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공화국의 국어 게릴라로 살아남기

[공모- 2000년의 나, 2010년의 나] 끝나지 않은 영어와의 싸움

등록 2010.03.08 08:31수정 2010.03.0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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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0년 전인 2000년의 시작. 컴퓨터 전문가들이 그토록 우려하던 '밀레니엄 버그'는  없었지만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내게는 그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대입 수학 능력 시험을 위한 2년간의 길고 긴 입시생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보충 수업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야간 자율학습으로 밤을 마무리,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몽둥이 세례가 날아오는 스파르타식 교육, 대입을 앞둔 학생의 생활은 붕어빵 모양새처럼 똑같았다. 그 틀에 박힌 생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떨어진 지상과제였다.

그렇기에 천국이라도 올 줄 알았던 투 밀레니엄 시대는 알고보니 악몽같이 끔찍한 날들이었다. 지금에서야 학생 인권이 많이 개선되어 '사랑의 매'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이 많이 사라졌지만 내가 다니던 2000년 초의 학교는 때리기도 참 많이 때렸다. 시험 못 봤다고 때리고, 떠든다고 때리고, 까분다고 때리고, 심지어 자기 기분 안 좋다고 분풀이 식으로 때리는 선생님까지 있었으니, 학교를 다니면서 '참 별 이유로 맞을 수 있구나' 를 배웠다.

영어 공화국의 국어 게릴라로 살아남기

그런데 그 무수히 맞았던 매 중, 단 하나는 맞을 만 했고, 맞을 것을 각오했던 일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당시 난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께 폭탄 선언을 했다. '영어 공부 안 할래요'라고 말이다. 물론 그 외침의 결과, 엄청나게 맞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딩 때나 지금이나 내 꿈은 단 하나 기자. 꿈을 이루는 데 영어가 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난, 문학 특기자였기에 국어랑 사회만 잘하면 될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넌 대체 왜 영어 공부 안 해?" 라고 물으면 영어 공화국이 돼가는 우리 사회가 못마땅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를 들곤 했다.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영어를 잘해야만 대우받은 우리나라의 세태가 몹시 못마땅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런 내 의지를 보여 줄 첫 거사 날이 왔다. 모의고사였다.

고3을 앞두고 본 모의 고사였기 때문에 당시 분위기는 꽤나 엄중했다. 거기서 내가 일을 냈다. 영어 점수를 13점(기억이 정확하다면) 맞았던 것이다. 13점... 황당한 점수에 친구들은 놀랐고 부모님은 당황했고 담임은 경악했다. 반 영어 평균 점수를 깎아먹은 데 격분한 친구들과 담임은 "영어 교사인 아버지한테 좀 여쭤봐"라고 끊임없이 충고했고, 부모님은 "영어 과외라도 시켜주랴?"라고 걱정 어린 권유를 했다.

하지만 난 영어가 필요 없다고 믿은 국어 게릴라, '확신범'이었기 때문에 당당했다. 물론, 13점은 찍어도 받을 점수지만 학생의 본부인 최선을 다하고 받은 점수라 부끄럽지 않았다. 어릴 땐 믿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영어보다 국어가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영어에 발목 잡힌 10년, 후회하진 않지만...

물론 국어 게릴라가 영어 공화국에서 제대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입 수학능력 시험에서 언어 영역과 사회 영역을 무진장 잘보고도 영어란 녀석에게 발목을 잡히고 말았기 때문이다.

대학 입학 후에도, 영어 때문에 제약을 받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대학 입학 후, 편입을 생각했지만 대부분 대학에서 영어 위주의 시험을 봐 과감히 포기해야 했다. 또 기업에서 진행하는 외국 여행 프로젝트에 응모하고 싶어도 영어 점수를 내야 했기 때문에 머뭇거리곤 했다. 신문사 인턴을 하고 싶어도 토익 점수를 내라는 기본 항목이 날 거슬리게 했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한다는 생각으로 요리조리 위기 상황을 넘겨갔다. 꼭 영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그때그때 기지로 벗어나곤 했다. 그래서 다행히 영어 없이도 언론 매체 인턴, 기사 공모전 수상, 시민기자 활동 등을 통해서 나름대로 좋은 경력을 쌓아가고 있었다.

