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탈미(脫美), 애니메이션에서 먼저 만나다

애니메이션에서 미리 본 일본 정치의 변화

등록 2010.03.10 18:34수정 2010.03.1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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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8월 30일 치러진 중의원 선거에서 총 480석 가운데 308석을 얻으며 압도적 승리를 한 일본의 민주당은 54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어 내며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집권 민주당의 하토야마 총리는 노골적으로 탈미입아(脫美入亞)를 내세우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얘기하고, 오키나와 현의 후텐마 주일 미군기지를 옮기는 문제에서도 오키나와 주민의 의사가 중요하다며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한편 민주당의 실세인 오자와 간사장은 2009년 12월 10일 민주당 소속 의원 143명을 포함해서 무려 643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당시 오자와 간사장은 "140여 명의 국회의원이 한 나라를 한꺼번에 방문한 것은 유례가 없다"면서 "양국의 우호 친선 관계를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중국 측도 알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일본 내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미국에 경도되어 있는 대외관계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극우신문으로 유명한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2008년 1월 1일 신년 사설의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다극화(多極化) 세계로의 변동에 대비하자.'

사설에서는 유일 초대국, 즉 일극(一極)으로서의 미국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으며, 새로운 극(極)으로서 중국의 부상에 대한 일본의 관계설정이 주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극우세력들조차 저물어 가는 미국의 패권과 부상하는 중국 등의 신흥세력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런데 필자는 좀 더 일찍, 그것도 약간은 뜬금없는 분야인 애니메이션에서 일본의 노골적인 탈미(脫美) 정서를 발견했다. 요미우리신문 사설보다도 훨씬 이른 2006년 가을에 마이니치 방송을 통해 전파를 탄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가 그것이다.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노골적으로 '반미' 내세워 인기 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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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주인공인 를르슈. 카리스마가 넘친다. ⓒ SUNRISE


기동전사 건담의 제작사로 유명한 선라이즈(SUNRISE)가 제작을 맡고 <무한의 리바이어스(1999년)>, <스크라이드(2001년)>, <플라네테스(2003년)> 등의 작품으로 이름을 날린 타니구치 고로가 감독을 맡은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는 일본 내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끈 상업용 TV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의 설정이 무척 노골적이다.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이 등장하는데 세계지도에서 정확하게 미국의 위치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한편 일본은 에어리어 11(AREA 11)이라는 이름으로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식민지 상태에 있다. 일본에서만 나오는 사쿠라다이트라는 광석의 이권을 둘러싸고 브리타니아 제국과 전투를 벌였는데 패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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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에 나오는 배경설정. 오른편에 있는 아메리카 지도에 '브리타니아 제국'이 명확히 써 있다. ⓒ SUNRISE


주인공인 를르슈 란페르지는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황제의 아들이지만, 복잡한 내부 문제로 일본에 유배되어 있는 상태다. 자신의 개인사로 인해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를르슈의 목표는 브리타니아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를르슈는 일본인들과 힘을 합쳐 레지스탕스를 결성하게 된다. 점점 힘을 얻어가는 가운데 브리타니아 제국과의 결전을 위해서, 를르슈를 중심으로 한 일본은 중화연방(중국)과 연합군을 형성한다. 그리고 전 세계는 브리타니아 제국 대(對) 반(反)브리타니아 제국의 대결구도로 나뉘게 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았겠지만, 브리타니아 제국에서 브리타니아(Britannia)라는 이름조차 미국을 연상시킨다.

그 무슨 좌파 애니메이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2006년 일본의 마이니치 방송에서 상영된 상업용 TV 애니메이션의 설정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 R2>라는 제목으로 2기가 제작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블러드 플러스>, 오키나와 배경으로 미국의 제국주의 행태 비판

뭐 애니메이션 한 편 가지고 호들갑을 떠느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걱정 마시라. 물론 필자도 한 편만 소개할 생각은 아니니까.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가 방영되기 일 년 전인 2005년 가을에 방영된 <BLOOD +>(블러드 플러스)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오토나시 사야는, 외모는 여고생이지만 이른바 흡혈귀다. 좀 투박하게 얘기하자면, 교복을 입은 흡혈귀 오토나시 사야가 인간의 편에 서서 동족 흡혈귀들을 칼로 썰어내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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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BLOOD +' 관련 이미지 ⓒ 프로덕션 IG


재미있는 것은 얘기가 펼쳐지는 무대다. 오토나시 사야가 살고 있는 곳은 일본 내에서 미군기지로 유명한, 그 말 많고 탈 많은 오키나와다. 사야가 잡아야 하는 흡혈귀들은 사실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내에서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생체병기의 실험체들이다. 그리고 배후에는 다국적 제약회사가 돈을 대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에는 심심치 않게, 그리고 굉장히 노골적으로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태들을 비판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물론 <BLOOD +> 역시 <코드기어스 반역의 를르슈>처럼 인기를 끈 상업용 애니메이션이다. 물론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도 친숙한 작품인 것은 말할 나위 없는 것이고.

