕을 가리켜 매우 남다른 양식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붕이 서로 맞닿아 있는데, 그 곡선이 매우 아름답지요?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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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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