'그래, 까짓것 영어 점수 없어도 해낼 수 있어!"

비록 영어는 못했지만, 많은 경력을 쌓았기에 요즘 대학생들이 흔히 말하는 스펙에서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영어가 없어도 잘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군 제대 후, 영어가 필요 없다는 내 신념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내 바람과는 달리, 세상은 영어에 환장해(?) 버린 것이었다. 어느 정권 인수위의 높은 분 입에서는 오렌지를 '어륀쥐'로 발음해야 한다는 둥, 영어 몰입 교육을 해야 한다는 둥. 웃지 못할 발언까지 나오는 세상. 학부모들은 국제고에 환장하고,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토익 점수가 모든 것이 되는 듯한 나라였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 탓일까? 기업들은 물론 언론사들마저, 토익 몇 점 이상의 기준을 정해, 서류 통과의 기본 사항으로 만들었다. 취업을 앞두고 서류를 쓸 때면 꼭 따라붙는 영어점수 기입란은 내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영어 점수를 기입하지 않으면 뭐 하나 결격사유가 있는 것 같은 것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영어 없이도 잘 해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게 아니었다. 연습 삼아 본 서류 전형에서 영어 점수를 기입하지 않아 번번히 낙방을 했다. 그렇기에 마음이 불편한데 어느 날 하루는 중학생인 사촌 동생을 만났다. 그런데 사촌동생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형, 형은 토익 점수 몇 점이야?"라고 천진스럽게 묻는 것 아닌가? 난 별 생각 없이 "넌 몇 점이야? 역으로 물었다.

그런데 들려온 대답에 난 머리를 망치로 쿵하고 맞은 기분이었다. "형, 난 700점대 후반", 세상에 중학생이 점수가 700점 후반이라는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마음이 확 가라앉았다. 너도 나도 영어에 열중하는 세상, 난 이미 뒤쳐져 있었던 모양이다.

울컥한 마음에 하루는 토익 만점 받은 친구와 술을 먹다가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런 내 상황을 아는 죽마고우 친구가 내게 따가운 충고를 한다.

"진성아. 네가 영어를 잘하고 나서 안 하는 거랑, 못하는 거랑은 천지차이야. 네가 문제 의식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최고의 자리에서 당당히 바꿔봐."

진짜 실력파 국어 게릴라가 되기 위해서

생각해보니 그랬다. 영어 공화국이 된 이 사회에서, 영어 못하는 것은 결국 변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 영어를 안 했다고 말을 했지만, 정작 남들이 보기에 영어를 못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뒤늦게 깨달았다. 영어 공화국에서 국어 게릴라로 살아남으려면 그만한 영어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사실을,

'그래 까짓것 이제부터라도 해보지 뭐. 열심히 하면 금방 해 낼 거야.'

그렇게 뒤늦은 영어 공부는 시작됐다. 영단어부터 시작해 기초적인 문법을 철근같이 씹어 먹는 듯 공부하며 영어 완전 정복을 외쳤다. 그 외침이 벌써 작년의 일이다. 하지만 2010년이 되어도 나의 영어 실력은 별반 변화가 없다. 왜일까?

틈틈이 성적이 잘 오르지 않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물론 기본 실력이 워낙 바닥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하루는 생각 끝에 그보다 납득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꿈을 이루는데 과연 영어가 필요한 것인지 아직 의문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아무튼 덕분에 2000년의 나와 마찬가지로 2010년의 나도 영어 공화국에서 국어 게릴라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영어를 외면했던 그때와 달리 영어 완전 정복을 외치며 밤낮 없이 영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어가 판치는 이 세상이 역겹다고? 그렇다면 너희가 룰을 만드는 사람이 되면 될 것 아니냐. 이 악물고 죽도록 공부해서 영어 중심 세상을 없애라.'

문득 드라마 <공부의 신>에서 나왔던 룰을 바꾸라는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그것을 내 멋대로 해석해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자극제로 삼고 있다. 하루 빨리, 영어와의 무의미한 싸움을 끝내고 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 10년 간 계속되는 영어와의 네버엔딩 스토리에서 내려진 결론이다.
#영어 #영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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