<태양은 다시 뜬다>, 미국 금융계 공격하고 자본주의 대안 모색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만화책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발견된다. 알다시피 일본은 만화의 저변이 엄청난 나라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만화책을 읽는 분위기다 보니 다양한 분야가 소재로 다뤄지며 굉장히 전문적인 내용을 다룰 때도 있다. <DAWN : 태양은 다시 뜬다>라는 만화는 미국과 일본 간의 금융게임을 다룬 만화책이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증권맨의 필독서라고 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만화다.

<DAWN : 태양은 다시 뜬다>의 주인공인 야하기 타츠히코는 미국 금융계에서 명성을 날린 일본인으로 등장한다.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그가 홀연 일본으로 귀국해서 노숙자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 만화의 첫 장면이다. 야하기 타츠히코는 남들이 낙오자로 무시하는 노숙자들을 규합해서 금융회사를 차리고, 그 회사를 통해서 미국의 금융계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야하기 타츠히코가 이런 행위를 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미국에서 했던 행동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에서 금융계의 신화로 떠오르던 야하기 타츠히코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미국에서 하고 있는 금융거래들이 결국 일본의 경제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일본에도 도입되면서 빈부격차는 심해지고 노숙자가 늘어나는 일본의 현실에 괴로워하던 그는 미국에서의 명성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전매특허인 금융기법을 통해 미국 금융계를 공격하면서 일본을 다시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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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DAWN 태앙은 다시 뜬다'의 한 장면 ⓒ 대원씨아이


야하기 타츠히코의 움직임은 경제에서만 머물지 않는다. 머니게임을 통해 은행을 인수하게 된 그는 이 자금을 발판으로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결국 자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역시 미국과 거리를 두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봐야할까? 몇 년 전에 나온 만화가 지금 일어나는 일을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것은 자본주의 금융계의 총아인 주인공 야하기 타츠히코가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대안 체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장면이다. 이런 만화가 일본 증권맨의 필독서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그래서 필자는 일본 자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서 노골적으로 탈미입아(脫美入亞)를 내세우며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얘기하고, 주일미군기지 문제로 미국과 대립할 때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이미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일본의 분위기에 미리 놀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민당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 오히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오히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가 더욱 기대가 되는 느낌이다.

문화라는 것은 그 시대의 정서를 어떤 방식으로든 담아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시대의 정서를 올바르게 담아낸 문화들은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앞서 다룬 작품들은 그 무슨 비(非)인기 애니메이션이나 만화가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들이다. 그리고 이 사랑받는 작품들 속에 녹아들어 있는 내용들이 조금씩 현실화되고 있다. 그것이 지금의 일본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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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동쪽의 에덴>의 한 장면 ⓒ 프로덕션 IG


작년에 일본에서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킨 인기 TV 애니메이션 <동쪽의 에덴>은 최근 국내에서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개봉하기도 했다. <공각기동대>, <정령의 수호자> 등 걸작을 만들어 낸 실력파 카미야마 켄지가 감독을 한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니트족'이다. 배울 의지도, 취업할 의지도 없이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인 '니트족'은, 일본에서 얼마나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한지를 잘 보여주는 단어다. <동쪽의 에덴>에서는 이 니트족들이 집단적 행동을 통해 주인공인 타키자와 아키라를 도와서 일본 사회를 바꾸는 데 나선다.

<동쪽의 에덴>뿐만 아니라, 최근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는 부쩍 '니트족', '프리터' 등으로 대변되는 청년실업문제와 사회양극화문제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필자가 일본판 탈미(脫美) 애니메이션 및 만화를 접한 지 몇 년 만에 일본 정권이 바뀌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 지금, 일본에서는 사회적 빈곤문제와 청년실업문제를 다루는 애니메이션과 만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몇 년 후의 일본이 어떻게 변할지 기대가 되는 이유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계간지 <미래와 희망>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계간지 <미래와 희망>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일본정치 #탈미입아 #애니메이션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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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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