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우진아, 이것 봐라! 할머니가 타온 상패"

2000년에는 상상도 못했던 2010년 내 모습... 할머니 시민기자

등록 2010.03.07 12:00수정 2010.03.07 12:0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오마이뉴스>가 창간10주년을 맞은 2월 22일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2월22일상, 으뜸상, 오름상, 대학생기자상 등을 수상한 시민기자들이 오연호 대표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정현순 시민기자. ⓒ 남소연


"아들 이것 좀 봐라. 네 엄마가 <오마이뉴스>에서 타온 상패."
"어 우리 엄마가 이런 것도 탔어. 축하해요."
"그렇지. 네 엄마 정말 대단하지. 40대도 아니고 50대 초반도 아니고 60살이 다 된 할머니가 정말 대단해."


남편은 그동안 내가 활동하는 시민기자에 대해서 이렇다저렇다 말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2010년 오마이뉴스 10주년, 2월22일상을 타던 날에는 칭찬이 늘어졌다.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를 시작하고 햇수로 9년 만에 받아보는 큰상이다.

60살을 코앞에 둔 내가 오마이뉴스가 아니면 어디에서 그런 상을 타보겠는가?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항상 '나도 저런 상 한번 타봤으면. 언젠가는 꼭 탈 거야'하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오마이뉴스이고 이루게 해준 것 역시 오마이뉴스이다.

2002년, 오마이뉴스와의 첫 만남

2000년에 난 내 인생의 새로운 삶을 여는 첫발자국을 어렵사리 떼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배우기 힘들다는 피아노를 배운 것이다. 그것은 오마이뉴스와의 만남의 서곡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도전에 나이가 무슨 상관 있냐고 하지만 막상 나이가 들면 생경한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2002년 12월 15일 오마이뉴스에 올린 첫 글은 '손자 키우기 두 달만에 그만둔 사연'이다. 그 기사가 메인톱에 올랐지만 그때 난 메인톱의 가치를 몰라 마음껏 좋아하지도 자랑하지도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 알고 보니 나 같은 사람이 그곳까지 오르기란 정말 힘든 일이었다.


2002년 늦은 봄쯤으로 생각된다. 자유기고가 과정을 마치면서 내놓았던 글이 바로 그 글이었다. 내가 그 글을 올린다고 하니 어떤 이는 "그런 글을 올려도 되나 보지?" 했다. 어쨌든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올려보라고 해서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가입이란 것도 난생처음으로 하고 글을 올리게 되었다. 모든 것이 첫 경험이라 어리둥절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글이 안 올라간다고 선생님께 몇 번이나 전화해서 겨우 올린 기사가 그 글이다.

그때만 해도 맞벌이 부부들의 육아문제가 그렇게 심각한 줄 몰랐다. 또 손자를 돌보지 않고 자기생활 하겠다고 나선 할머니도 그리 많지 않은 듯했다. 그런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넷매체에 올린 할머니는 더더욱 없었으니 관심을 한몸에 받을 수밖에. 그 글 하나로 잡지사, 방송국 등 여러 곳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 당시에 인터뷰란 것도 경험해보게 되었다. 경인방송에서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방영하기도 했다. 모든 일들이 순식간에 이루어져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미사 시간에 신부님 강론을 들으면서도 온통 글을 어떻게 쓸 것인가? 운전을 하면서도, 밥을 하면서도, 걸으면서도 글쓰기가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두 번째로 올린 기사는 '피아노 치는 할머니의 행복'이란 글이었다. 48살이란 늦은 나이에 배운 피아노에 대한 기사는 KBS TV <행복한세상>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흥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아도, 쇼핑을 하지 않아도, 여행을 가지 않아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8꼭지의 글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큰 보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도 교양지에 실린 글이 다수 있고, 방송 패널로 4~5년 활동하면서 동네에서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다. 그런 일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그 나이에 할 일이 있으니 얼마나 좋아. 또 돈도 벌고. 자기 용돈은 충분히 벌지"한다. 그러던 2005년인가 2006년에는 지역신문에서 나를 취재를 한 적이 있었다. 취재가 끝나고 돌아가는 시민기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난 또 다른 꿈을 꾸기도 했다.

'좀 더 열심히 해서 나도 저기에서 활동 한번 해봐야지!'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시민기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내고 기다렸다. 드디어 2009년에 그곳의 시민기자가 되어 현재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것이 모두 오마이뉴스에서 갈고 닦은 덕이기도 하다.

세상과의 소통, 새로운 꿈과 새로운 목표

오마이뉴스에 올린기사 중에는 생나무가 제법 많았다. 포기하고 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고 생나무로 남은 글을 읽어보면 그럴만한 이유를 발견하곤 했다. 생나무로 남을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나무를 통해서 나는 조금씩 성숙해가고 있었다. 만약 그때 포기했더라면 지금의 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생나무로 남은 기사의 문제점을 알기 위해서는 다른 기사들을 많이 읽어보고 공부를 해야 했다. 다른 시민기자들의 기사를 읽으면서 '희로애락'을 느꼈고, 그들의 삶을 통해 조금씩 넓어져 가는 듯했다. 그러다 사회·정치·문화 등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제대로 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세상과 소통하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몇십 년 동안 보아왔던 신문을 끊기도 했다. 아들이 그렇게 끊으라고 했건만 들은 척도 하지 않던 내가 스스로 끊은 것이다. 하루도 신문을 안 보면 무언가 할 일을 안 한 것처럼 허전했었는데. 그렇다고 신문에서 특별히 무엇을 얻는 것이 없는데도 말이다. 남편도 "아주 잘했어"하며 불편한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탁월한 선택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손자가 오니 얼른 "우진아 이것 봐라. 할머니가 타온 상패", "어 이거 진짜 할머니가 타온 거야?", "거기 써진 거 읽어봐" 한다. 손자가 큰소리로 읽는다. "2월22일상 정현순. 모든 시민은 기자다, 할머니가 정말 기자야?" 남편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번진다.

얼마 전부터 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오름에 오르고 싶은 꿈과 좋은 소재로 연재기사도 쓰고 싶다. 어디 그뿐인가 허락한다면 내 나이 70살 80살까지 글을 쓰고 싶고, 오마이뉴스 20주년 30주년도 같이 하고 싶다.  

오늘도 내일도 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그럴  때 난 내 나이를 까맣게 잊곤 한다. 이것이 2000년에는 상상도 못했던 2010년의 내 모습이다.

덧붙이는 글 |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공모


덧붙이는 글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공모
#오마이뉴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주로 사는이야기를 씁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